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크리스마스의 전설 -
어둠의 달 이야기
피에트 마을 너도밤나무 아래에는 여름에도 녹지 않는 눈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자리를 밟지 않는다.
왜인지 이유를 묻는 이는 없고, 아이들조차 공놀이를 하다 그곳만은 비켜 던진다.
오래된 것들은 그렇게 질문을 잃은 채 남아, 사람들의 그림자보다 깊은 기억을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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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눈은 세상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던가.
그것이 단순한 말장난인지, 혹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금기와도 같은 문장인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지만,
피에트 마을의 너도밤나무 아래 남아 있는 손바닥만 한 눈더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말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봄이 와 지붕의 고드름이 부서지고, 여름의 열기가 돌바닥을 달구며
가을의 낙엽이 흙으로 돌아가도 그 작은 눈은 남아 있어,
마치 이 땅이 한 번 받아들인 무언가를 끝내 놓아주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것처럼 하얗게 숨을 내뿜는다.
사람들은 그 자리를 피해 다닌다.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어렴풋이 알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것이 한 번 깨어나면 다시 잠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능처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길고 무거웠다.
루딘왕의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돌아온 것은 소수의 사람과,
그보다 훨씬 많은 빈자리뿐이었고, 마을의 집들은 여전히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안쪽은 텅 비어,
창문마다 걸린 커튼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누군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피에트는 남부 변경의 작은 마을로, 칠십 가구 남짓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다.
대전쟁이 덮치며 열다섯 명의 남자가 떠났고, 돌아온 것은 셋뿐이었다.
이 마을의 작은 소녀 세라핀.
세라핀은 여덟 살이었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는 전쟁터 어딘가에 묻혔다.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었고 시신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루어스의 전령이 전한 것은
아버지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종이 한 장뿐이었다. 어머니는 그것을 받아든 뒤로 말을 잃어버려,
가끔 입을 열어도 한숨 혹은 미처 다 닫히지 못한 울음의 기척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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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밤나무는 세라핀의 아버지가 좋아하던 나무였다.
목수였던 그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늘 아래에서 손의 톱밥을 털어내고 세라핀을 무릎에 앉혀,
나무가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이야기와, 오래 산다는 것이 곧 많은 것을 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말을 들려주곤 했다.
“이 나무는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나기 전부터 여기 있었단다.
수많은 사람을 보았고, 수많은 계절을 겪었지. 하지만 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기억하지만 말하지 않는 거야.
그게 오래 살아온 존재의 예의란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즉 소녀의 귀를 맴돌고 있었다.
지금 나무는 가지마다 눈을 이고 서서,
마치 너무 많은 것을 보아 더 이상 고개를 숙일 수 없는 노인처럼 하늘을 향해 벌거벗은 팔을 내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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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어머니가 구석에 웅크린 채 잠든 사이 세라핀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문을 여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주변을 동요시켰으나, 어머니는 깨어나지 않았다.
요즘 소녀의 어머니는 자주 잠들었고 깨어 있는 것이 힘든 것처럼 보였다.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있어 걷기 힘든 오늘.
세라핀은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 너도밤나무로 걸어갔다.
발이 눈 속으로 빠질 때마다 차가움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고, 숨이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너도밤나무 아래 도착했을 때 세라핀은 숨을 고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깨끗한 눈이 하얗게 펼쳐져 있었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세라핀은 눈을 모으기 시작했다.
손끝이 얼어붙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작은 손으로 눈을 둥글게 말아 굴리고 또 굴려,
눈덩이가 점점 커져 세라핀의 허리까지 오고 가슴까지 왔다.
손바닥은 빨갛게 부어 있었지만, 세라핀은 멈추지 않고 두 번째 눈덩이를 만들어 첫 번째 위에 올렸다.
소녀가 감당하기엔 무거워서 팔이 떨렸고 몇 번이나 미끄러져 내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세 개의 덩이를 쌓아 올렸고, 돌멩이로 눈을 만들고 마른 나뭇가지로 입을 만들었다.
