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세오력 73년, 하지기 열흘째 날
벨리사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한 것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공연 중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던 중 갑자기 그녀의 음이 뒤틀렸다.
높은음에서 낮은음으로 떨어지며 목소리가 찢어졌다. 관객들은 웅성거렸다.
하지만 벨리사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노래했다.
목소리는 점점 더 갈라졌고, 숨소리가 섞였고, 어떤 음은 아예 나오지 않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 박수는 이전보다 적었다.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어떤 이들은 속삭였다. “늙은건가?” “목이 나갔나?” “이제 끝이군.”
나는 분장실로 달려갔다.
목발을 짚고 뛰는 것은 고통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문을 열었다.
벨리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검은 장갑이 피로 젖었다.
“치유사를 불러야…”
“소용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호흡이 가라앉았다.
“이미 여러 치유사를 봤어요. 성직자들도... 다들 같은 말을 해요.
신이 모든 것을 도울 수는 없으니, 노래를 멈추라고. 목이 완전히 망가진다고.”
“그럼 멈춰야 합니다.”
“… 멈출 수 없어요.”
그녀는 일어섰다. 비틀거렸지만 거울 앞으로 갔다.
피 묻은 손으로 거울을 잡았다.
“노래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요.
말도 할 수 없어요. 노래할 때만 목이 열려요. 그게 제 저주예요.”
“저주?”
“신이 준 저주요. 아니면 축복이거나.
… 구분이 어렵긴 하지만.”
그녀는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다시 상처 입은 손이 드러났다. 이번에는 피도 묻어 있었다.
“이 손으로 부엌일을 했을 때, 신에게 빌었어요. 여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래서 신이 들어준 거죠.
무대를 주었고. 목소리를 주셨어요. 대신 대가를 요구했죠.”
“…무슨 대가?”
“목숨.”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을 봤다.
“노래하면 할수록 목이 망가져요. 죽어가요.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면 말도 못 해요. 그냥 숨만 쉬는 인형이 돼요. 그래서 계속 노래해요. 죽을 때까지.”
나는 말을 잃었다.
양초가 깜빡이며 그림자를 흔들었다.
“… 당신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습니까?”
“모르겠어요. 한 달? 두 달? 치유사들도 모를 거예요.
다만 끝이 가까워진다는 건 느낍니다.
매일 밤 노래할 때마다 목에서 뭔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새 장갑을 꺼냈다.
피 묻지 않은 깨끗한 장갑.
“그림은 언제 완성되나요?”
“곧입니다. … 곧”
“서두르세요. 제가 죽기 전에 보고 싶어요.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약속이에요.”
“물론, 약속입니다.”
그녀는 장갑을 다 껴 입었다. 상처가 다시 사라졌다.
피도 보이지 않았다. 검은 어둠이 전부를 삼켰다.
-
세오력 73년, 하지기 열사흘째 날
밤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무너져갔다.
열사흘째 밤의 공연에서 벨리사는 노래의 절반을 속삭였다.
음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고 관객들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들으려 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팔은 여전히 춤췄고, 몸은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었고, 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공연이 끝나자 관객의 절반이 일어나 떠났다.
박수도 듬성듬성했다. 어떤 상인은 돈이 아깝다고 중얼거렸다.
분장실로 가는 복도에서 극장 주인 이보르를 만났다.
나이 든 남자였다. 머리는 희었고 등은 굽었지만 눈은 날카로웠다.
“그림은 언제 끝나오?”
“곧입니다.”
“서두르시오. 시간이 없소.”
“압니다.”
“당신은 모르오.”
이보르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 아이를 열두 살에 샀을 때부터 알았소. 언젠가 이렇게 될 거라는 걸.
목소리를 대가로 삼아 무대를 산 아이니까. 하지만 막을 수 없었소.
막으면 저 아이는 말을 못 하니까. 그냥 인형이 되니까.”
그는 돌아섰다.
“그림을 완성하시오.
저 아이가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게. 무대 위의 거짓이 아니라.”
이보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분장실 문을 열었다.
벨리사는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장갑을 벗지 않은 채.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파래져 있었다.
“레안드로.”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속삭임이었다.
“네.”
“그림… 다 그렸어요?”
“다 그렸습니다.”
“보여줘요.”
나는 캔버스를 가져왔다. 천으로 덮여 있었다.
그녀 앞에 세우고 천을 걷었다.
초상화가 드러났다.
엘리사가 그곳에 있었다. 벨리사가 아니라 엘리사.
초록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상처 입은 손이 드러나 있었다. 화상 자국, 굳은살, 일그러진 손톱. 전부 그렸다.
얼굴도 아름답지 않았다. 창백했고 눈 아래 그림자가 짙었고 입술은 핏기가 없었다.
하지만 눈이 살아 있었다. 무대 위에서 본 적 없는 눈.
슬프지만 단단한. 절망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벨리사는 그림을 봤다. 오래, 말없이. 눈에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턱으로 떨어졌다.
“… 아름답지 않네요.”
