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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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1장: 진흙과 화염의 변주곡, 아슬론 - 2
서산마루에 걸린 태양이 아슬론 평원의 끝자락을 붙잡고 마지막 기력을 다할 무렵,
나는 홀리듯 마을 외곽의 강가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외지인을 향해
짐승 같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낫과 갈고리를 움켜쥐었던 사내들은 보이지 않았다.
낮의 살벌했던 공기는 습기를 머금은 저녁 바람에 씻겨 내려갔고,
강물은 서산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기묘한 변신을 꾀하고 있었다.
어떤 물줄기인가.
황금빛 낙조가 끈적한 진흙의 붉은 빛깔과 뒤섞여 흐르는 모양새는
마치 대지의 혈관이 터져 나와 대륙의 대동맥을 타고 흐르는 장엄한 유동처럼 보였다.
이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이로, 이제는 아슬론의 내일을 짊어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사내들이 거대한 흙덩이를 파내며 비명을 지르던 진득한 진흙 구덩이에는 이제 고사리 같은 작은 손들이 파묻혀 있었다.
아이들은 강가의 찰진 흙을 뭉쳐 무언가를 빚어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서툰 손짓 하나하나에 깃든 집중력은 가마의 불길을 살피는 노련한 도공의 그것보다 훨씬 날이 서 있었다.
적막을 깨고 한 아이가 기척을 느꼈는지 흙투성이가 된 발로 달려와 내 앞에 멈춰 섰다.
아이의 뺨과 이마에는 채 마르지 않은 진흙 자국이 훈장처럼 번져 있었고, 그것이 비스듬히 비치는
노을빛을 받아 마치 고대 멘트 아리앗 전사의 핏빛 문신처럼 강렬하게 이글거렸다.
아이는 수줍어하면서도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을 내보이듯, 제 작은 손바닥 위에 놓인 뭉툭한 형체를 내밀었다.
그것은 다리가 조금 짧고 몸통이 유난히 뚱뚱한, 군데군데 어린아이의 지문이 깊게 박힌 찌그러진 개 모양의 흙인형이었다.
"이거 봐요! 내가 방금 숨을 불어넣은 거예요. 나는 나중에 커서 우리 아빠보다 훨씬 크고 뜨거운 가마를 가질 거예요.
그래서 멀리 바다 너머 사람들도 다 우리 아슬론 도자기가 아니면 밥을 못 먹게 만들 거라니까요!"
아이의 천진난만한 외침은 잔잔하게 출렁이는 강물 소리에 섞여 광활한 초원 너머로 흩어졌다.
나는 이 작고 서투른 흙인형을 내려다보며 형용할 수 없는 숙연함에 사로잡혔다.
마을의 강물은 동쪽 대륙의 수정처럼 맑은 계곡물에 길들여진 이들에게는 한 모금조차 허락하기 힘든 탁류였다.
부유물이 가득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회색빛 액체는 얼핏 죽어가는 물처럼 보였으나,
아슬론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순결하고 신성한 생명의 근원이었다.
강이 수천 년의 시간을 들여 상류에서 실어 나른 진흙은 그들의 머무는 둥근 집이 되었고,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되었으며,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탯줄이자 혈관이었다.
아슬론의 주민들은 이 진득한 진흙을 온종일 치대고, 밤새 화염 속에 가두어 철처럼 단단한 도자기를 뽑아낸다.
그리고 그것들을 삐걱거리는 거대한 수레에 실어 저 멀리 셀라임의 화려한 대도시로 보냈다.
그들은 그 투박한 그릇들을 내주고 곡물 한 줌, 소금 한 부대,
그리고 해진 옷을 가릴 천 조각 같은 최소한의 생필품을 바꿔 오며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객관적인 잣대로 보기에 그들의 삶은 결코 풍요의 범주에 들지 못하리라.
사치품은커녕 매일의 노동은 육체의 한계를 시험할 만큼 가혹했고, 대지의 작은 변덕 하나에도
생계가 통째로 흔들리는 위태로운 구조. 그러나 내가 마주한 아슬론의 얼굴들 중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거나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비관하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길을 걷던 나를 붙잡아 세우고는, 자신들의 소박한 식탁에 앉으라며
흙이 말라붙은 소매를 잡아끄는 압도적인 넉넉함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가.
그날 밤, 나는 담장조차 없는 어느 집 마당에서 아슬론의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식탁 위에 차려진 것은 거칠게 갈아 끓여낸 곡물 죽과 강에서 갓 잡아 올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민물고기 찜,
그리고 식도를 타고 내려갈 때 짜릿한 통증을 남기는 시큼한 풍미의 발효주가 전부였다.