입을 조금 위로 올라가게 해서 웃는 모양이 되도록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웃을 때의 모양과 퍽 닮아 있었고,
이 닮음이 세라핀의 가슴을 찔러 아프게 했지만,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눈사람이 완성되었을 때, 이 존재는 세라핀보다 조금 더 컸고,
바람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 있었다.
세라핀은 눈사람을 안았다.
두 팔로 꼭 안고 얼굴을 그 차가운 가슴에 묻은 채로.
냉기를 감당한 소녀가 입을 열어 속삭였다. “ㅡ아버지처럼 나를 지켜줘.”
목소리는 작았다. 바람 소리보다 작았고, 눈이 내리는 소리보다 작은 미세한 속삭임.
당연하지만 돌아올 대답은 없었다. 다만 바람이 느티나무의 가지 사이를 지나가며 낮고 긴 소리를 내었다.
그것이 대답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바람의 숨결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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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기 시작하자 마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북쪽 숲에서 사냥을 하던 남자가 무언가를 봤다는 이야기였는데,
어둠보다 더 검은 것이 나무 사이를 움직이고 있었다고 했다.
나무의 그림자인 줄 알았던 물체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고.
나무는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문은 빠르게 마을로 번지곤 촌장이 종을 세차게 쳤다. 낮고 무거운 종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렸다.
이어 사람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횃불을 든 사람들도 있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불안이 어려 있었다. 촌장은 늙은 사람이었다.
전쟁 전에도 이미 충분히 늙었었는데 전쟁 후에는 더 늙어 보였다.
등이 너무 굽어서 하늘은 올려다볼 수 있는지 의심스러운 노인이었으나,
그는 여전히 마을을 이끄는 가장 총명한 사람이었다.
촌장이 종을 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아 ㅡ
오늘 밤은 한 해의 가장 긴 밤이니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밝히며 아침까지 깨어 있으라고 말했다.
“어둠이 가장 길고, 추위가 가장 깊은 밤이오. 문을 걸어 잠그시오.
아침이 올 때까지 문을 열지 마시오. 어떤 소리가 들려도, 누가 부른다 해도, 열지 마시오.”
사람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하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는 무엇.
세라핀의 집에는 횃불이 없었다.
짧은 촛불 하나가 있을 뿐이었고, 그마저도 한 뼘도 되지 않아 곧 다 타버릴 것 같았다.
어머니는 구석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떨고 있었다.
몸을 작게 웅크리고 있었고,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세라핀은 어머니 곁에 앉아 그녀의 야윈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
세라핀은 두 손으로 어머니 손을 감싸 쥐고 자기 입김을 불어넣으며 따뜻하게 해주려 했으나,
손은 쉬이 따뜻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세라핀을 보았다. 눈에 공포가 있었고, 동시에 미안함도 있었다.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다는 절망도 있었다. 세라핀은 고개를 끄덕이고 괜찮다는 듯 미소 지으려 노력했지만,
왜인지 입술이 떨려 제대로 웃을 수 없었다. 대신 어머니를 꼬옥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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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지자 별도 달도 없는 어둠이 온 마을을 덮었다.
이 침묵은 너무도 완전해서 귀가 아플 정도였다.
원래 겨울밤에는 바람 소리라도 들렸고 눈 내리는 소리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서 세라핀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박동이 너무 크게 느껴져 곁의 어머니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창문 너머 유리에는 촛불이 반사되어 떠 있었다.
촛불이 바람도 없는데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세라핀은 그것이 촛불의 움직임이 아니라 주변이 뭔가에 무겁게 눌리며 생긴 현상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불쾌함이 목을 긁었고,
어머니는 구석에서 더 작게 웅크리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문에서 소리가 났다. 나무가 휘어지는 소리.
빗장이 걸려 있었지만 문 안쪽으로 무엇인가 밀려오고 있었고,
나무 결을 따라 가느다란 금이 생겨나며 삐걱 소리를 냈다.
