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서고 위치: 제2심층 서해서가 청동함
문서 인장: 「나무와 뿌리」「촛불과 두루마리」
문서 제목: 라켈리움 축제 기록 - 마인 골짜기의 귀환의 밤
보관 연대: 세오력 155년 겨울
문서 보존: 가을잎처럼 약간 바램
열람 제한: 글을 아는 자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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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고 관리인 주석]
마인 골짜기 사람들은 겨울이 올 때면,
라켈리움이라 불리는 황금꽃으로 길을 만든다.
악령을 부르는 의식이라 하여 루어스의 성화 기사단은 이를 금했고,
무력 진압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 세 개의 증언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밤의 기록이다.
세 사람은 같은 밤을 보았지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느 것이 참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다만 보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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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시작]
첫 번째 증언 : 꽃지기 멜리사
내 손등에는 황금빛 가루가 스며들어 물에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이는 지난 육십 년 동안 라켈리움을 만져온 흔적이다.
마이소시아 사람들은 저주의 표식이라 하지만, 나는 자랑스럽게 여긴다.
우리 가문의 여자들은 모두 이런 손을 가지고 살다가 죽었으니까.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혀 있다. 관절은 굽었다. 아침마다 손을 펴는 데 한참이 걸리지만,
겨울이 다가오면 손은 절로 움직인다. 아픔도 잊는다. 몸이 기억하는 의식을 위해.
할머니가 처음 나를 언덕으로 데려간 것은 여섯 살 때였다.
그해 봄에 엄마가 죽었다.
그녀는 폐가 물에 잠긴 것처럼 숨을 쉬지 못했다.
치유사가 왔다.
읽기도 어려운 귀한 약초들을 여럿 달여 먹었으나, 소용없었다.
엄마는 점점 말라갔다. 마지막 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멜리사, 무서워하지 마. 엄마는 멀리 가지 않아.” 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땅에 묻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울 수가 없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흙이 엄마를 덮었다. 완전히 덮었다.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로부터 며칠 후,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서는 “언덕에 가자.” 라고 하셨다.
우리는 마을 뒤편으로 올라갔다. 길은 가팔랐고 숨이 찼다.
할머니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정상에 섰을 때, 온 세상이 황금빛이었다. 라켈리움이 언덕을 뒤덮고 있었다.
해가 그 꽃들을 비추는 모습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노란색도 아니고 주황색도 금색도 아닌,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색이었다.
태양이 응축되어 꽃잎이 된 것 같은 색. 바람이 불었다.
꽃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황금빛 물결.
“정말 아름답지?” 할머니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두렵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은 위험한 것 같았다.
할머니가 무릎을 꿇고서는 황금꽃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꺾었다.
줄기에서 투명한 수액이 흘러나왔는데, 그것이 할머니 손가락에 닿는 순간 잠깐 빛이 났다가 사라졌다.
“이 꽃들이 길을 만든단다. 죽은 이들이 돌아오는 길을.”
할머니가 말했을 때, 나는 물어보고 싶었다. 엄마가 땅속에 묻혔는데 어떻게 꽃이 길이 되는지.
하지만 할머니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어서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가 바구니를 내 무릎에 올려놓으며
“꽃을 따거라. 엄마가 돌아올 길을 만들어야지.” 라고 말했다.
나는 작은 손으로 줄기를 잡았다. 생각보다 질겼다. 한 번에 꺾이지 않았다.
비틀어야 했다. 당겨야 했다. 손톱으로 줄기를 눌러서 끊어야 했다.
꽃이 손에서 떨어질 때마다 향기가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달콤했지만 곧 씁쓸한 뒷맛이 코를 찔렀다.
그다음엔 알 수 없는 냄새가 왔다. 꽃 냄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했다.
산 것의 냄새인지 죽은 것의 냄새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우면서 동시에 맑아지는 것 같았다. 모순적이었지만, 그게 맞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우리는 꽃을 땄다.
바구니가 가득 찼다. 들어보니 보기보다 무거웠다. 꽃의 무게가 아니라기보다, 다른 무언가의 무게였다.
언덕을 내려올 때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언덕 위에서 무언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꽃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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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한동안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석양빛이 할머니의 흰머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할머니가 입술을 움직였다.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도 같은, 주문 같은 낮은 목소리였다.
“피어난 것은 시들고, 시든 것은 다시 피어나며…” 옛 말투였다.
어느 지방의 언어. 우리 골짜기의 언어. 할머니의 할머니가 쓰던 언어.
“자, 이제 길을 만들자.”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는 대문을 열었다. 바구니를 들었다.
대문 앞에 첫 번째 꽃을 놓았다. 조심스럽게. 아기를 눕히듯이.
나도 따라 했다. 한 송이씩 간격을 맞춰서.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을 올라. 방문 앞까지. 방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누워있던 자리까지. 황금빛 길을 만들었다.
방 안이 이상한 빛으로 가득 찼다.
촛불의 빛도 아니고 석양빛도 아닌, 꽃에서 나오는 빛 같았다.
