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서고 위치: 제2심층 서해서가 은철함
문서 인장: 「나무와 뿌리」「물방울과 불꽃」
문서 제목: 뤼케시온의 검은 장갑 - 바다의 목소리
보관 연대: 세오력 92년 추분기
발견 경위: 뤼케시온 칼레온 가문 저택 지하 금고
문서 보존: 소금기에 바래고 잉크가 번진 부분 있음
열람 제한: 뤼케시온 귀족회 승인 필요
관련 문서: 「킨셰어 통일전쟁 민간 피해 기록」「뤼케시온 몰락 귀족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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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 관리인 주석]
뤼케시온의 칼레온 가문 저택을 철거하던 중, 지하 금고에서 발견된 문서다.
검은 벨벳 장갑 한 켤레, 초록빛 비단 조각, 그리고 이 일기가 함께 봉인되어 있었다.
작성자는 궁정화가 레안드로 드 메시스로 추정된다.
킨셰어 여제 시대 왕실 화가였으나,
원인 불명의 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뤼케시온으로 낙향한 인물이다.
문서가 봉인된 이유는 명확하다.
칼레온 가문의 치부,
그리고 뤼케시온 신흥 귀족들의 위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기록이 한 여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아냈다는 점이다.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비극으로 과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실만을 기록했다.
‘벨리사’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섰던 여인의 본명은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칼레온 가문의 족보에는 그녀에 대한 기록이 없다.
하지만 일기를 읽고 나면 그녀가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대 위에서 무엇을 노래했고, 무대 아래에서 무엇을 감췄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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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시작]
세오력 73년 하지기, 보름달이 차오르는 밤
벨리사가 무대에 섰을 때, 파도가 도시를 덮치던 날.
‘비늘의 전당’이라는 이름의 극장은 뤼케시온 항구 끝자락,
썰물 때만 육지와 연결되는 작은 섬에 있었다.
밀물이 차오르면 극장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등불이 되었고,
파도 소리가 객석 밑바닥을 두드렸다. 건물을 지은 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멘트 문명 시대의 유적을 개조했다는 소문만 돌았다.
벽에는 해초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천장의 돔은 밤하늘이 아니라 깊은 바다 밑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나는 객석 뒤편 기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앉을 수가 없었다. 왼쪽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고,
목발에 의지해 서 있는 것조차 고통이었지만, 앉으면 일어서기가 더 힘들었다.
킨셰어의 궁정에서 추락한 지 삼 년이 지났어도 통증은 여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증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리는 분명 나았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몸은 다시는 예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객석 앞줄에는 비단옷을 입은 상인들이 앉아 있었고,
뒷줄에는 해상 교역으로 돈을 번 선장들이 술잔을 기울였으며, 구석에는 몰락한 옛 귀족들이 모여 수군거렸다.
향수 냄새와 생선 비린내와 소금기가 뒤섞인 공기는 퍽 무거웠다.
킨셰어의 통일전쟁이 끝난 지 오 년, 뤼케시온은 옛것과 새것이 뒤엉켜 썩어가고 있었다.
무대의 촛불이 일제히 꺼졌다.
누군가 숨을 죽였고, 술잔이 탁자에 내려앉는 소리가 멈췄다.
어둠 속의 파도 소리만 들렸다. 극장 밑바닥을 때리는 물소리는 사이렌의 박동 같았다.
빛 하나가 무대 중앙에서 피어올랐다. 초록빛 인광석으로 만든 등불이었다.
멘트 시대의 유산, 메데니아의 정신체가 깃든 돌. 빛은 천천히 커졌고, 그 빛 속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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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비단 드레스.
어깨가 드러나고 허리는 조였으며 치마는 발목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드레스가 아니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장갑.
벨벳으로 만든 그 장갑은 팔뚝을 타고 올라가 목 바로 아래에서 멈췄고,
초록빛 드레스와 하얀 목 사이에서 어둠처럼 번졌다.
마치 뤼케시온의 밤이 그녀를 목까지 삼킨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석상처럼 서 있었다.