세라핀은 촛불 쪽으로 다가가 두 손으로 불꽃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 열기가 느껴졌지만 뜨겁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했다.
그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가슴까지 퍼지는 것 같아서 조금 덜 무서워졌다.
빗장에 금이 더 길어졌다. 조금만 더 밀리면 부러질 것 같았다.
세라핀은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제발.
그때 문의 흔들림이 멈췄다. 세라핀이 눈을 뜨고 창문 쪽을 보았을 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도밤나무 쪽이었다.
세라핀은 유리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눈사람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달도 별도 없는 이 칠흙같은 밤에 눈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눈덩이 사이사이에서 광채가 새어 나와 주변을 비추기 시작했다.
촛불만 했던 빛이 점점 커져 횃불만 해졌고, 다시 모닥불만 해졌으며,
이제는 너도밤나무 전체를 비출 만큼 밝아졌다.
빛 속에서 세라핀이 만들어준 돌멩이 눈과 나뭇가지 입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웃고 있는 그 얼굴이 아버지를 꼭 닮아 있어서, 세라핀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찬장 안의 접시들이 덜그럭거리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낡은 액자가 흔들리다 바닥에 떨어져 유리가 깨졌다.
어머니가 세라핀을 끌어안았고 세라핀도 어머니를 안았지만 여전히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빛이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 깜박였다. 눈사람이 흔들렸다. 마치 더는 서 있기 힘든 것처럼,
무게를 지탱하기 어려운 것처럼 좌우로 기울었다가 다시 일어섰다.
세라핀은 유리에 이마를 대고 속삭였다. “제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우리를 지켜줘.”
빛이 한 번 더 크게 깜박였다가 밝아진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밝았고 세라핀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방 안 구석구석을 채운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세라핀은 팔을 내렸다. 빛이 사라져 있었다.
너도밤나무가 보였고 눈이 보였으며 눈사람도 여전히 있었지만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문의 흔들림도 멈춰 있었다. 휘어진 채로 그대로 있었지만 더 이상 밀리지 않았고 빗장의 금도 그대로 있었다.
하늘에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구름이 걷히고 있었다.
달은 없었지만 지금의 미약한 별빛만으로도 살아있음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세라핀과 소녀의 어머니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둘은 서로를 안은 채 창가에 앉아 아침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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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하늘이 밝아지면서 피에트 마을에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한 뒤,
너나할거 없이 모두 너도밤나무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세라핀도 어머니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해치며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사람들을 해집고 맨 앞으로 나아갔다.
세라핀의 눈사람이 반쯤 무너져 있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몸에 구멍이 나 있었으며, 팔로 만들었던 나뭇가지가 부러져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눈사람 전체가 검게 그을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불에 탄 것처럼 말이다.
촌장이 다가와 눈사람을 살펴보았다. 이어 고개를 저으며 “그거 참 이상한 일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세라핀은 무릎을 꿇고 눈사람 앞에 앉았다. 손을 뻗어 그을려진 눈을 만져보았다.
여전히 차가운 눈. 하지만 분명 이 냉기 속에 다른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고마워.”
세라핀의 인사에 그을린 눈사람은 답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눈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라핀은 가장 어두운 밤의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혼자만의 빛으로 주변을 밝히던 그 모습을.
아버지처럼 우리를 지켜달라는 약속을, 눈사람이 알았을까.
어제 그 빛은 무엇이었을까.
세라핀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검게 그을린 눈 속에,
무언가 제 역할을 마친 것의 평온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세라핀은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서 있었다. 오래 전 루어스의 전령이 다녀간 뒤 처음,
어머니가 말을 하고 있었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로 웃고 있는 그녀.
세라핀은 일어나 어머니를 안았다. 어머니도 세라핀을 안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반쯤 녹아내린 눈 위에 서로의 체온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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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 마을 너도밤나무 아래에는 녹지 않는 눈이 있다.
눈은 기억한다.
사랑을, 밤을, 그리고 지켜진 약속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