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세 번째 증언: 촌장 에렌
마을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평생 몸에 새겨왔다. 매번 다른 의미로.
가뭄이 왔을 때는 누구의 밭에 먼저 물을 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었고,
흉년이 왔을 때는 누구에게 먼저 곡식을 나눌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었으며,
제국이 세금을 올렸을 때는 누가 얼마를 더 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매번 나는 선택했고 매번 누군가는 원망했다.
어떤 이는 내 집 앞에 와서 욕을 했고 어떤 이는 길에서 나를 외면했다.
하지만 이게 촌장의 일이었다. 정답이 없는 질문에 답을 내놓는 것.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의 무게를 혼자 짊어지는 것.
나는 열여덟에 촌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겨울 폐병으로 죽은 다음 날, 마을 사람들이 회관에 모였고 나를 바라보며
“네가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어리다고 도망치려 했으나,
그들은 “아버지도 열여덟에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오십 년, 나는 마을의 모든 선택을 짊어졌다. 얼마간은 두려웠다.
내 선택으로 누군가 굶을 수도 있다는 것이, 누군가 집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점점 두려움은 무뎌졌다. 무뎌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촌장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선택할 때에 망설이지 않는다. 다만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뿐이다.
루어스의 사절이 온 것은 수확이 끝난 직후였다.
말 두 필이 마을 입구에 나타났을 때 아이들이 먼저 보고 달려와 “루어스 사람들이 왔어요!“라고 소리쳤다.
나는 밭에서 일하다가 낫을 내려놓고 마을로 돌아왔다. 사절은 두 명이었다.
흰 외투를 입고 있었고 가슴에 제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얼굴이 깨끗했다.
밭일을 해본 적 없는 손이었다. 나는 그들을 회관으로 안내했고 종을 울려 어른들을 모았다.
회관이 가득 찼을 때 사절이 두루마리를 펼쳤다.
“제국 의회의 명령을 전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정확했다.
암송하듯 읽어 내려갔다.
“세오력 148년 겨울 전에 라켈리움 의식을 완전히 중단할 것.
이는 뮤레칸 숭배 행위로 간주되며 제국법 제3조 제5항에 위배된다.
만약 이 명령을 따르지 않을 시, 성화기사 한 소대를 파견하여 무력으로 진압할 것이다.
주동자들은 체포되어 루어스로 압송될 것이며,
마인은 제국 직할지로 편입되어 자치권은 박탈될 것이다.”
그는 두루마리를 말으며 우리를 둘러봤다.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들이 떠난 후 회관에는 무거운 침묵만 남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누군가 한숨을 쉬었다. 누군가 기침을 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은빛이 회관 벽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늙은 카엘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동안 지켜온 것을…”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순간에 버리라는 겁니까.” 그는 일흔이 넘었다. 등이 굽었고 손이 떨렸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제 할아버지도 하셨고 그의 할아버지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매년 그들을 만났습니다.
귀환제는 우리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 이단이라고 하니, 버리라는 겁니까?”
“살아야 합니다, 카엘 어르신.” 젊은 대장장이 마르켈이 말했다. 그는 서른이었다.
아내와 두 아이가 있었다. “제국과 싸워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작은 마을입니다.
성화기사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그래서 조상을 버리자는 건가?” 카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살기 위해 우리가 누구인지를 버리자는 말인가!”
“조상보다 아이들이 먼저입니다!” 마르켈도 목소리를 높였다.
“죽은 이들보다 산 이들이 먼저입니다!”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이 땅뿐일거라 생각하는가?” 카엘이 책상을 쳤다.
“전통도 물려줘야 하지 않은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지를.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아이들은 뿌리 없는 나무가 된다. 바람이 불면 쓰러질 나무가.”
“뿌리보다 목숨이 먼저입니다!” 마르켈의 아내 이레나가 끼어들었다.
“제국이 온다면, 정말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막습니까? 우리에게 군대가 있습니까?
무기가 있습니까? 성화기사와 싸울 힘이 있습니까?”
회관이 시끄러워졌다. 목소리들이 부딪쳤다. 누군가 욕을 했다. 누군가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바라봤다. 모두가 옳았다. 카엘의 말도 맞고 마르켈의의 말도 맞고 이레나의 말도 맞았다.
전통도 중요하고 생존도 중요하고 아이들도 중요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동시에 지킬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선택하면 무언가를 잃어야 했다. 선택의 무게.
나는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십시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나 곧 회관이 조용해졌다.
