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게임실행 및 홈페이지 이용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시인의 마을 세오
「秘」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1
681 2026.03.26. 00:01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


[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1장: 진흙과 화염의 변주곡, 아슬론(Aslon)








: 구름이 낮은 오후


마이소시아 대륙의 거대한 석조 항구, 뤼케시온.
그 정교하게 깎인 질서와 차가운 금속의 향취를 뒤로한 채 거친 파도를 넘은 지 보름만이었다.

마침내 서쪽 대륙 '노에스' 지방의 남단에 발을 디뎠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시각이 아닌 후각의 전율이었다.
이곳의 공기는 내가 나고 자란 동쪽의 소금기 섞인 칼칼한 바닷바람과는 확연히 달랐다.

습기를 잔뜩 머금어 가슴 깊숙이 들러붙는 눅눅하고도 묵직한 흙내음,
그리고 대지 아래 어딘가에서 거대한 심장이 고동치듯 밀려오는 미지근한 열기.
그것이 아슬론 마을이 이방인인 나에게 건넨 첫 번째 인사였다.

항구에서 마을로 향하는 여정은 이 자체로 거대한 생명의 서사였다.
배에서 내린 직후 마주한 아슬론 대초원은 루어스의 정돈된 평원과는 궤를 달리했다.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억센 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초록빛 파도가 되어 끝없이 밀려왔고,
그 사이사이로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강렬한 원색을 뽐내며 피어 있었다.
이 광활한 땅을 가로지르는 이틀간의 행군은 마치 태고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의식과도 같았다.

밟을 때마다 푹신하게 내려앉는 토양은 살아있는 짐승의 피부처럼 탄력이 있었고,
공중에는 생명의 순환을 증명하는 온갖 곤충들의 날갯짓 소리가 가득했다. 노에스는 진정으로 '살아있는 대륙'이었다.

그러나 아슬론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노에스 남부의 지형은 완만한 구릉과 늪지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는데, 특히 마을 근처를 흐르는
거대한 강줄기는 이방인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파수꾼 같았다. 결코 맑지 않은 강물.

타고르의 수정 같은 계곡물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인상을 찌푸릴 만큼
짙은 회색과 붉은빛이 뒤섞인 탁한 액체가 거대한 뱀처럼 느릿하게 대지를 훑으며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 끈적하고 탁한 물이야말로 아슬론 사람들의 젖줄이자, 그들이 이 척박한 땅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축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강은 죽음의 물이 아니라, 대지의 살점이 녹아 흐르는 풍요의 상징이었다.

강가에 다다르자, 진흙 속에 반쯤 몸을 담근 수십 명의 사내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채, 허리까지 차오르는 진득한 진흙 속에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길어 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동쪽 대륙의 세련된 모험가 복장을 한,
이질적인 나의 존재를 발견하자마자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그들의 눈빛에는 외부인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과 호전성이 서려 있었다.

평생을 거친 흙과 화염을 상대하며 단련된 그들의 팔뚝은 웬만한 전사들보다 굵었으며,
손에 든 진흙 채취용 도구들은 언제든 침입자의 두개골을 부술 투박한 무기로 변할 기세였다.

공기는 금세 팽팽한 긴장감으로 얼룩졌다. 나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적의가 없음을 표했지만,
그들은 한동안 짐승 같은 눈초리로 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집요하게 훑어내렸다.
아마, 사냥감을 감정하는 늑대들처럼.

"어디서 온 놈이냐? 우리 진흙을 탐내러 온 도둑인가,
아니면 이 귀한 땅의 축복을 비웃으러 온 자인가?"

가장 덩치가 크고, 온몸이 마른 진흙으로 뒤덮여 마치 토신(土神)처럼 보이는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답했다. "바다 건너 동쪽에서 온 여행자일 뿐입니다.
그저 이 위대한 대륙의 견문을 넓히고자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찰나의 정적이 흐르더니,
사내의 험악했던 얼굴 근육이 단숨에 풀리며 갑자기 해맑은 미소가 번졌다.
방금까지의 살벌한 분위기는 환상이었던 것처럼, 혹은 누군가 마법이라도 부린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행자라고? 진작 말하지 그랬나! 멀리서 오느라 배가 고프겠군.
우리 마을엔 보석이나 금은 없어도 앉을 자리는 썩어넘치니 어서 따라오게나!"

이것이 내가 경험한 아슬론 사람들의 첫 번째 특징이었다.

그들은 외부인에 대해 본능적으로 날을 세우고 이빨을 드러내지만, 상대에게 '적의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앞뒤 재지 않고 영혼까지 열어버리는, 지독하리만치 순진무구한 이들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세속적인 계산이 결여된 무모함에 가까웠으나,
동시에 거짓과 기만이 일상인 찌든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결정체 같은 청정함이기도 했다.

그들은 진흙처럼 투박했으나 그 속내는 화염을 견뎌낸 도자기처럼 맑고 단단했다.