“약속했습니다. 아름답게 그리지 않겠다고.”
“그런데…”
그녀는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무대 위의 가짜 미소가 아니라.
“…그런데 좋아요. 처음으로… 제 모습을 봐요. 진짜.”
눈물이 계속 흘렀다. 손이 움직였다. 천천히, 떨리며. 그림을 향해 뻗었다.
하지만 닿지 못했다.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상처 입은 손.
캔버스에 닿게 했다. 차가운 손이 그림 속 손을 만졌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약속… 지켜줘서…”
그녀는 눈을 감았다. 호흡이 거칠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가 눈을 다시 떴다.
“내일… 마지막 공연이에요.”
“마지막?”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어요.
모두… 끝났어요.”
“그럼 공연을 하지 마십시오.”
“해야만 해요.”
그녀는 그림을 다시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 죽고 싶어요.
엘리사로가 아니라… 벨리사로.”
-
세오력 73년, 하지기 보름날
마지막 공연 날 밤, 만월이 떠올랐다.
극장은 가득 차 있었다.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벨리사의 마지막 공연.
어떤 이들은 진짜 마지막인지 확인하러 왔고,
어떤 이들은 구경거리를 보러 왔고, 어떤 이들은 작별을 고하러 왔다.
나는 무대 옆에 섰다. 캔버스를 가져왔다.
완성된 초상화. 천으로 덮어두었다.
인광석이 켜졌다.
무대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벨리사가 걸어 나왔다.
초록빛 드레스, 검은 장갑. 하지만 걸음이 달랐다. 비틀거렸다.
무대 중앙까지 가는데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중앙에 섰을 때 몸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굳어졌다. 석상처럼.
팔이 올라갔다. 천천히.
떨리며. 춤추듯 흔들렸다.
입이 열렸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움직였다. 노래의 가사를 따라.
하지만 목소리는 없었다. 침묵만이 무대를 채웠다.
관객들은 술렁였다. “뭐야?”
“소리가 안 나와.” “사기 아냐?”
하지만 벨리사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입술을 움직였다.
팔을 흔들었다. 몸은 석상처럼 굳은 채. 소리 없는 노래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는 들었다.
관객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파도 소리 사이로, 바람 소리 사이로.
노래가 들렸다.
“사랑했던 이가 배를 탔네, 돛을 달고”
누군가 노래하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거친 목소리로. 객석 뒤편에서.
늙은 선원이었다.
백발의 남자가 일어나 노래했다. 벨리사의 노래를.
“은화 한 닢 쥐여주고 떠났네, 파도 너머”
다른 목소리가 합쳐졌다.
중년의 여자. 옆 테이블의 상인. 한 명, 두 명, 셋.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웃으며 보내자”
객석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벨리사를 대신해.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그녀의 팔이 춤추는 대로.
“어차피 돌아올 리 없는 사람”
나도 노래했다. 처음으로.
목소리는 떨렸지만 함께 노래했다.
무대 위의 벨리사는 웃고 있었다. 진짜 미소였다.
처음으로 무대 위에서 진짜로 웃었다.
노래가 끝났다.
마지막 음이 객석에서 울려 퍼졌다.
벨리사의 팔이 내려왔다. 천천히.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인사하려는 듯.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계속 기울었다. 무릎이 꺾였다.
손이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쓰러졌다.
완전히.
얼굴이 무대 바닥에 닿았다.
객석이 침묵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무대로 뛰어올랐다. 목발을 던지고 기어올랐다.
다리가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벨리사에게 닿았다. 그녀를 기어코 뒤집었다.
눈이 열려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남아 있었다.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가늘게, 거의 들리지 않게.
“벨리사.”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엘리사.”
눈이 움직였다. 천천히.
나를 본다. 초점이 흐렸다.
“… 레안드로?”
“네.”
“… 노래… 들렸어요?”
“들렸습니다. 모두가 당신을 위해 노래했습니다.”
“… 고마워요…”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눈에서.
“… 처음으로… 모두가… 저를 위해…”
말이 끊겼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치유사가 무대로 올라왔다. 나이 든 남자였다.
가방을 열고 도구를 꺼냈다. 하지만 곧 멈췄다.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압니다.”
나는 그를 막았다.
의원은 물러났다.
무대에 나와 벨리사만 남았다.
“엘리사.”
“…네…”
“그림을 봤습니까?”
“… 봤어요… 고마워요…”
“정말로 당신을 그렸습니까? 제가 옳았나요?”
“… 진짜였어요… 정말로… 저를 봐줘서…”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내 손을 잡으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장갑 낀 손이 아니라 맨손. 상처 입은 손.
“… 아프지 않아요… 이제…”
“좋아요, 좋습니다.”
“… 무대에서…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다행입니다.”
“…엘리사로가 아니라… 벨리사로…”
호흡이 느려졌다.
“… 고마워요… 레안드로…”
“천만에요, 엘리사.”
미소가 번지며,
이윽고 호흡이 멈췄다.
손이 풀렸다.