긴 세월 촌장을 하면서 배운 것이 있다면, 목소리의 크기가 권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봤다. 카엘의 주름진 얼굴, 마르켈의 젊은 눈빛, 이레나의 떨리는 손,
멜리사의 굳은 입술. 모두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촌장으로, 모두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내 한마디로 마을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올해는 합시다. 하죠, 귀환제를. ” 내가 말했다.
웅성거림이 일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올해 겨울에는 평소대로 귀환제를 엽니다. 우리 조상들을 맞이합시다.
하지만 내년에 대해서는, 제국이 정말 오는지 보고 나서, 그때 다시 모여서 정합니다.”
“제국이 옵니다!” 마르켈이 소리쳤다.
“귀환제를 하면 제국이 반드시 알겁니다! 그들이 성화기사를 보낼 겁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로 보았다. “하지만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마이소시아는 넓습니다. 변경의 작은 마을 하나하나를 다 감시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위협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겁주려고.”
“만약 정말 온다면요?” 이레나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가서 정합니다.” 내가 대답했다. “싸울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하지만 올해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해는, 우리 조상들과의 약속을 지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확신이 없는 말을 찾고 있었다.
“왜냐하면 만약 제국이 오지 않는데 우리가 미리 포기한다면, 우리는 평생 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국이 온다 해도, 우리가 올해 한 번이라도 지켰다면,
최소한 시도는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카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입니다.” 멜리사도 미소를 지었다.
마르쿠스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이레나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회의가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나갔다.
나는 빈 회관에 혼자 남았다.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완전히 지고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알 수 없다.
어쩌면 마르쿠스가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제국이 정말 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선택 때문에 사람들이 다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이장의 일이었다. 알 수 없어도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이 옳든 그르든 결과를 짊어지는 것. 나는 회관 문을 잠그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되었나요?” 그녀가 물었을 때
“올해는 하기로 했어.”라고 내가 대답하자,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오늘따라 밥맛이 없다.
겨울이 다가오자 마인 골짜기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정성을 들여 준비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든 것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멜리사는 매일 언덕에 올라가 라켈리움을 땄다. 새벽에 나가 해가 질 때까지 일했다.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가시에 찔리고 줄기에 **고 햇볕에 타서 피가 나고 물집이 잡혔다.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면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해요.”라고 그녀가 말했을 때
나는 “손을 다칠텐데.”라고 말했으나, 그녀는 “괜찮아요, 이 정도는.” 라며 다시 언덕으로 올라갔다.
집집마다 평소보다 긴 길을 만들었다.
이전에는 대문에서 방 안까지만 라켈리움 길을 놓았지만,
올해는 대문에서 마당을 돌아 부엌을 지나 다락까지 이어지는 길들을 만들었다.
마을 전체가 황금빛 길로 뒤덮였다.
밤에 보면 별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길들이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땅에 내려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음식을 준비했다. 돌아가신 이들이 좋아하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기억해 내며 만들었다.
어떤 이는 삼 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좋아하던 호박죽을 끓였고,
어떤 이는 십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좋아하던 꿩고기를 구웠으며,
어떤 이는 스무 해 전에 죽은 딸이 좋아하던 꿀빵을 구웠다.
악사 요한은 며칠 동안 악기를 손질했다.
현을 하나하나 갈고 목을 정밀하게 조율했다.
손가락이 피가 날 때까지 연습했다.
내가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악기를 안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흘러 현을 적시고 있었다. “요한,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며 웃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면 최고의 연주를 해야지요, 촌장님.
조상님들께 부끄럽지 않게.”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할 말이 없었다. 무어라 위로할 수 있겠는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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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성화기사가 마을에 온 것은 겨울이 시작되기 일주일 전이었다.
아침 일찍 말을 타고 왔다. 혼자였다. 젊은 여자.
흰 외투를 입고 있었고 이마에 빛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보며 수군거렸다.
루어스가 정말 우리를 주시하고 있구나.
나는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다. 초소에서 지도를 펼쳐놓고 보고 있었다.
마인 골짜기의 지도. 루어스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이었다.
“촌장 에렌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성화기사 카렌입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꽤나 훈련받은 자의 목소리.
“환영합니다.” 내가 말했다. 거짓말이었지만 예의는 지켜야 했다.
“환영받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녀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관찰하러 왔습니다.”
“무엇을 관찰하시려고요?”
“당신들이 제국의 명령을 따르는지를.”
나는 그녀를 봤다. 젊다. 스물다섯쯤 되어 보였다.
내 딸뻘이었다. 확신에 차 있었다.
눈빛이 선명했다. 세상을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나도 한때 그랬지. 열여덟에 이장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명확해 보였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의와 불의. 하지만 그녀가 알 수 있을까?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것은 회색이라는 것을.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고 모든 정의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성화기사님.” 내가 천천히 말했다. “평화롭게 지켜봐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 조상들을 기억할 뿐입니다.”