루어스의 귀족들이 탐닉하는 화려한 향신료의 향연이나 은 식기의 정교한 아름다움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 위로 쏟아질 듯 내려앉은 밤하늘의 연주를 천장 삼아, 은은한 흙 향기가 배어 나오는
그릇에 담긴 음식을 손으로 나누는 시간은ㅡ동방의 어떤 화려한 연회보다 밀도 높은 포만감을 선사했다.
"이보게 여행자 양반, 정말 저 바다 너머 여자들은 매일 비단으로 온몸을 감싸고 사나?
그곳의 말들은 정말 발굽에 황금을 박고 달린다던데 사실인가?
황금이 그렇게 무거운데, 가련한 말들이 어떻게 펄펄 뛰어다닌단 말인가?"
그들은 전설 속 신화의 한 대목을 묻듯 엉뚱하면서도 순수한 질문들을 쉼 없이 쏟아냈다.
내가 들려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세속적인 동쪽 대륙의 이야기에, 그들은 때로는 경탄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때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이 어디 있느냐며 배꼽을 잡고 웃어젖혔다.
그들의 투명한 눈동자 속에는 세속의 탐욕이나 정치적 야욕, 혹은 타인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잔인한 경쟁심 대신,
오직 눈앞의 이방인에 대한 순박한 호기심과 고된 하루를 마친 노동자의 안도감만이 가득 차 있었다.
질문에 하나하나 답을 이어가며, 나는 이 마을이 간직한
'무지의 평화'가 발산하는 강력한 매혹에 완전히 굴복하고 말았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너무 넓은 세계를 보았기에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 불행의 늪으로 걸어 들어가는 우리네 문명 세계와 달리ㅡ
그들은 오직 손끝에 닿는 대지의 감촉과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의 열기,
그리고 이웃과 나누는 거친 웃음소리만으로도 이미 완벽하게 결말지어진 소우주를 구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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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 성운
마을의 소란스러웠던 저녁 식사가 잦아들 무렵
아슬론은 낮의 활기를 지워내고 보다 위압적이며 원초적인 생명력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집집마다 혈관처럼 얽힌 거대한 가마들이 일제히 화마를 집어삼키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선명한 핏빛 연기를 토해내기 때문이다.
낮 동안 사내들이 붉은 강줄기에서 길어 올려 정성껏 치대고 말린 질그릇들이
마침내 불의 세례를 받아 영원불멸의 물성을 얻는 장엄한 부활의 전조.
이 시기가 되면 아슬론 전역은 지면으로부터 낮게 깔리는 붉은 안개에 잠긴다.
타오르는 장작이 내뱉는 매캐한 연기와 습기를 머금은 대지의 숨결이 뒤섞여 만들어진 이 안개는
오직 이곳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지독하리만치 생경하고도 압도적인 풍경이다.
나는 마을의 중심부, 고분처럼 솟아오른 가장 거대한 가마터 앞에 멈춰 섰다.
처음, 나를 향해 짐승 같은 경계의 눈초리를 쏘아붙였던 사내들은 이제 없다. 대신ㅡ
근육질의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채 거대한 아궁이 앞에 선 그들은,
흡사 지옥의 불꽃을 길들이는 뮤레칸의 전사들처럼 보였다.
사내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붉게 달아오른 가마 속으로 끊임없이 마른 장작을 밀어 넣었고,
그들의 구리색 피부 위로 폭포처럼 흐르는 땀방울은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온의 열기에 닿기도 전에 ‘치익’ 소리를 내며 증발해 버렸다.
가마 내부의 온도는 피에트의 연금술사들이
희귀 금속을 제련할 때나 사용하는 소형 용광로를 비웃을 만큼 치솟아 있었다.
그 가공할 열기는 주변의 공기를 비틀고 왜곡시켜, 건너편에 선 가옥들의 형체를 신기루처럼 일렁이게 만들었다.
“이 화염의 깊이가 도자기의 영혼을 결정한다네.
너무 뜨거우면 제 성질을 못 이겨 깨어지고 너무 미지근하면 결국 다시 비천한 흙으로 돌아가 버리지.”
가마의 작은 구멍을 통해 내부의 창백한 불빛을 살피던 노련한 도공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충혈된 눈동자에는 일렁이는 오렌지빛 화염이 낙인처럼 깊게 박혀 있었다.
아슬론에서 가마를 때우는 것은 대지로부터 잠시 빌려온 연약한 흙의 살점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어,
시간의 풍파와 세월의 침식에도 굴하지 않는 단단한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신성한 성인식과 같았다.
불길이 절정에 달하자, 가마 안의 흙병들은 투명한 보석처럼 달아오르며 제 몸속의 불순물들을 태워 없앴고
도자기는 비로소 제 형체를 영원히 지탱할 ‘뼈’를 갖추기 시작했다.
진정으로 경이로운 것은 이 거대한 화염을 다루는 사내들의 직관적 방식이었다.
