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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메넘할머니의 신경통
9987 2026.01.29. 15:16

모든 여정이 시작되는 곳,

그리고 모든 이의 발길이 머무는 시작의 마을 노비스


그 평화로운 풍경 한구석에는 고질적인 신경통으로 신음하는 노파, 메넘이 살고 있었다.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겠다며 자처하고 나선 이는 마을의 유일한 의사 허즈 였다.

그의 의술은 가히 독보적이었고, 연구 결과는 단 한 번의 오차도 없었다.
수많은 약재를 수소문하던 허즈는 마침내 완벽한 처방을 내놓는다.
그것은 붉은 몸통을 흔들며 치명적인 마법 ‘마레노’를 구사하는 괴수,

앤트 자이언트의 몸통이었다.


평생 약탕기만을 만져온 의사에게 상급 몬스터 사냥은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결국 그는 마을을 거쳐 가는 풋내기 용사들에게 가혹한 부탁을 건넨다.



사투였다.

1써클의 용사들이 감당하기엔 앤트 자이언트의 '마레노'는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고통 그 자체였다.
고성이 유령처럼 떠도는 노비스 지하 던전 B2층. 그곳에는 용사들의 절규 섞인 비명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 속에서도 내가 손에 쥔 것은 앤트 자이언트의 붉은 몸통이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전리품을 들고 메넘 할머니를 찾았을 때, 그녀는 시골 손주를 맞이하는 할머니처럼 눈시울을 붉히며 보답을 건넸다.

2써클 용사들이 탐내는 귀한 녹옥반지 였다.



몸의 상처는 아릿했으나 곧 아물 것이고, 선의를 위한 고통은 훈장처럼 영원히 기억될 터였다.
그렇게 만족스러운 인사를 건네고 문을 나서려던 찰나, 또 다른 용사가 기세 좋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신경통을 낫게 해드리러 왔습니다!"


그의 쩌렁쩌렁한 외침은 메넘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내가 이미 해결했다고 입을 떼려는 순간, 메넘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의사 허즈와 이야기해보게나."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문 뒤에서 번뜩이는 허즈의 탐욕스러운 눈빛을.
그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금 '앤트 자이언트의 몸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깨달음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수많은 용사가 이곳을 거쳐 갔고, 수많은 앤트 자이언트의 몸통이 이 집으로 배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메넘 할머니가 약을 달여 먹는 흔적 따위는 없었다.
그 산더미 같은 몸통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허즈가 억눌린 흥분을 감추며 의연한 척 다음 희생양에게 비극을 설파하는 모습에서,
나는 이 연극의 대본을 쓴 자가 누구인지 직감했다.



이것이 정의인가 추궁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진실을 마주한다고 한들, 내가 바친 전투와 선의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것이 기만이든 이용이든, 그 순간의 내 진심만은 정답이었으리라 믿고 싶을 뿐이다.



집 밖으로 나오자 햇살은 무심하리만큼 찬란했고, 노비스는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로웠다.

오늘도 메넘 할머니의 집으로 들어서는, 저 순진하고 정의로운 용사들의 노고에 소리 없는 찬사를 보낸다.



- 이름 모를 어느 모험가의 회고록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