“이단은 그 자체로 해악입니다.”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단이라는 것은 누가 정합니까? 제국입니까? 신입니까?”
“신의 뜻을 제국이 전합니다.”
“그럼 제국 이전에는 어땠습니까?” 내가 물었다. “우리 조상들은 제국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멘트 시대 이후ㅡ수백 년 전부터 이 의식을 해왔습니다. 그때는 이단이 아니었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루어스가 생겨서 이단이라고 선언하면, 이제는 이단이 되는 겁니까?”
그녀는 잠시 침묵했다. 대답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법은 법입니다.”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제국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법이 옳지 않다면요?”
“법은 옳습니다. 신의 뜻을 따르니까.”
“신의 뜻을 어떻게 압니까?”
“수도원에서 배웠습니다.”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은 다릅니다.” 내가 말했다.
“내일 밤 보십시오. 직접 보시고 판단하십시오. 라켈리움 축제가 정말 이단인지, 정말 악인지.”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지도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초소를 나왔다.
뒤돌아보니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그녀도 의심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신에 찬 척하지만 사실은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귀환의 밤이 왔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멜리사의 집으로 갔다.
마당에 이미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성화기사가 와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았다. 그녀는 마당 끝에 서서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손이 외투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성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평화롭게 지켜봐 주십시오.” 그녀가 나를 봤다.
“저는 그대들을 관찰하러 왔습니다.” 조금은 불안한 목소리.
“만약 악령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이 더 빠르게 외투 안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악령은 오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다.
“우리 조상들이 올뿐입니다.”
“그게 어떻게 다릅니까?”
“보시면 압니다.”
해가 완전히 졌다. 별이 하나둘 떠올랐다. 달이 떠올랐다. 둥근달. 밝게 빛나고 있었다.
멜리사가 집에서 나왔다.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다. 모두가 조용해졌다.
그녀는 라켈리움 길 앞에 섰다.
한참을 침묵하며 길을 바라봤다. 그리고 옛 방언으로 기도를 시작했다.
“피어난 것은 시들고, 시든 것은 다시 피어나며,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끝이며,
빛은 어둠에서 나오고 어둠은 빛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흙에서 왔고 흙으로 돌아가며, 한때 함께였고 다시 함께할 것이다.”
우리 모두 따라 말했다. 나도 따라 말했다. 나는 얼마나 이 주문을 외웠을까.
처음 따라 말했을 때 나는 열여덟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직후였다. 의미를 몰랐다.
그저 할아버지가 하라고 해서 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는 순환에 대한 기도였다. 끝나는 것은 없고 시작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돌고 돈다.
삶도, 죽음도. 우리도, 조상들도. 모두 같은 순환 속에 있다.
요한이 악기를 들었다. 현에 손가락을 올렸다.
잠시 멈췄다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연주를 시작했다. 첫 음이 밤하늘로 퍼져나갔다.
그 소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사라지는 소리였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들어온 노래. 할아버지도 불렀고 그의 할아버지도 따라 불렀던 노래.
가사는 옛 방언이라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느낄 수 있다.
그리움의 노래라는 것을. 이별의 노래이자 재회의 노래라는 것을.
슬픔이 곧 기쁨이고 기쁨이 곧 슬픔이라는 노래.
나는 눈을 감고 불렀다.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자정이 되자 공기가 달라졌다. 무거워졌다가 가벼워졌다. 차가워졌다가 따뜻해졌다.
모순적이나 이보다 정확한 표현은 떠오르지 않는다. 촛불이 바람도 없는데 일제히 흔들렸다.
라켈리움 길에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미세한 떨림으로 시작한 빛이 점점 강해졌다.
물결치듯 일렁였다. 나는 성화기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입술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도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명, 두 명, 그 이상.
라켈리움 길 끝에서 형체가 잡히기 시작했다. 흐릿했다가 점점 분명해졌다. 투명했지만 분명히 여기에 있다.
빛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림자도 있었다. 그들이 천천히 걸어왔다. 각자의 길을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집으로. 형상들도 사람들을 따라갔다.
라켈리움 길 끝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내가 소년일 때 떠난 아버지. 매년 이맘때 돌아오시는 나의 아버지.
매년 볼 때마다 새로운, 라켈리움의 축복. 어떻게 형상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돌아올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여기에 계신다.
“아버지.” 형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투명한 눈.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황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이 귀환제를 금지했습니다. 내년에는 성화기사들이 올 겁니다.”
아버지가 지긋이 나를 내려보았다. 한참을. “그래서 두려운가.”