그들은 마이소시아의 정교한 기술자들처럼 모래시계를 뒤집거나
온도를 측정하는 정밀한 기구를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불꽃이 혓바닥을 휘두르는 모양새를 보며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성질을 읽어냈고,
타들어 가는 장작이 내뱉는 미세한 균열음을 통해 가마 내부의 보이지 않는 압력을 짐작했다.
“불꽃이 창백한 푸른빛을 띠며 춤을 추기 시작하면, 대지가 우리의 노고에 비로소 응답했다는 뜻이지.
그때 우리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초원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네.”
그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통제하려 들지 않았다.
아마도 불과 흙, 그리고 바람이라는 거대한 원소들과 끊임없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합의점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가마 뒤편에서는 아이들이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주황빛 불티를 쫓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여인들은 가마의 두꺼운 벽면에서 배어 나오는 열을 이용해 내일 아침 식사로 쓸 거친 빵 반죽을 노릇하게 익혔다.
아슬론에서 불은 파괴와 공포의 화신이 아님을.
불은, 흩어진 삶의 조각들을 단단하게 결속시키고
차가운 밤의 어둠을 밀어내는 가장 뜨겁고도 자애로운 대지의 손길이다.
새벽녘, 가마의 아궁이가 거대한 봉인처럼 닫히고
미친 듯이 날뛰던 열기가 대지의 심부로 서서히 잦아들 때쯤. 마을은 형언할 수 없는 고요에 침잠한다.
밤새 아슬론을 뒤덮었던 붉은 안개는 차가운 새벽 공기에 씻겨 내려가며
초원의 풀잎마다 영롱한 핏빛 이슬로 맺히고, 가마 안에서 천천히 식어가는 도자기들은
‘챙, 챙’ 하는 날카롭고도 청아한 공명을 내뱉는다.
급격한 온도의 변화 속에 흙의 입자들이 서로를 끌어당기며 내는 이 신비로운 소리를,
이곳 주민들은 도자기가 처음으로 세상을 향해 터뜨리는 ‘초생의 일성’ 혹은 ‘바라(Bara)’라고 불렀다.
나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가마의 두꺼운 흙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차갑게 식어가는 새벽의 냉기와 등 뒤에서 은근하게 전해지는 가마의 잔열이 내 몸 안에서 교차하는 묘한 감각.
뤼케시온의 차가운 돌벽 아래서는 결코 느끼질 못한 원초적인 생동감.
불꽃이 남긴 묵직한 온기는 내 낡은 옷가지와 피부 깊숙이 스며들어,
앞으로 마주할 저 가혹한 사막의 혹독한 밤을 미리 예방해 주려는 듯 오랫동안 나를 보듬어 주었다.
이 화염의 밤이 지나고 나면, 아슬론의 사내들은 다시 붉은 강가로 나가 진흙을 길어 올리는 숙명을 반복할 것이다.
그리고 여인들은 다시 베틀 앞에 앉아 어제의 꿈을 화려한 실로 잣겠지.
순환하는 대지의 리듬이 나를 일깨운다.
왜 이들이 담장을 쌓지 않는지, 왜 문을 그저 얇은 천 조각 하나로 대신하는지.
불과 흙, 그리고 서로의 땀 냄새와 뜨거운 숨결을 이토록 정직하게 공유하는 이들에게
‘나의 것’과 ‘너의 것’을 가르는 벽이란, 대지의 축복을 가로막는 무의미한 허례허식에 불과하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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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슬론을 떠나며
정적의 시간.
동쪽 대륙의 도시들이 촘촘한 법전과 숨 막히는 예법으로 서로를 옥죄며 살아갈 때,
이곳 사람들은 그저 흙을 만지고 불을 지피는 단순한 순리에 몸을 맡기고 있다.
숨길 것도, 가둘 것도 없는 땅.
마을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가마의 연기는 이들의 삶이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증거이며,
멈추지 않는 물레 소리는 대지를 향한 나지막한 고백과도 같다.
천 조각 하나가 문의 전부인 그 소박한 틈새로 건네오는 이웃의 웃음소리는ㅡ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짊어져야 했던 해묵은 경계심을 소리 없이 허물어뜨린다.
마을을 떠나기 위해 짐을 꾸리며, 처음 이곳 강가에 닿았을 때 마주했던 사내들의 서슬 퍼런 눈빛을 떠올렸다.
그때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기 바빴으나, 이제는 날이 선 태도 속에 담긴 진의를 안다.
누군가를 해치려는 음험한 악의가 아님을.
자신들의 유일한 터전인 진흙을 지키고, 화염처럼 타오르는 순수한 삶의 방식을
보존하려는 야생의 본능이었을 뿐이리라.
아슬론 사람들은 투박하게 빚어진 옹기처럼 거칠어 보이지만, 그 속내는 세상 그 누구보다 맑고 정직하다.