-


: 둥근 벽과 천의 문


사내를 따라 마을 안쪽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나는 루어스와 뤼케시온에서 쌓아온 건축에 대한 모든 상식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석조의 수직적 위용과 정교한 기하학적 대칭이 미덕인 고향의 건물들과 달리,
아슬론의 가옥들은 대지가 스스로 밀어 올린 거대한 버섯이나 둥근 바위 같았다.

날카로운 모서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원통형의 흙집들이 마을 전체에 점조직처럼 흩어져 있었는데ㅡ
이는 대지의 호흡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솟아 있었다.

건축 방식 또한 기묘할 정도로 실용적이면서도 원초적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근처 산에서 가져온 낮은 돌들을 기단으로 삼아 습기를 차단하고
그 위로 강가에서 실어 온 붉고 진득한 흙을 수천 번의 손질 끝에 두껍게 발라 벽을 세웠다.
손자국이 그대로 남은 흙벽은 태양 볕에 단단히 구워져 웬만한 석재 못지않은 강도를 자랑했다.

그 위를 덮은 원뿔 모양의 지붕은 근처 늪지에서 채취한 갈대와 짚을 층층이 쌓아 올린 것이었는데,
이는 시시때때로 쏟아지는 노에스 남부의 폭우를 매끄럽게 흘려보내면서도
내부의 온기를 보존하는 완벽한 단열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를 가장 경악게 한 것은 이 마을의 구조적인 '무방비'였다.

아슬론에는 성벽이 없다. 아니,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는 그 어떤 인위적인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집집마다 경계를 나누는 담장조차 기껏해야 무릎 높이까지 나지막이 쌓은 돌무더기가 전부였고,
이는 '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니라 '여기부터는 누군가의 공간'이라는 부드러운 알림에 불과했다.

더욱 충격적인 발견은 '문'의 부재였다.

집집마다 입구에는 단단한 나무 판자나 철제 잠금장치 대신,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진
두꺼운 천 조각 하나가 펄럭이고 있을 뿐이었다.

마을 아이들이 지나가다 갈증을 느끼면 그 천을 슥 젖히고 들어가 물을 마시고,
주인 없는 빈집에 이웃이 들어가 화로의 불씨를 챙겨 나오는 모습은 마이소시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다가온 한 노인은 얼빠진 내 표정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방인 양반, 너무 촌스러운 눈으로 ** 말게나. 우리 아슬론 사람들은
대지 앞에 부끄러울 게 없으니 서로에게 숨길 것도, 굳이 남의 것을 뺏어 채울 욕심도 없다네.

입구에 걸린 이 두꺼운 천 조각이 보이나? 이건 우리 조상들이 물려준 '나파스(Nafas)' 의 상징이라네.
눅눅한 여름의 서늘한 바람은 자유로이 안팎을 드나들게 하되,
사람 사이의 뜨겁고 따스한 숨결은 결코 가두거나 가로막지 않겠다는 지혜가 담겨 있지.

도둑이라니, 동쪽에서는 그런 걸 걱정하며 사나 보군?

허허, 사방에 널린 게 이 질 좋은 진흙이고 집집마다 쌓인 게 이 무거운 도자기들뿐인데,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이 넓은 아슬론 대초원을
그 짐짝들을 짊어지고 도망갈 미련한 멍청이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나?

우리는 문을 잠그는 법을 배우기보다, 이웃의 천을 걷고 들어가 '나파스'를 나누는 법을 먼저 배웠다네."

그의 말처럼 마을 곳곳에는 주민들의 낙천적이고 개방적인 성정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천 너머로 살짝 엿본 집안 내부는 소박하지만 지독히 따스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화로가 자리 잡고 있어 집안 전체에 훈기를 불어넣었고, 벽면은 여인들이
직접 짠 화려한 직물들로 장식되어 흙벽의 단조로움을 지워내고 있었다.

그것은 집이라기보다 대지의 품속에 마련된 작은 둥지 같았다.


-


: 도공의 손과 직공의 노래


아슬론의 공기는 늘 매캐하면서도 고소한 냄새로 가득했다.
그것은 가마에서 흙이 익어가는 냄새이자, 이 마을을 지탱하는 삶의 향취였다.

아슬론은 말 그대로 '도자기의 마을'이었다.

마을의 모든 집에는 마치 신성한 제단처럼 거대한 가마가 딸려 있었고,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회색 연기는 마을 하늘을 늘 몽환적인 안개처럼 덮고 있었다.

이곳 사내들의 하루는 강가에서 길어 올린 진흙을 정제하고 이물질을 골라내는 고된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육중한 물레 앞에 앉아 보냈다. 거친 손마디가 진흙 덩어리를 어루만질 때마다
투박한 흙덩이는 매끄러운 곡선을 가진 항아리로, 혹은 유려한 목을 가진 병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 과정은 대화 한 마디 없이 정적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보는 이로 하여금
대지의 정령에게 바치는 경건한 의식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아슬론의 도자기는 세련된 문양이나 보석 장식은 없었지만,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묵직한 질감과 단단함이 일품이었다.

