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이었을까요.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었고, 방과 후에 딱히 어딜 돌아다니지도 않아서,
친구가 시작했던 이 게임을 따라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곧 싫증이 나서 얼마 안 가 접속하지 않았지만,
저는 한동안 이 게임에 머물렀습니다.
처음엔 다니던 교회에 있던 컴퓨터로 일요일에만 접속하거나,
아니면 가끔 작은 용돈으로 교회 근처에 있던 사이버리아 PC방에서 어둠을 했습니다.
그때는 집에 컴퓨터가 없었거든요.
얼마 안 가 아빠가 어디선가 가져온 낡은 윈도 98 컴퓨터를 얻게 되었지만,
인터넷이란 걸 깔아야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리콜을 사용하는 방법보다 늦게 알았던 시절입니다.
저는 인터넷을 깐다는 표현이 무슨
집에 카펫을 깔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을 정도로 무지했습니다.
게임에서 뭔가 크게 한 것은 없습니다.
처음 접해본 온라인 게임이자 RPG 게임이었으며, 게임 그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기에 그 허접한 2써클 캐릭터로 기껏해야 우드랜드,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게 전부임에도 그게 얼마나 즐거웠던지요.
마을 이름이 붙은 옷들마다 디자인이 다른 것도 신기했고
직업과 상관없이 공용으로 입을 수 있던 수많은 의상들을 수집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외자 이름 때문인지 멋져 보여서 선택했던 칸 서버.
환상적인 모험의 세계.
게임에 접속하면 여관에서 시작된다는 점도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재밌지 않나요?
정말 판타지 세계에 들어온 그런 기분.
처음 육성한 캐릭터는 성직자, 그리고 무도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왜 성직자를 골랐는지.
아마 나중에 커서 목사를 하라던 신앙심 가득한 엄마의 말 때문이었는지.
무게 가득 이런저런 옷들을 주워 입고 어쩌다 얻은 오렌의상에 너무 행복하던 기억.
오렌네크로브를 입은 고레벨 성직자를 보고 부러워하던 기억.
ㅡ지금도 오렌 네크로브는 욘이 입을 수 있는 의상 중에 제일 좋아합니다.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고학년이 되고, 교복을 입으면서도 여전히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저는
시간이 많았기에 패키지 게임, 다른 온라인 게임들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접하게 되었고,
어둠의 전설은 그렇게 어린 날의 소꿉놀이로 가라앉았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이때의 감정에 강하게 이끌릴 때마다 게임을 다시 설치하고 접속하곤 했었지만,
잠깐일 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게임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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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긴 시간이 지나고 게임을 제대로 다시 시작하게 된 건 2020년 초.
그러니까 코로나가 막 기승을 부리던 시기입니다.
누가 누가 감염되었다는 재난 문자가 날아오고,
확진자가 다녀가면 가게 문을 닫아야 했던 그런 시기입니다.
저는 그때 가족과 일하는 사람이었는데,
가게가 너무 힘들어지고 문도 닫고 졸지에 가족에게 정리해고 당하는 비극으로 실업자가 되어,
의도치 않게 시간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딜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정신병 걸리느니 무슨 게임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넥슨 홈페이지에서 게임 목록을 보다가ㅡ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어둠을 다시 설치하게 되었네요.
한 1년을 데빌로 시작해서 길드도 만들어서 키워보고 길드 대전이란 것도 해보고,
세력 싸움이란 것도 알게 되어 어느 라인에 서보기도 하고 전쟁도 해보고 참 재미있게 즐겼습니다.
부캐 욕심도 나서 지금은 저의 페르소나가 된
욘도 백업 용도로 키워보기도 하고요.
그렇게 메타 출시와 맞물린 신나는 돈질알 성장.
어릴 때 못 해본 온갖 다양한 승급 콘텐츠, PVP에 몰입하다 보니
순수하게 게임을 즐기기보다, 이런저런 관계나 사람 때문에 지쳐서 게임을 하기 싫은.
그런 순간이 왔습니다.
어릴 때 게임을 떠난 이유와는 조금 달랐는데,
이거 이거 너무 진심으로 하다 보니 떠나는 사람들.
좋든 싫든 감정이 생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면서
이 세계에 머물기가 더 이상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렇게 1년 불태우고 또 1년을 쉬러 갔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규제가 조금 완화되어서 다시 어느 정도 일을 할 수도 있긴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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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진짜, 어둠은 떠날 수 없는 걸까요?
경팔 한 번에 엑쿠 다섯 병씩 내던 시절 기억나시죠.
2시간 퀵 사냥 한 번에 수십억.
경팔비도 지금의 2배(지금은 놀랍게도 555미만 구간 50% 할인된 상태)
기슐서? 대쉬1이 10만원. 재화 수급은 진짜 답이 없어서, 캐시도 아니고 엄돈을 유저에게 현질로만.