발도 움직이지 않았고 몸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검은 장갑을 낀 두 팔만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고,
해초가 물결에 흔들리듯 공중에서 춤췄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았다. 그러나 어딘가 차가웠다.
유리알을 굴리는 것 같았다. 가락은 경쾌했고 리듬은 발랄했지만 가사는 달랐다.
“사랑했던 이가 배를 탔네, 돛을 달고
은화 한 닢 쥐어주고 떠났네, 파도 너머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웃으며 보내자
어차피 돌아올 리 없는 사람
약속했던 말은 거짓이었네, 바람처럼
맹세했던 밤은 꿈이었네, 물거품처럼
믿지 마라 믿지 마라, 잊으며 살아가자
어차피 기억할 가치 없는 사랑”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떤 선장은 술잔을 들어 무대를 향해 흔들었고,
어떤 상인은 박수를 치며 옆사람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구석의 옛 귀족들은 웃지 않았다. 그들은 창백한 얼굴로 무대를 응시했다.
이 노래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벨리사의 얼굴을 그렸다.
목탄으로 빠르게. 인광석 빛 아래 드러난 윤곽, 빛과 그림자의 경계, 입술의 곡선.
… 이상했다. 관객들은 웃고 있었지만 벨리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없었다.
아니, 미소는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고 볼에는 보조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무대 조명이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실제 그녀의 눈은 어둠 속 깊은 우물처럼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았다.
노래는 계속되었다.
발랄한 리듬에 실린 비극적 가사들.
배신당한 여인의 이야기, 버려진 아이의 이야기,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의 이야기.
그녀는 모두 웃으며 불렀다. 관객들도 따라 웃었다.
비극을 직접 마주하기엔 술이 부족했고, 웃음으로 포장된 슬픔은 삼키기 쉬웠다.
벨리사의 팔이 춤췄다.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발은 바닥에 붙어 있었고 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다. 오직 장갑 낀 팔만이 살아 있었다.
위로 뻗었다가 옆으로 흘렀고,
교차했다가 펼쳐졌다. 그 팔들이 그녀와 별개의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음이 끝났을 때 객석은 폭발했다.
박수와 환호,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 발을 구르는 진동.
그러나 벨리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전히 석상처럼 서서 관객들을 내려다봤다.
장갑 낀 손이 천천히 내려왔고, 몸이 앞으로 숙여졌다.
인사였다. 하지만 그녀의 인사는 경의가 아니라 모두에 대한 관찰 같았다.
인광석이 꺼졌다.
어둠이 무대를 삼켰고, 벨리사는 사라졌다.
나는 목탄 스케치를 내려다봤다.
뭔가 잘못되었다. 선이 어긋나 있었고 비율이 맞지 않았다.
물론 이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그린 얼굴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이었다.
객석의 남자들은 환호했지만 내 손은 아름다움을 찾지 못했다.
초췌함, 공허함, 지쳐버린 무언가. 왕실에서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항상 아름답게 그렸다.
실제보다 눈을 크게, 턱선을 날렵하게, 피부를 매끄럽게.
하지만 지금, 나의 손은 거부했다. 진실만을 그렸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극장 밖에서는 파도 소리가 더 커졌다.
만조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시간 안에 이 섬은 바다에 갇힐 것이다.
나는 극장 뒤편으로 돌아갔다.
목발을 짚고 좁은 복도를 지나 분장실 문 앞에 섰다.
문 틈으로 빛이 새어 나왔다. 안에서 누군가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들렸다.
거칠고 불규칙한 호흡. 무대 위의 맑은 목소리와는 전혀 다른.
나는 문을 두드렸다.
“… 누구세요?”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목이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화가입니다. 레안드로 드 메시스.”
침묵. 호흡 소리가 멎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벨리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여전히 초록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장갑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분장이 지워져 얼굴은 창백했다.
입술에 남은 연지가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왕실 화가가 이런 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 모두 지난 일입니다.”
“그렇군요.”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시선이 목발에 머물렀다.
“들어오세요. 서 있기 힘들 테니까요.”
