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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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2장: 타오르는 모래의 요람, 노엠 - 2
: 노엠의 흙벽
노엠의 성문을 넘어선 순간, 가장 먼저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공기의 질량이다.
사막의 건조한 열기가 훅 끼쳐올 것이라는 예상은 흙벽들이 뿜어내는 냉기에 부딪혀 흩어진다.
시가지로 발을 들일수록 나를 에워싸는 것은 도시를 지탱하는 거대한 흙벽들의 서늘함이다.
아슬론의 집들이 대지의 부드러운 살점을 떼어다 둥글게 빚어낸
잔열을 한껏 머금은 옹기 같았다면, 노엠의 건축물들은 태생부터가 기이하다.
뜨거운 사막이 휘두르는 모래 채찍을 온몸으로 받아내며ㅡ
비명을 지르는 대신 제 몸을 굳혀버린 거대한 흉터에 가까웠다.
상처가 아물며 딱딱하게 박인 굳은살처럼,
노엠은 사막이라는 지독한 질병에 대항해 대지가 스스로를 요새화했다.
이곳의 흙벽은 모래바람을 차단하는 방패 따위의 시시한 명칭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노엠 사람들이 세계수를 품은 성지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가난과 고집을 한 층씩 이겨 쌓아 올린 자부심의 두께였다.
길가에 멈춰 서서 아무 민가의 벽면이나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감각이 생경하다.
머리 위에서는 정오의 태양이 지면을 구워버릴 듯 광포하게 날뛰고 있었지만,
손바닥에 닿는 벽면은 공들여 연마한 유리처럼 매끄러우면서도시린 냉기를 품고 있었다.
어떻게 흙덩이가 이토록 차가운 숨을 유지할 수 있는가.
노엠의 늙은 장인들은 이 벽을 세우기 위해 평원의 찰흙에 사막의 미세한 모래를 섞고,
거기에 가축의 피와 짚, 그리고 이름 모를 약초의 즙을 배합해 수천, 수만 번을 두드렸다고 한다.
그들이 휘두른 망치질 소리는 노엠의 역사가 되었고, 층층이 쌓인 흙의 결은 시간이 박제된 기록화가 되었다.
찰흙에 섞인 피는 태양 아래에서 부패하는 대신 산소와 결합해 벽 안쪽을 화석처럼 단단하게 결속시켰다.
태양이 내리쬐면 흙벽은 그 열기를 제 몸속 깊숙이 가두고는,
안쪽으로는 태초의 동굴에서나 느낄 법한 눅눅하고 서늘한 기운만을 내뱉었다.
노엠 사람들에게 집은 잠을 청하는 장소로 설명될 수 없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을 표시하는 단단한 문장이자, 사막의 허무에 대항해 거둔 승리 선언이리라.
벽의 두께는 건장한 성인 남성의 양팔 너비조차 우습게 뛰어넘는다.
두터운 장벽은 사막의 일교차가 빚어내는 잔혹한 물리력을 무력화하는 노엠만의 방식이다.
벽면에 귀를 대면, 흙알갱이들이 미세하게 수축하고 팽창하며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은 이 요새가 죽어있는 돌덩이가 아니라, 사막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살아있는 방어체임을 증명한다.
벽 표면에는 모래바람이 할퀴고 간 미세한 줄무늬들이 훈장처럼 가득했다.
노엠 사람들은 이 무늬를 지우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흉터의 깊이가 깊을수록 그 집의 가문이 사막에서 버텨온 세월이 깊다고 믿어 존경받는다.
또 다른 특이할 지점으로, 건물의 배치가 아주 밀착되어 있다.
노엠의 가옥들은 하늘을 향해 오만하게 솟구치기보다,
옆집의 어깨를 빌리고 뒷집의 등을 맞대며 서로에게 엉겨 붙어 있다.
이 거대한 흙의 덩어리들이 만들어낸 골목들은 개미굴처럼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한낮의 태양빛조차 바닥에 닿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어둠이 드리운 좁은 틈새 사이로ㅡ
사람들은 사막의 갈증을 닮은 낮고 빠른 목소리로 흥정하며 생의 활기를 이어갔다.