“두렵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 선택 때문에 사람들이 다칠까 봐.
멜리사가 잡혀갈까 봐. 마을이 무너질까 봐.”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전통을 지켜야 합니까? 마을을 지켜야 합니까? 둘 다 지킬 수는 없습니다.”
“나도 알 수 없다.” 아버지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 같았다. 따뜻하고 낮고 부드러운.
“네 할아버지도 알지 못하며, 그의 할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이장은 언제나 답 없는 질문 앞에 서기에.”
“...하지만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틀렸다면요? 내 선택이 틀렸다면요?”
“틀리면 틀린 것이지.” 아버지가 말했다. “선택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틀리더라도 선택하는 것이 나아.”
“사람들이 다치면 어떻게 합니까.”
“다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치지 않을 수도 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옳다고 믿는 것을 선택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압니까?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가슴이 말한다.
머리가 아니라. 머리는 두려움을 말하지만 가슴은 옳은 것을 안다.”
나는 한참을 침묵했다. “두려워서 포기한다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용기 내서 지킨다면, 설령 대가를 치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게 너가 믿는 답이라면, 그렇게 행하는게 옳다.”
“촌장의 짐이란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 아버지가 말했다. “정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없어도 선택하는 것.
그 선택을 혼자 짊어지는 것. 원망을 듣더라도, 틀렸다고 손가락질받더라도,
그래도 선택했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 것.”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농사 이야기를 했다.
올해 수확이 좋았다고. 마을 이야기를 했다. 카엘이 많이 늙었다고. 요한이 좋은 악사가 되었다고.
사소한 이야기들. 하지만 그 사소한 이야기들이 소중했다.
형상이 흐려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물었다. “내년에도 오실 수 있을까요.”
“라켈리움이 피면. 다시 피어나면.”
“제국이 막는다면...”
“그래도 누군가는 피어낼 것이야.” 형상이 미소 지었다.
“씨앗은 남는다. 언제나. 불에 타도, 짓밟혀도, 씨앗은 남는다. 그리고 다시 피어나지.”
형상이 사라졌다. 아침 안개처럼. 라켈리움이 시들기 시작했다.
황금빛이 바랬다. 꽃잎이 검게 변하며 부서졌다. 방 안 가득, 향기만이 남았다.
밖으로 나왔다. 멜리사의 마당으로 갔다. 성화기사가 거기 서 있었다.
멍한 표정이었다. 눈이 붉었다. 울었던 것 같다. 나는 그녀 옆에 섰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고서에 뭐라 쓸 겁니까.” 내가 물었다.
그녀는 시들어버린 라켈리움 길을 응시하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쓰면 되지 않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솔직할 수 없는 겁니까?”
“진실을 쓸 수도 없고 거짓을 쓸 수도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본 것은… 악령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은 악령이라고 할 겁니다.
진실을 쓰면 저는 배신자가 되고, 거짓을 쓰면 저는… 제 자신을 배신하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떠올라 골짜기를 밝히고 있었다.
“내년에 성화기사들이 온다면…”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저는 함께 오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이곳을 멸할 때 함께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고마워할 일이 아닙니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의심했을 뿐입니다.”
“의심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내가 말했다.
“확신이 무너지는 것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녀는 끝내 대답하지 않고 마인 골짜기를 떠났다.
나는 마을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올해를 지켰다.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제국이 정말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혹은 무너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겨울, 우리는 선택했다. 두려움 속에서도 선택했다.
내년이 되면 나는 다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전통을 지킬 것인가 마을을 지킬 것인가.
어쩌면 둘 다 지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둘 다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시 선택할 것이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정답을 몰라도, 마인 마을 촌장의 일이니까.
[문서 종료]
-
세오력 149년 겨울, 제국은 성화기사단을 파견하였다.
마인 골짜기는 저항하지 않았다. 언덕의 라켈리움은 모두 불탔다. 귀환제는 금지되었다.
멜리사를 포함한 일곱 명이 체포되어 루어스로 압송되었다.
촌장 에렌도 함께 끌려갔다. 그는 재판 없이 수감되었고, 석 달 후 옥사했다.
하지만 이듬해 겨울, 누군가 몰래 라켈리움을 땄다.
누군가 몰래 다시 마인 골짜기에 귀환의 길을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이 켜졌다고 한다.
씨앗은 끝내 남았다. 불에 타도, 짓밟혀도.
성화기사 카렌은 보고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수도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그녀의 행방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다만 이듬해 겨울, 마인 골짜리 근처 산속에서
흰 외투를 입은 여자가 라켈리움을 땄다는 소문이 있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