파도 소리가 들렸다.
만조였다. 바다가 극장을 완전히 삼켰다.
객석에서 누군가 흐느꼈다.
늙은 선원이었다. 그가 먼저 노래를 시작한 사람이었다.
나는 벨리사를 안아 올렸다. 가벼웠다. 무대 뒤로 옮겼다.
이보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수고했소.”
“아닙니다.”
“그림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캔버스를 가리켰다.
천이 덮인 초상화.
“무대 옆에 걸어주십시오.
저기. 벨리사가 섰던 자리가 보이는 곳에.”
“… 그러겠소.”
이보르는 캔버스를 들었다.
천을 벗겼다. 초상화를 무대 옆 벽에 걸었다.
엘리사가 무대를 바라봤다. 상처 입은 손을 드러낸 채.
창백하지만 살아 있는 얼굴로.
“… 아름답지 않군.”
이보르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짜요.”
“그렇습니다.
… 진짜입니다.”
-
세오력 73년, 하지기 스무날
장례식은 조용했다. 이보르가 치렀다.
뤼케시온의 공동묘지가 아니라 바다에 수장했다.
작은 배에 시신을 싣고 항구를 떠났다. 해가 지는 시간이었다.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들었고 바다는 검게 변했다.
나는 배에 함께 탔다. 이보르, 극장의 악사 둘, 그리고 나. 그게 전부였다.
벨리사를 기억하는 관객들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시신은 흰 천으로 감쌌다. 장갑은 벗기지 않았다. 검은 장갑을 낀 채 묶었다.
손에는 꽃 한 송이를 쥐어줬다.
뤼케시온에서 자라는 파란 꽃.
소금기를 먹고 자라는.
배가 멈췄다. 항구에서 멀리 떨어진 곳.
깊은 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
이보르가 말했다.
“벨리사는 좋은 가수였소. 최고였소.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소.
무대 위에서만 살았소. 무대 아래에서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쉬시오. 바다가 당신을 받아줄 거요.
노래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시신이 물에 닿았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천이 물에 젖어 가라앉았다.
검은 장갑이 마지막까지 보였다. 물 위로 떠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사라졌다.
바다가 전부를 삼켰다.
배가 돌아왔다. 해가 완전히 졌다.
어둠이 바다를 덮고 뤼케시온의 불빛들만이 보였다.
항구의 등불, 집들의 창문, 극장의 조명.
비늘의 전당으로 돌아왔다. 극장은 텅 비어 있었다.
무대에 인광석만 켜져 있었다. 초록빛이 벽을 물들였다.
벽에 걸린 초상화.
엘리사가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서지 않는 무대를. 다시는 그녀의 노래가 울려 퍼지지 않을 무대를.
“잘 있어요, 엘리사.”
나는 극장을 나왔다.
목발을 짚고 천천히. 뒤돌아** 않았다.
밖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밀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극장이 다시 바다에 잠길 시간이다.
-
세오력 197년 추분기
세오력 92년, 칼레온 가문의 저택을 철거하던 중
이 일기와 함께 발견된 것들이 있다.
검은 벨벳 장갑 한 켤레. 목까지 올라오는 긴 장갑.
피 자국이 배어 있고 일부가 찢어져 있었다.
초록빛 비단 조각. 드레스의 일부로 보인다.
소금기에 바래고 물에 젖은 흔적이 있다.
그리고 레안드로가 그린 초상화의 사본.
상처 입은 손을 드러낸 여인. 창백한 얼굴, 지친 눈, 하지만 단단한 시선.
그림 아래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다.
'엘리사 드 칼레온.
벨리사로 살다가 엘리사로 죽다. 세오력 73년.'
비늘의 전당은 오래전에 이미 폐쇄되었다.
극장 주인 이보르가 죽은 후 아무도 운영하지 못했다.
건물은 비어 있고 무대는 먼지로 덮였다.
하지만 벽에 걸린 초상화만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고 한다.
무대를 바라보며.
아무도 서지 않는 무대를.
나는 이 기록을 읽으며 생각한다. 진실을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고, 비극으로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는 것의 무게를.
레안드로는 약속을 지켰다.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거짓이 없는 진실이, 가면이 없는 얼굴이,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니까.
벨리사, 아니 엘리사는 죽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남았다.
이 기록 안에. 레안드로가 그린 초상화 안에.
그리고 뤼케시온의 늙은 선원들이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 노래 안에.
* 사랑했던 이가 배를 탔네, 돛을 달고
은화 한 닢 쥐여주고 떠났네, 파도 너머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웃으며 보내자
어차피 돌아올 리 없는 사람
약속했던 말은 거짓이었네, 바람처럼
맹세했던 밤은 꿈이었네, 물거품처럼
믿지 마라 믿지 마라, 잊으며 살아가자
어차피 기억할 가치 없는 사랑 *
그녀가 노래했던 것처럼.
발랄한 리듬에 담긴 비극을.
웃으며 부르는 슬픔을.
[문서고 관리인 욘]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