그들은 진흙처럼 유연하면서도, 가마 속에서 구워진 도자기처럼 단단한 신뢰를 지니고 있다.
작별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 마을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배낭 깊숙한 곳에서 고향 뤼케시온의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진주 몇 알을 꺼냈다.
별빛을 머금은 듯 은은한 빛을 내는 진주들은, 아마 이곳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귀한 물건일 것이다.
그리고 우드랜드의 숲 깊은 곳에서 채취해 정성껏 빻아온 센트리아 가루도 함께 내어주었다.
겨울철 지독한 감기조차 단숨에 가라앉히는 이 약가루는
거친 들판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선물이 되리라.
아이들은 손바닥 위에서 구르는 진주의 오묘한 빛깔에 넋을 잃었고,
센트리아 가루에서 배어 나오는 짙은 숲의 향기에 코를 씰룩거리며 환호했다.
어떤 아이는 진주를 해에 비추어 보며 신비로운 표정을 지었고, 또 다른 아이는 약가루 주머니를 소중하게 품에 안았다.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마을 어귀까지 밀려와 내 발걸음을 자꾸만 붙잡으려 했다.
그때, 어제 나를 식탁으로 이끌었던 그 거구의 사내가 가마터의 매캐한 연기를 뚫고 달려왔다.
그는 갓 구워내어 대지의 잔열이 여전히 남아있는ㅡ
아슬론에서 가장 매끄러운 붉은 물병 하나를 내 배낭 옆자리에 꽂아주었다.
아슬론의 진흙과 화염이 빚어낸 병은 투박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묘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길을 가다 갈증이 목을 조여올 때 이 병을 보게나.
아슬론의 진흙은 외부의 독한 열기를 밀어내고 물의 온도를 처음 길었을 때의 서늘함 그대로 잡아주니까.
이제부터 마주할 저 살인적인 모래바람 속에서 이놈이 자네의 목숨을 붙들어줄 제법 든든한 동료가 될 걸세."
사내의 두꺼운 손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아슬론이 이방인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뜨겁고도 정중한 배웅이었다.
나는 붉은 병의 표면을 쓸어내리며, 이 흙 속에 담긴 아슬론의 온기를 새기기로 한다.
멀어지는 아슬론의 둥근 지붕들을 뒤로하며, 나는 견문록의 첫 장을 꾹꾹 눌러쓴 필치로 마무리했다.
'아슬론, 이곳은 진흙으로 빚은 순수가 화염 속에서 단단해지는 곳이다.
문을 걸어 잠글 필요가 없는 자들의 영혼은 그 어떤 성벽보다 높고 견고하다.
그들은 대지의 살점에서 태어나 화염으로 완성되며,
결국 다시 흙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들이다.'
마을의 마지막 가옥이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출 무렵,
내 눈앞에는 다시금 아슬론 대초원의 끝없는 초록빛 바다가 펼쳐졌다.
이곳을 가로지르는 여정은 고독한 행군이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의 키를 훌쩍 넘는 억센 풀들이 바람의 결을 따라 파도치듯 일렁였고,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들은 아슬론의 붉은 강과는 달리 수정처럼 투명하게 빛나며 대지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아슬론 사람들이 어찌 그토록 지독한 순수를 고집할 수 있었을까.
이 땅은 인간의 탐욕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있다.
굳이 타인의 것을 탐하거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서로를 불신할 이유가 없는 풍요의 땅.
풍요는 동시에 가혹한 시련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한 것일까?
초원의 끝,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생명의 빛깔이 서서히 바스러지며
황금빛 모래의 장벽이 신기루처럼 일렁이고 있다.
사흘간의 초원 행군 끝에 발밑의 포근했던 흙은 어느새 서걱거리는 모래 알갱이들로 변해갔다.
대기를 가득 채웠던 풀내음은 건조하고 날카로운 열기에 잡아먹혔고,
노에스 지방의 진정한 시험대이자 모든 생명을 삼켜버릴 듯한 '침묵의 사막'이 그 거대한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고독한 횡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막의 초입에 서서 아슬론의 사내가 건네준 붉은 물병을 고쳐 매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채찍처럼 뺨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병 안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기운이 정신을 맑게 깨워주었다.
저 멀리, 모래 언덕 너머에는 대지의 세계수를 품은 성지 '노엠'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래 바다로 첫발을 내디디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아슬론의 부드러운 흙내음을 마지막으로 깊게 들이켰다.
태양은 지면을 구워버릴 듯 높이 솟아올랐고 나의 그림자는 어느새 발밑으로 바짝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오직 나 자신과 아슬론의 진흙병,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노엠의 전설만을 이정표 삼아 나아가야 한다.
모래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나는 아슬론 주민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뜨거운 대륙의 속살 안으로 더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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