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래전부터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거나 상처를 주는 행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느낀 점은 사람들이 나의 인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을 안 하고 삭히며 참는 것이 이기는 거라고 어디서 주워들은 개똥철학으로, 그동안 난 나를 너무 학대하며 살아왔다.
아르바이트로 들어간 우유 배달 업장에서 처음 이야기한 금액과 다른 금액을 제시한 일,
전세가 만기되기 전 미리 통보했음에도 전세금을 돌려받아야 하는 날에 계속해서 미루던 집주인,
장난을 넘어선 인신공격으로 가족까지 언급하던 전 직장의 팀장,
매일 돈 빌려달라고 연락하던 친구놈에게 5만 원만 빌려달라 했더니 그 한 번의 부탁을 핀잔으로 응수하며 거절하던 친구,
6개월간 월급에서 세금도 아닌 8~9만 원의 소액을 공제하고 주다가 걸려서 떨떠름하게 지급해주던 알바 사장님.
그 외에 정말 많은 일을 겪어보니 점점 나라는 사람은 할 말을 하고,
소신을 내뱉고, 또 어떨 때는 목소리를 높여 싸우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히 해주고 참아야 하는 네가 이걸 거절해?"라는 식의 어이없는 말을 하기도 했고,
너무 변했다며 뒤에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변해가던 나에게도 여전히 지켜야 하는 마음속 소신은 있었다.
그것은 '절대, 아무리 어떤 상황에서도, 화가 나도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말자'라는 작은 신념이었다.
그리고 3월 20일인 어제, 그 소신은 아주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되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 오전 -
매매 계약을 위해 의뢰를 맡긴 부동산에서 등기부등본이 도착했다.
꼼꼼히 읽다 보니 이것이 경매에 얽혀 있고 소유주가 여러 명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이게 뭔가 싶어 공인중개사에게 전화하니,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라고, 줄 쳐져 있으면 과거 일이니까 상관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뒤에 붙는 공인중개사의 말.
"아니, 그 나이쯤 됐는데 아직 등기부등본을 못 봐요?"
순간 벙쪘다.
물론 이 나이에 그걸 모를 수 있고 바쁜 공인중개사의 시간을 뺏은 것이 실례라면 실례겠지만, 이건 좀 무례하다 싶었다.
"아, 제가 전문가는 아니라서요."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고 답을 하니 돌아오는 답변은 이러했다.
"그건 일반인도 보는 거고요. 그냥 문제없으니까 잔금 치르는 날 잔금만 치르세요."
무시하는 어조의 말을 듣고 화가 올라왔지만, 애써 억누르고 참았다.
- 오후 -
메가커피를 손에 들고 한가로이 점심 식사 후 직장으로 복귀하는 중에 벌어진 일이다.
직장 동료의 자동차(기아 모닝) 조수석에 앉아 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동료가 끼어들기 차선에서 안전거리가 충분히 확보된 상태로 진입을 시도하자 뒷차가 그때부터 경적을 심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대략 20초간 경적을 울리면서 상향등을 연신 발사하는 뒷차.
독일 외제차였는데, 가뜩이나 운전 초보였던 동료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다.
"괜찮아요, 그냥 무시해요. 분노조절장애인가 봐."
아무렇지 않게 동료에게 이야기했지만 동료는 겁에 질려 있었고, 그런 동료의 뒤에 바짝 붙은 외제차는 경적을 멈출 생각을 안 했다.
결국 참다못해 갓길에 차를 잠시 세워보라고 하고 차에서 내리니 외제차에서 사람이 내린다.
20대쯤 돼 보이는 앳된 외모의 청년이 내렸는데, 이 날씨에 반팔 차림이었다.
문신(이레즈미)이 가득한 팔로 의기양양하게 내리다가 막상 내 앞에 서니 우물쭈물한다.
(운동을 했기에 저도 체격이 있습니다.)
그냥 더 따지지 않고 "신고할까요, 가실래요?" 하니까 간다고 말하고는 다시 차에 타고 갈 길을 간다.