살아있는 빛. 할머니가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올려놓으며 계속 중얼거렸다. 기도를, 혹은 주문을.
“이제 기다려야 한다.” 할머니가 말했다. “언제까지요?”
“자정이 되면 온단다.” 밤이 깊어갔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지만 익숙한 멜로디였다.
가사는 옛 말투여서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슬픔과 그리움이 뒤섞인 노래라는 것을. 할머니의 목소리는 떨렸다.
멈추지 않았다. 나도 따라 부르려 했으나 목이 메어 제대로 소리 내지 못했다.
촛불이 세 개 켜져 있었다. “왜 세 개예요?” 내가 물었다.
할머니는 첫 번째 촛불을 가리키며 “하나는 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를 가리키며 “하나는 죽은 자를 위한 것.” 세 번째를 가리키며 “하나는 그 사이를 위한 것.”
“그 사이요?” 내가 다시 물었다. “경계란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 빛과 어둠의 경계. 기억과 망각의 경계.
그 경계에서만 문이 열린단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정이 가까워지자 공기가 달라졌다. 무거워졌다. 동시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촛불이 바람도 없는데 깜빡이기 시작했다. 라켈리움 길에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미세한 떨림이 점점 강해졌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할머니의 손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길 끝에서 무언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형체가 잡히지 않았다.
빛인지 그림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점점 선명해졌다. 윤곽이 생겼다. 여자의 모습이 되어갔다.
“엄마…” 그리운 단어가 새어 나왔다.
형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라켈리움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방 안으로 들어왔다.
가까이 올수록 얼굴이 보였다. 엄마였다. 아프기 전의 모습. 내가 기억하는 그 미소.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무언가이기도 했다. 엄마는 투명했다. 그 몸을 통해 뒤쪽이 비쳐 보였다.
움직일 때마다 희미한 빛의 자취를 남겼다.
“멜리사, 우리 딸.” 이라고 그것이 말했을 때, 목소리는 바람 소리 같으면서 물소리 같고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같았다. 동시에 엄마의 목소리였다.
나는 손을 뻗었다. 형상도 손을 뻗었다. 우리의 손이 맞닿았다. 차가웠다가, 곧 따뜻해졌다.
이 온기가 진짜인지, 내가 느끼고 싶어서 느끼는 온기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엄마, 정말이에요?” 내가 물었다. 형상은 웃으며 “정말이란 게 뭘까.”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맞는 말 같았다.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는 내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 그녀가 떠나기 전에 자주 불러주던 노래.
“엄마는 어디 있어요?” 엄마의 품을 더 파고들며 물었다.
“제3의 세계에.” 형상이 대답했다. “거기는 어때요?” 형상은 잠시 침묵했다.
“평화로워. 고통이 없어.” “무섭지 않아요?”
“무서웠어. 어두웠으니까. 하지만 눈이 익숙해지면 빛이 보여.
다른 빛. 우리가 아는 빛과는 다른 빛.” “뮤레칸이 있어요? “ 형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하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섭지 않아. 그는… 슬픈 존재야. 버려진 것들을 거두는.”
동이 틀 때쯤 형상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야 해” 엄마가 말했다.
“다시 올 거예요?” 붙잡고 싶다. 세상 모든 일이 내가 멈춰낼 수만 있다면.
“물론이지. 이 때가 오면, 라켈리움이 피어나면.”
“약속해요?” 형상은 미소 지었다. “약속할게, 약속.” 그리곤 그녀는 사라졌다. 새벽안갯속으로 녹아들듯이.
바닥의 라켈리움들이 시들기 시작했다. 황금빛이 바랬다.
꽃잎이 검게 변하며 부서졌다. 향기만이 남았다. 방 안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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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오십 년이 넘게 지났다.
나는 할머니가 되었다.
이제 내가 꽃지기가 되어 매년 언덕에 올라 라켈리움을 딴다.
매년 귀환의 밤이 되면 무언가 왔다. 엄마였다. 할머니였다. 남편이었다.
나는 떠났던 그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손을 잡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의심이 생겼다. 정말 그들이었을까. 정말 어머니였고 할머니였으며 남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본 걸까. 라켈리움의 향기가 만들어낸 환영일까.
혹은 더 나쁘게는 뮤레칸의 영역에서 온 무언가가,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빌린 것일까. 확신할 수 없다.
올해도 나는 길을 만들었다.
루어스의 성화기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의식을 치렀다.
자정이 되자 형상이 나타났다. 남편의 모습이었다. “여보, 정말 당신이오?” 내가 물었다.
형상은 잠시 침묵했다가. “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말이 확신을 주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손을 잡았다.
언제나 그랬듯 동이 틀 때 형상은 사라졌다.
라켈리움도 시들기 시작했다.
나는 늙었다. 손은 굽었고 무릎은 아프다.
하지만 내년에도 언덕에 오를 것이다.
내년에도 라켈리움이 핀다면.
누구도 막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리운 그들이 온다면,
그것이 진실이든 환영이든 나는 양팔 벌려 맞이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에.
확신이 없어도 사랑은 할 수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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