화려한 대리석이나 매끄러운 석조로 치장된 다른 도시들이 하늘을 향해 인간의 오만을 뽐낼 때,
노엠은 대지에 바짝 엎드린 채 사막의 분노가 제 머리 위를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겸손함을 택했다.
비굴한 굴복이 아니다. 돌보다 단단해진 흙벽 뒤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견고히 지켜냈고,
이 폐쇄적인 건축 양식은 노엠을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골목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묵직해진다.
흙벽 사이사이에 스며든 가축의 피 냄새와 수천 년간 쌓인 먼지 향이 뒤섞여,
도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 혹은 요람처럼 느껴졌다.
벽면의 갈라진 틈새마다 노엠의 아이들은 보물이라도 숨겨둔 듯 작은 조약돌을 박아넣었고,
여인들은 그 틈에 세계수의 잎사귀를 끼워 넣으며 가족의 안녕을 빌었다.
벽면의 각도는 예리하게 꺾여 있었는데, 이는 모래바람의 흐름을 흩뜨리기 위한 정교한 계산의 산물이다.
이 거대한 흉터들은 노엠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의 겹쌓임이다.
사막이 아무리 거세게 몰아쳐도,
흙벽들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들의 신앙인 세계수 또한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맹목적인 믿음.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아 보았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고동 소리ㅡ그것이 집안의 사람 소리인지,
아니면 대지 아래 잠든 세계수의 맥동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노엠의 흙벽은 외부의 적을 막는 장벽인 동시에,
내부의 이방인인 나에게 '너는 결코 이들의 자부심 안으로 온전히 들어올 수 없다'
며 속삭이는 거대한 거절의 몸짓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손바닥을 긁는 거친 흙의 질감이야말로 노엠의 진짜 얼굴이다.
씻어낼 수 없는 가난을 신성함으로 승화시킨 자들의 기록이었고,
뜨거운 화염 속에서 스스로를 구워낸 대지의 자존심이다.
지상의 어떤 보석보다도 단단하게 압축된 이 흙의 요새에서ㅡ나는 비로소 인간이 자연을 극복하는 방식이
자연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고통을 닮아가는 것에 있음을 깨달았다.
노엠의 흙벽은 고통의 기록이자, 사막이 결코넘을 수 없는 인간 집념의 수평선이다.
흙벽의 미로. 죽음조차 함부로 침범하지 못할 만큼, 삶에 대한 지독한 증오와 사랑이 동시에 구워진 장소.
흙먼지 날리는 소음 속에서도 벽들은 여전히 서늘한 냉기를 내뿜으며,
자신이 품은 세계수를 위해 기꺼이 사막의 흉터가 되기를 자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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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장
노엠의 진짜 몰골은 굳건한 흙벽 안쪽의 은밀한 안방이 아니라,
성채 같은 벽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노점들의 무질서한 행렬 속에 박혀 있음이 틀림없다.
이곳에서 집이란 고정된 건축물이 아니라, 매일 아침 해가 뜨면 나무 기둥을 진흙 바닥에 박아넣고
그 위로 짐승 가죽을 덮어씌워 급조해내는 일시적인 생존지에 가깝다.
번듯한 유리창이 달린 상점 같은 건 노엠에 존재하지 않았다.
골목마다 흙벽의 육중한 그림자에 기생하듯 비스듬히 세워진 썩은 나무 기둥들,
그리고 그 위로 덧대어진 누런 들소 가죽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이 천막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터널은 지친 이방인에게 안식을 주는 그늘이라기보다는,
온갖 욕망이 사막의 열기에 부패하며 내뿜는 습하고 끈적한 공기를 가둬두는 거대한 솥의 뚜껑 같았다.
본래 이 노점들은 노에스의 시민권조차 얻지 못한 하층민들이나,
사막을 건너다 지쳐 나자빠진 보부상들이 생존을 위해 바닥에 멍석을 깔면서 시작된 비천한 흔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난한 세월은 비천함을 노엠의 가장 강력한 힘으로 바꿔놓았다.
이제 이 덧없는 가판들은 도시를 지탱하는 가장 굵게 요동치는 산맥이다.
길게 늘어진 천막 아래를 걷다 보면, 코끝을 찌르는 것은 세련된 향료가 아니라
대평원에서 막 도축되어 올라온 가축의 비릿한 생고기 냄새와, 채 마르지 않은 가죽에서 풍기는 퀴퀴한 노린내였다.