다시 차에 타서 직장에 복귀했지만, 그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 저녁 -
오전, 오후에 겪은 일에서 멈췄다면 내 소신이 무너지는 일까지는 아니었을 게다.
허나 문제 상황은 어제 밤에 벌어졌다.
소맥 한 잔 말아 먹고 자려고 치킨을 시켰는데 1시간이 지나도 배달이 오질 않는다.
애플리케이션을 켜보니 계속 라이더를 찾는 중이라는 메시지만 나오고 배달이 안 오길래 가게에 전화해보니, 이미 30분 전에 라이더님이 나가셨다고 안내해 준다.
(하물며 한집 배달이었으며 치킨집과 우리 집의 거리는 도보로 4분 거리였다.)
기다리면 오겠지 생각했지만 약 10분이 더 지나고 라이더에게 전화가 왔다.
"아, 고객님. 혹시 OO아파트 1차예요?"
"네."
"아... 좀 적어주시지, 2차까지 가서 헤매고 왔네요."
"적혀 있습니다. 1차라고 적혀 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아, 제가 아파트명만 보고 갔네요. 근데 고객님도 배달이 늦으면 확인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사과만 해준다면 식어 빠진 치킨을 입에 쑤셔 넣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냥 죄송하다는 그 말 한마디만 했으면, 그의 무안함을 덮어줄 아량 따위는 충분히 있었다.
허나 그의 무례함에 결국 나 또한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냥 그거 드세요. 환불할 거니까요. 사과를 해야지 시X 뭐 하는 거야!"
"뭐? 너 뭐라 그랬냐? 뭔 발?"
뱉어놓고도 아차 싶었지만, 다시 돌릴 수는 없었다.
이미 이성의 끈이 끊어진 분노의 대상은 라이더에게 향해 있었다.
"이보세요, 더 말 섞고 싶지 않으니까 그냥 자체 처리 하세요."
"야, 끊지 마 봐! 야!"
"열 받죠? 난 지금 더 화나니까 더 할 말 있으면 집으로 오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마른안주 몇 개에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니 정말로 초인종이 울린다.
그 와중에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내려가니 삐까번쩍하게 시동이 걸려 있는 오토바이와 헬멧을 뒤집어쓴 라이더가 내게 다가온다.
"야, 너 뭐라 그랬냐?"
"계속 말 까면 똑같이 깐다?"
그 이후 대치를 하다 보니 아파트 주민들도 하나둘 나와서 바라보고, 경비 아저씨까지 오고 나니 라이더는 자리를 피하려는지 다시 오토바이 쪽으로 걸어간다.
가면서 그가 내뱉는다.
"갑질 하려 하네, 거지 새X가."
그 말에 나 또한 열이 받아서 응수했다.
"배달하러 가네, 딸배 새X가."
라이더는 날 노려보고 그대로 갈 길을 간다.
소동이 멈춘 뒤 집에 다시 올라와서 남은 술을 먹으며 생각을 해보니, 결국 난 나를 컨트롤하지 못하고 내 신념을 저버렸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몰려온다.
좋게 넘길 수 있었다.
분노를 잠재우고 그의 실수를 포용할 수 있는 문제였다.
당장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이 문제를 잠재웠어야 했다.
하루 온종일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이 나를 흑화시킨 걸까.
신념이 무너진 날 마시는 소주는 왜 이렇게도 쓸까.
술병이 다 비워지고 고통에 신음하며 잠에 빠진다.
그리고 눈을 뜬 아침,
무엇을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하며 종일 나를 되짚어본다.
정적은 나를 회개로 이끌며, 회개는 곧 사과로 이어진다.
[어제 제가 많이 무례했습니다. 언짢으셨던 기분 사과드립니다.]
이어진 문자에 돌아온 답변.
[저도 잘못한 건 맞으니까요. 좋은 하루 되세요.]
돌아온 문자에 아주 조금 희석된 어제의 소동.
이것은 신념을 저버린 내가 조금이라도 회개하는 발버둥일까.
알 수 없지만, 망가진 나를 다시 조립하며 쓰는 나의 작은 회고록.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신념은 무너지지 않았으면 하는 작은 나의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