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좋다."
"그러게 말이다. 그나저나 우린 대학 졸업이나 할 수 있으려나."
"야, 야. 머리 아픈 소리는 집어치우고 즐거운 얘기나 좀 해봐."
갓 상경한 대학 새내기들.
낯선 타지에서 각기 다른 설렘과 두려움을 마주했던 세 사내놈은,
친해진 지 고작 일주일 만에 교정 산책에 나섰지.
쏟아지는 햇살에 등줄기가 뜨거워질 무렵,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커다란 나무 정자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나란히 등을 뉘인 채 바라본 하늘 위로, 아직 가늠조차 되지 않는 미래에 대한 대화가 한가롭게 흘러갔다.
"야, 너희는 10년 뒤에 뭐 하고 있을 것 같냐?"
"글쎄, 어디 회사라도 다니면서 돈 벌고 있지 않을까?"
"너희는 몰라도, 난 10년 뒤에 반드시 BMW 타고 여기 다시 온다. 내기할래?"
"뭐? 네가 BMW면 난 벤츠다, 임마."
"와, 차 기종까지 정해둔 거야? 기가 막히네."
동기들의 호기로운 장담을 듣던 내가 나직이 입을 뗐다.
"난... 크라이슬러 300C 탈 거야."
"크라이... 뭐? 그게 뭔데?"
"아유, 이 촌놈들. 크라이슬러를 몰라? 자, 이거 봐봐."
작은 화면 속 투박하면서도 웅장한 차체를 확인한 녀석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는 유치하지만 뜨거운 약속을 맺었다.
정확히 10년 뒤 이 자리에서, 각자의 드림카를 끌고 와 시동을 걸어둔 채 담배 한 대씩 나누어 태우기로.
타임캡슐보다도 낭만적인, 철없던 시절의 '작은 기약'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어떤 무게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그렇게 청춘의 한 페이지에 멋들어진 희망을 새겨 넣었다.
.
...
어느덧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눈앞에는 구형이 되어버린 크라이슬러 300C 한 대가 서 있다.
누적 주행 거리 19만 킬로미터.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엔진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해묵은 담뱃불을 붙였다.
"스읍.. 하.."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는 마치 그 시절의 기억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르다 이내 자취를 감췄다.
발치에 버려진 꽁초 위로 씁쓸한 회한이 내려앉았다.
여전히 시동이 걸린 채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300C
약속했던 10년이 지나고,
다시 11년이 지났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새 학기의 활기가 교정을 채울 때마다 홀로 이곳을 찾았던 발걸음이 벌써 몇 번이었는지
이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오늘은 폐차를 앞둔 나의 애마와 함께하는 마지막 드라이빙.
다시는 오지 못할 이 언덕에서 마지막 추억을 반추해 본다.
내가 다녀갔다는 유일한 흔적으로 담배꽁초 하나를 방명록처럼 남긴 채,
나는 다시 고속도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