"이봐, 거기 샌님! 눈 비비고 제대로 봐. 이 가죽 장화로 말할 것 같으면,
어제까지 저 아래 평원 풀밭을 짓밟던 들소 놈의 가장 질긴 엉덩이 가죽을 떼어다 만든 거야.
이걸 신고도 노엠 사막에서 발바닥이 타들어 간다면 내 목을 쳐서 개미굴에 던져도 좋아!"
상인은 내 발치에 누런 가래침을 뱉으며 억척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손톱 밑에는 가죽을 만지며 배어든 검은 기름때와 짐승의 핏자국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투박한 손으로 숭덩숭덩 썰어낸 산양유 치즈에서는 소금기와 짐승의 거친 털이 가감 없이 *혔다.
하지만 누구도 불결함을 탓하지 않았다. 이곳은 품격이나 예절이 아니라, 오직 내일의 생존을 거래하는 장소였으니까.
상인의 발치에는 평원의 가축에게서 짜낸 걸쭉하고 누런 산양유가 담긴 가죽 부대들이 놓여 있었고,
옆 노점에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고대 유적의 파편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나뒹굴고 있었다.
어떤 것은 깨진 비석의 일부였고, 어떤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톱니바퀴였다.
사막 너머 셀라임에서 건너왔다는 이질적인 향신료들은 자루째 터져 나와 매캐한 가루를 공중에 흩뿌렸고,
그것은 이방인들의 폐부로 스며들어 지독한 재채기를 유발했다.
노엠은 아무리 잘 보아 주어도 정돈된 상업 도시라고는 할 수 없다.
이곳은 생존에 필요한 온갖 잡동사니가 날 것 그대로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도살장이자 보물창고다.
노점상들의 가판대 위에는 평원의 질긴 생명력과 사막의 건조한 죽음이 뒤섞여 있었고,
그 무질서함이야말로 노엠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으로 보인다.
상인들이 내뱉는 거친 욕설과 구리 주머니가 부딪히는 쇳소리, 그리고 가죽 천막 위를 두드리는 마른 모래바람 소리.
나는 소음의 한복판에 서서, 아슬론의 질척였던 고요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지 새삼 느껴본다.
이곳에서 숨을 쉰다는 것은, 누군가의 땀 냄새와 타인의 욕망을 들이마시고 내 남은 갈증을 내뱉는 일이다.
여행자들은 이곳에서 물건만을 거래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막의 먼지를 털어내는 대가로, 금화보다 더 값진 정보를 주고받았다.
"북쪽 모래 언덕에 개미 군단이 이동하고 있다더라",
"어떤 승급자가 유적에서 기묘한 유물을 건졌다더라" 같은 소문들이 짐승의 피 냄새와 뒤섞여 공중에 떠다녔다.
시장의 끝자락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도시의 가장 높은 곳, 세계수의 사당이 내뿜는 서늘하고 신비로운 기운이
노점 거리의 후끈하고 지저분한 열기와 충돌하며기묘한 아지랑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지열은 여전했지만,
흙벽 건물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와 그 사이를 메운 천막들의 숲은 이방인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었다.
이곳은 당신의 고결한 영혼을 보존하는 성소가 아니다.
당신이 가진 가장 밑바닥의 본능을 꺼내어 사막을 건널 자격을 증명해야 하는 교역소다.
나는 짐승의 털이 섞인 짭짤한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던져넣고는,
그 거친 식감을 느끼며 노엠의 억척스러운 생명력 속으로 더 깊이 발을 들였다.
천막 아래 흐르는 것은 내일도 살아남겠다는 인간들의 지독한 집념과 타오르는 갈증이다.
무질서한 행렬을 지켜보며 내딛는 직감.
이 사막의 도시는 가장 추악한 욕망의 냄새로 가장 성스러운 생명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
흙먼지 날리는 소음 속에서도 상인들의 눈빛은 사막의 태양보다 번뜩였고,
나는 탐욕스러운 활기야말로 이 죽음의 땅에서 내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의 온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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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수의 사당
시장의 소란과 흙벽의 위압감을 뚫고 노엠의 북쪽 끝단에 다다르면,
사막의 법칙이 완전히 멈춰버린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곳에는 노엠의 모든 욕망과 생존의 집념이 최종적으로 귀결되는 장소, 대지의 세계수가 솟아있었다.