특히 이 지역 강가의 진흙에 섞인 특수한 광물 성분 덕분에, 가마 속에서 화염의 시련을 견뎌내고 나오면
은은한 붉은빛과 깊은 갈색이 감도는 독특한 색조를 띠었다.

사내들은 가마의 불꽃 온도를 조절하기 위해 밤을 지새우며 흙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반면, 집안이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전혀 다른 리듬의 생명이 고동치고 있었다.
아슬론의 여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베틀을 돌리며 '하늘의 색'을 잣고 있었다.

그들이 짜내는 직물은 도자기의 투박함과는 정반대로 눈이 시릴 만큼 화려하고 섬세했다.
늪지 식물과 꽃에서 추출한 천연 염료로 물들인 붉은색, 푸른색, 황금색 실들이 얽히며 복잡한 문양을 만들어냈다.
이 직물들은 아슬론 가옥의 '문'이 되어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주민들의 몸을 감싸는 유일한 의복이 되기도 했다.

베틀이 돌아가는 규칙적인 소리에 맞춰, 여인들은 일렁이는 화로의 불빛 아래에서 나지막이 입을 모았다.

가마의 불꽃이 잦아드는 밤이면 초원의 바람을 타고 흐르는 그들의 노래는,
노동요를 넘어 아슬론의 영혼을 직조하는 신성한 성가와도 같았다.


[아슬론의 노래: 흙과 실의 연가]

남자는 붉은 강가에서 대지의 뼈를 길어 올리고
여자는 구름의 끝단에서 하늘의 숨을 잣노라.

그대, 거친 손마디로 땅의 형상을 빚어 그릇을 만들라.
화염의 시련을 견뎌낸 붉은 항아리 속에
우리가 일궈낸 고단한 하루의 땀방울을 담으리.

나의 베틀은 달빛을 가로질러 은하수의 길을 내고
나의 북은 태양의 황금빛을 끌어와 대지의 등허리를 덮노라.
여자는 하늘의 색을 짜서 그대의 지친 마음을 덮고
남자는 진흙의 깊이로 우리가 돌아갈 안식처를 빚노라.

문 없는 집, 천으로 된 '나파스'가 흔들릴 때
그릇 속에 담긴 식은 죽은 정이 되어 흐르고
우리가 짠 옷감 위에 맺힌 이슬은 대지의 축복이 되리.

남자는 흙으로 돌아갈 약속을 빚고
여자는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무지개의 결을 잇나니.

아슬론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우리는 대지의 살점 위에서 노래하고
하늘의 조각 아래에서 잠들리라.


베틀의 규칙적인 북 소리와 여인들의 나지막한 합창은 아슬론의 공기를 농밀하게 채워 나갔다.
대지의 심장박동에 맞춘 거대한 공명. 그들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자신들이 물레 위에서 빚어내는 것은 찰나의 쓰임을 위한 진흙 그릇이 아니라 단단하게 굳어진 '대지의 질서'이며,
베틀 위에서 엮어내는 것은 차가운 바람을 막는 천 조각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을 잇는 운명적인 '나파스'의 숨결이라는 것을.

노래가 잦아들 무렵, 내 곁에서 은하수의 문양을 수놓던 한 여인이 바늘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건넨 짧은 미소와 흙 묻은 손끝의 온기는 아슬론의 삶 그 자체였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지나온 동쪽 대륙의 풍경을 들려주었다.

은빛 갑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는 기사들의 무용담,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마법사들의 찬란한 마탑,
그리고 금은보화가 잠든 끝을 알 수 없는 지하 던전의 기괴한 이야기들.

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그녀는 수를 놓던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녀에게 나의 회고는 고난의 기록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자리만큼이나
멀고 아득한 다른 차원의 전설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아슬론 사람들은 이토록 지독하리만치 순수했다.

바다 너머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추악한 권력 다툼이나 하루아침에 지도가 바뀌는 국경의 격변,
혹은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마왕의 위협 따위는 이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에게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는 오직 오늘 가마를 달구는 불길의 온도가 적당한지,
그리고 내일 아침 베틀에 걸릴 직물의 문양이 얼마나 대지의 축복을 닮아 아름다울지뿐이었다.

타인을 밀어내기 위해 문을 걸어 잠글 필요가 없는 그들의 세상은, 발밑의 흙이 주는
정직한 축복과 손끝의 노동이 선사하는 신성함만으로도 이미 빈틈없이 완결되어 있었다.

여인은 다시 바늘을 움직였다.

한 땀의 실이 지나간 자리에 노에스의 지평선이 새겨졌다.
나는 내일이면 이 흙의 온기를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서야 했다.

가마의 불꽃은 여전히 붉게 넘실거렸고,
밖에서는 아직 식지 않은 대지의 열기가 초원의 풀잎을 흔들고 있었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