그것도 1억에 만 원. 세계 전체에 쥐떼처럼 창궐하던 무인 캐릭터. 사냥터라곤 시작부터 끝까지 퀵 뺑뺑이.
그렇게 생돈 박아가며 없는 돈 털어가며 치를 떨며 육성하곤
정을 뗐다고 생각한 어둠이 또 생각나는 마법. 혼돈. 그래서 어둠의 전설인 것인지.
다시 1년 만에 이번엔 순직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릴 때 처음 시작한 직업이 성직자였으니,
한 18년 만에 다시 제 길을 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흑요석 아이템이 너무 이뻐서, 딱 룩딸만 하자.
돈 쓰지 말고 목걸이 먹고, 벨트 먹고, 반지 먹고, 반지 먹었으니 반지쌍 맞추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흑요 풀셋 맞추자! 거기까지만 딱 하자!
생각한 것이 한 4년 지나보니 체마합 800이 넘는, 선두주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 어디쯤에서 여러분과 같이 달리고 있는. 그런대로 쓸 만한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시간도, 재화도 제 기준에선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부었다고 생각하지만ㅡ
정말 슬프게도 아직도 많이 많이 부족한 캐릭터입니다.
어빌이 높거나 마법을 다 배운 것도 아니고, 나겔링 장비처럼 고가 아이템이 있거나 한 것도 아니어서,
이제는 길드 대전에 참여하면 다소 민망한 제 캐릭터가 욘입니다.
나름 발록 초기에 팀을 짜서 해보기도 하고,
길드 대전도 팀을 이루어 한동안 열심히 하기도 하고 했지만서도.
신클라 출시 전후로 여러 시스템이 업데이트되고,
에테르가 등장하고 3차 승급이 나오고 지금까지 수많은 것들이 쏟아지며 제가 느낀 건,
아. 더 이상 선두그룹에 있긴 힘들다는 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강화든 새로운 어떤 시스템이든 그것 때문에 뒤처졌다는 게 아니라,
돈도 돈이지만 나이와 나의 여러 여건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이제는 이 속도에 100% 완전히 따라가기는 힘들다는 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그다음에 따라온 것은, 그렇다면.
선두에 서지 못한다고 해서 게임을 즐길 수 없는가? 어둠을 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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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육성에 지치거나 지겨울 만하면 새로운 캐릭터를 키워서 모든 일기장 퀘스트를 클리어해보기도 하고,
남녀 전직업 가장 좋아하는 마을옷을 입히려 키워본다던가.
돈이 되지 않는 잊힌 필드를 돌아다니며 여기 참 도트가 이쁘네.
이런 것도 있었네. 하며 그 어릴 때처럼 돌아다녀 보기도 하고 이것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욘 캐릭터가 그렇게 준수하진 않지만,
그래도 비격 직업군이라 쟁탈전 같은 걸 하면 그래도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어서 그건 또 나름 즐겁습니다.
긴 시간 동고동락한 길드 사람들과 함께 무엇을 얻고 잃는지.
이득, 버는 돈에 대해 조금 내려놓고 즐길 수 있는 정말 길드 대전ㅡ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콘텐츠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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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타고르 마을 전서구 집 앞에
욘을 세워두는 게 게임에서의 주요 일과입니다.
타고르는 20년 전에도,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마을인데요.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NPC들 일부는 가출하긴 했지만) 마을이
그날의 기억이 그대로 함께 묻혀 있는 시골 같아서 좋고,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 좋습니다.
타고르 연탄곡을 들으며
그냥 이 마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안이 듭니다.
이 외에도 사람 많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클릭해보고 일기장을 엿보고 사람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고요.
뤼케시온 항구 밤바다 보는 것도 너무 좋아합니다.
길드 채팅에 가끔 뻘글도 써주고(나는 안하는 강화를 종용하며)
저는 올해 25년을 이렇게 보냈습니다.
성장에 대한 욕심과 승리에 대한 열망. 경쟁심을 조금 내려놓고 게임을 하다 보니
어둠이 요즘은, 현실의 나에게 디톡스 역할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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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게임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인이 되어 어린 날 선망하던 이 공간에 소설과 수필을 적어 내려가는 것도 여즉 실감이 나지 않고,
그 어린 날의 교회와 사이버리아 PC방, 친구들도 모두 떠나갔는데. 이 게임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도 놀랍습니다.
앞으로 게임이 어떻게 변해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사실 더 이상 크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어둠이 내게 주는 분명한 감정과 힘이 있기에,
오늘도 타고르 연탄곡을 들으며 새벽을 보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보다는,
이 게임이 더 오래 남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세오 229년 2월,
마법의 눈이 내려올 타고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