분장실은 좁았다. 거울 하나, 의자 하나, 옷걸이 하나. 그게 전부였다.
창문은 없었고 양초 하나가 거울 옆에서 타고 있었으며, 벽에는 물기가 배어 있어 공기는 습했다.
극장 밑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서 밀물 때마다 건물 전체가 물에 잠기는 느낌이었다.
벨리사는 의자에 앉았다. 나는 벽에 기댔다.
목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물소리가 울렸다.
“제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었나요?”
“그렇습니다.”
“어째서인가요?”
“당신의 얼굴이 그려지지 않아서입니다.”
그녀는 웃었다.
진짜 웃음. 무대 위의 가짜 미소가 아닌 비웃음.
“정직하시네요. 대부분의 화가들은 ‘아름다워서’라고 하던데.”
“거짓말은 못 합니다.”
“그래서 왕실에서 쫓겨났나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말을 이었다.
“불구는 불구를 압니다.
당신의 다리가 바르지 않다는 걸 무대 위에서도 봤어요.
객석 뒤편에 서 있었죠. 앉지 않고. 앉으면 일어서기 힘드니까.”
그녀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나를 향했다.
“저도 압니다. 그런 고통.”
“당신은 다리가 멀쩡해 보이는데요.”
“물론 제 다리는 멀쩡하죠.”
그녀는 장갑 낀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벨벳이 양초 불빛에 반짝였다.
“하지만 손은 아니에요.”
“다쳤습니까?”
“다친 게 아니에요. 망가진 거죠.”
그녀는 거울에서 시선을 돌려 나를 똑바로 봤다.
“그림을 그려도 좋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시죠.”
“나를 아름답게 그리지 말아요.
예쁜 거짓은 질색이거든요.”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있는 것은 한때 그것을 가져본 자들뿐이다.
킨셰어의 궁정에서 초상화를 의뢰하는 모든 귀족은 실제보다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다.
주름을 지우고 흉터를 감추고 나이를 속이고.
하지만 이 여자는 아름답게 그리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진정 귀족이었다.
“왜입니까?”
“아름다움은 거짓이니까요.”
그녀는 다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얼굴은 창백했고 눈 아래 그림자가 짙었다.
“무대 위의 나는 거짓입니다. 저 장갑도, 저 드레스도, 저 미소도. 전부 거짓말이에요.
하지만 나를 담아낸 그림만은 진짜였으면 좋겠어요. 적어도 한 사람은… 나를 진짜로 봐줬으면.”
양초 불빛이 흔들리며 그림자를 벽에 던졌다.
밖에서 파도 소리가 커졌다.
만조였다. 극장은 이제 바다 한가운데 떠 있었다.
“그려드리겠습니다. 진실을.”
“...고마워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내쉬었다.
호흡이 거칠었다. 한참을 그렇게 호흡을 고르다가 다시 기침했다.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장갑 사이로 피가 스며들었다.
검은 벨벳이 더 검게 물들었다.
“피…”
“괜찮아요. 자주 그래요.”
그녀는 손을 내렸다. 피는 보이지 않았다.
검은 장갑이 전부 숨겨내었다.
“목이 망가졌어요. 노래하면 할수록 더 망가져요.
하지만, 노래를 멈출 수는 없어요. 노래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거든요.”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무대 밖에서는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목이 막혀서. 노래할 때만 목소리가 나와요. 신기하죠?
신은 제게서 모든 걸 빼앗았지만 무대 위에서만큼은 살게 해 주셨어요.”
양초가 흔들렸다.
그녀의 얼굴이 어둠에 잠겼다가 다시 드러났다.
“내일 또 오세요. 그림을 그리려면 여러 번 봐야 할 테니까요.
공연은 매일 밤 있어요. 만조가 차오르는 시간에.”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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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으로 향했다.
목발을 짚고 한 발 한 발 옮겼다.
문 앞에서 뒤를 돌아봤다.
벨리사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장갑 낀 손이 목을 쓰다듬고 있었다.
천천히,
마치 목을 조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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