아지랑이가 이글거리는 지평선 너머에서 보았던 희미한 그림자는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무가 아닌, 대지가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ㅡ흡사 신에 다다른 듯한ㅡ인상을 준다.
사막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물건값을 흥정하던 거친 유목민들도,
가죽 장화를 팔며 목청을 높이던 상인들도 이곳에 도착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나무 주변으로는 습기를 머금은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는데ㅡ
이는 타는 듯한 모래바람에 시달리던 여행자들에게는 그 어떤 금화보다 값진 축복이었다.
사람들은 세계수의 뒤틀린 뿌리 아래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거친 껍질에 갖다 댄 채 낮은 목소리로 기도를 올린다.
사막을 무사히 건너온 것에 대한 감사, 혹은 다시 시작될 죽음의 행로에서 살아남게 해달라는 처절한 간구.
그들의 기도는 세계수의 맥동을 타고 땅속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노엠 사람들에게 세계수란 무엇일까.
이곳은 노에스 지방의 또 다른 거점인 화론과 노엠을 잇는 대지의 지맥이 지표면 위로 솟아오른 지점이다.
듣기로, 화론 마을의 인정을 받은 정당한 노에스의 신민들은 세계수의 뿌리에 깃든 힘을 빌려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는 기적을 부리기도 한다.
공간을 접어 가로지르는 경이적인 힘의 흐름 앞에서 인간의 보폭은 무력해진다.
심지어 이곳의 지맥이 머나먼 고대의 땅 '아스타로트'까지 뻗어있다는 풍문이 여행자들의 술자리에서 안주처럼 떠돌지만, 그것이 진실인지 혹은 사막의 고독이 만들어낸 허구인지는 오직 세계수만이 알 일이다.
세계수의 그늘 아래로 발을 들이면, 코끝을 맴돌던 고기 냄새와 매캐한 흙먼지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저 이카루스의 숲이 품었을 법한 짙은 나무 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노엠뿐만 아니라 서대륙 전체가 이 나무를 경외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메마른 대지 위에서 유일하게 마르지 않는 생명력을 공급하는 이 존재는,
법보다 가깝고 신보다 구체적인 구원자였다.
성문을 나서는 자들은 세계수의 잎사귀 하나를 바라보며 행운을 빌고ㅡ
성문으로 들어오는 자들은 거대한 그늘 아래 몸을 뉘으며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나는 그늘 한구석에 서서, 나무껍질 사이사이에 꽂힌 수많은 사람의 소원지들을 지켜보았다.
어떤 것은 누런 양피지에, 어떤 것은 낡은 옷감 조각에 적혀 세계수의 몸체에 박혀 있었다.
지독한 기복의 행렬. 노엠의 흙벽이 보여준 자존심과는 또 다른 형태의 집념.
인간은 흙을 쌓아 자신을 보호하지만, 결국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이 거대한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이지 않는 맥동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세계수의 사당에서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향취는 시장의 소음과 뒤섞여 신묘한 안개를 만들어냈고,
그 안개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음유시인의 노랫말에 기록된 화가의 그림과 같다.
사막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인간의 명예욕과 생존본능이 거래되던 시장통의 열기는
이곳에 이르러 경건한 침묵으로 치환된다.
나는 아슬론의 물병을 고쳐 매며, 세계수의 뿌리 아래 잠시 머물렀다.
노엠에서의 첫날밤이 다가오는 하늘 아래로 세계수의 잎사귀들이 사르르 떨리며 쇳소리 같은 울림을 냈다.
그것이 화론으로 이어지는 지맥의 요동인지, 아니면 아스타로트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대답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거대한 나무가 노엠이라는 억척스러운 요새를 지탱하는 진정한 심장이자,
사막이 삼킬 수 없는 대지의 자존심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세계수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노파의 굽은 등 너머로
노을에 물들어가는 노엠의 흙벽들을 바라보며 이 도시가 숨긴 다음 이야기가 무엇일지 가늠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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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되지 않은 역사
사막의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고꾸라지면
노엠의 흙벽들은 낮 동안 필사적으로 억눌렀던 냉기를 뱉어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노점 거리의 풍경은 생존을 위한 장터에서,
대륙의 모든 비밀이 모닥불 곁으로 모여드는 거대한 도서관으로 탈바꿈한다.
상인들은 짐승의 굳기름을 섞어 만든 투박한 횃불을 밝히고ㅡ
일렁이는 불빛 아래로 한기를 피하려는 이방인들이 서로의 어깨를 맞댄 채 밀집한다.
흙벽 사이로 스며드는 밤바람이 제법 날카롭지만, 사람들은 서로의 땀 냄새와
눅눅한 체온이 뒤섞인 조밀한 온기 속에서 묘한 동질감을 얻었다.
노엠은 물건이 오가는 길목이라기보다ㅡ노에스 지방 전체의 생동하는 소식부터
바다 너머 이름 모를 지방의 은밀한 추문까지, 온갖 입김이 모여 끓어오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의 현장이다.
나는 기름때 절은 노점 가판대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질긴 평원 가축의 힘줄이 그대로 *히는 고기찜을 우물거리며 주변의 소음 속으로 귀를 기울였다.
내 옆자리에는 사막의 모래가 수염에 하얗게 내려앉은 노회한 보부상들과
아직 살생의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용병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이 뱉어내는 말들이 정돈된 활자라고는 할 수 없다.
탐욕과 공포, 그리고 삶에 대한 집착이 뒤섞인 날 것 그대로의 조각들.
"엔도르 유적 북쪽 입구 쪽 지반이 내려앉았대. 모험가 셋이 들어갔는데,
나온 건 부러진 칼날 하나뿐이라더군. 제국이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야."
"파노 국경 쪽은 더 난리야. 뤼케시온에서 넘어온 상인들 말로는,
거기서 새로운 승급자가 탄생했는데 그 힘이 지맥을 뒤흔들 정도라더군. 이제 대륙의 서열이 한 번 더 뒤집힐 판이야."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튀어 오를 때마다 사람들의 그림자가 흙벽 위에서 기괴한 거인처럼 춤을 췄고,
그림자들 사이로 누군가의 몰락이나 새로운 영웅의 탄생 같은 이야기들이 안주처럼 먹혔다.
아슬론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흙 구덩이 너머의 세계를 유령처럼 여기며 평화로운 무지 속에 살고 있었다면,
노엠 사람들은 세상 모든 비극과 희극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그것에 합당한 가치를 매기고 있었다.
그들에게 정보는 금화보다 확실한 생존의 도구였다.
그들은 정보를 팔아 길을 열고, 타인의 경험을 사서 죽음을 피했다.
이 교환의 현장이야말로 사막이 삼킬 수 없는 인간의 영리함이다.
노엠에서의 밤, 나는 흙벽 가옥의 비좁고 서늘한 바닥에 몸을 뉘었다.
천장의 서까래 사이로 고운 모래 먼지가 조금씩 떨어졌지만,
등 뒤에서 전해지는 흙의 냉기가 오히려 들뜬 정신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벽 너머에서는 여전히 취한 상인들의 거친 농담과 주머니 속 구리 동전이 부딪히는 쇳소리가 들려왔고,
멀리 세계수의 사당 쪽에서는 밤새 지맥을 달래는 사제들의 낮은 영창이 유령의 울음처럼 흘러들었다.
소리들은 노엠이 지닌 두 가지 얼굴ㅡ지독한 현실의 탐욕과 숭고한 대지의 신앙ㅡ
이 결코 떼어낼 수 없는 한 몸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노엠은 매끄러운 미학을 자랑하는 도시는 아니다.
사막이라는 거대한 침묵에 맞서 가장 치열하게 목소리를 내는 자들의 성채다.
투박한 흙벽은 대지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흉터가 되기를 자처한 이들의 자부심이며
그 거친 표면 아래로는 세계수의 뿌리가 내뿜는 강인한 생명력이 흐르고 있다.
나는 배낭 옆자리에 꽂힌 아슬론의 물병을 만지작거렸다.
부드러운 진흙 마을에서 가져온 온기와, 이 견고한 사막 도시의 냉기가 손끝에서 어우러지며 다음 여정을 재촉했다.
내일의 태양은 다시 이 흙의 요새를 뜨겁게 구워낼 것이고
노점상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죽음보다 질긴 삶의 조각들을 가판대 위에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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