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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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3장: 은둔의 낙원, 화론 - 2
: 화론의 사당
마을의 가장 동쪽, 벨테인 활산의 거친 숨결이 내려다보이는 벼랑 끝에는
화론의 모든 침묵이 집결하는 장소인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마을의 다른 구역보다 한층 더 서늘하다.
지표면의 열기는 이곳에 이르러 차갑게 굴절되었고,
공기는 수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흐트러진 적 없는 고요를 박제해 놓은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사당의 외관은 화려한 단청이나 장식 대신,
세월에 검게 절은 거대한 목조 기둥들과 날카롭게 휘어 올라간 붉은 기와지붕만으로 위엄을 뿜어냈다.
입구를 지키는 사제들의 눈빛은 파수꾼들의 칼날보다 더 예리하게 이방인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들의 무언의 허락을 얻어 사당 내부로 발을 들였다.
순간,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기이한 감각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소리라기보다 거대한 생명체의 박동에 가까운, 묵직하고도 일정한 진동.
... 분명 노엠에서 느꼈던 그것.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흘러나온다.
노엠의 척박한 흙먼지 속, 세계수의 거대한 뿌리 아래 부츠를 타고 올라오던
육중한 맥동이 화론의 가장 깊숙한 성소에서 다시금 몸을 뒤흔들고 있다.
노에스 지방의 그 메마른 대지를 적시던 힘의 근원이,
사막과 화산암 지대라는 가혹한 거리를 비웃으며 이곳 알세이드스의 심장부까지 뻗어 와 있었던 것이다.
사당 중앙, 검은 옻칠을 한 정갈한 목조 제단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의 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연마된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ㅡ
깊은 어둠 속으로 푸르스름한 빛줄기들이 실핏줄처럼 얽혀 흐르는 것이 보였다.
아마 그것이 바로 화론의 사람들이 경배해 마지않는 '대지의 지맥'이리라.
노엠의 세계수가 지상으로 뻗어 올린 생명의 줄기라면, 이곳의 사당은
그 줄기가 땅속 깊은 곳을 타고 흘러와 다시 한번 숨을 고르는 거대한 마디였다.
화론의 사제들은 이 거대한 힘의 흐름을 '대지의 자비'라 칭하며 숭상했다.
표면의 대지가 화산의 불길에 고통받을지언정,
그 심부만큼은 만물의 근원인 세계수의 평온한 박동을 간직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기이한 비술의 정체도 이곳에서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화론의 가혹한 시험을 견뎌내고 그들의 신민으로 인정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특권,
즉 공간의 물리적 거리를 단숨에 지워버리는 이동의 마법 말이다.
그것은 마법사들이 구사하는 차원 이동과는 궤를 달리한다.
대지의 지맥이라는 거대한 흐름에 자신의 마력을 동기화하여, 나무의 뿌리를 타고
영양분이 흐르듯 대륙의 신경망을 가로지르는 일종의 '동화'라고 할까.
화론의 신민들은 이 사당의 지맥을 통해 노엠의 세계수 곁으로 순식간에 몸을 옮길 수 있다.
수십 일간 사막과 화산재를 뒤집어쓰며 걸어온 나의 여정을
단 한 번의 눈깜빡임으로 되돌릴 수 있는 권능 앞에서, 나는 인간의 보폭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통감했다.
심지어 이 지맥의 맥동은 서쪽의 끝, 공포와 신비가 공존한다는 아스타로트와 고대 이카루스의 유적까지도
실핏줄처럼 뻗어있다는 풍문이 노엠에서 그랬듯 사당의 사제들 사이에서도 은밀하게 떠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감히 누구도 확인하지 못한 신화의 영역에 불과했으나,
이곳에서 느껴지는 맥동의 기세로 보건대 결코 빈말이 아닐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사당의 차가운 바닥에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냉기는 벨테인 화산의 열기를 단숨에 잊게 만들 만큼 시리고도 정갈하다.
순간, 배낭 옆에 매달린 아슬론의 물병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남부의 눅눅한 진흙으로 빚어진 투박한 병 속의 냉기가 지맥의 거대한 진동과 공명하며 낮은 울림을 내뱉었다.
아슬론의 흙과 노엠의 먼지, 그리고 이곳 화론의 화염이 지맥이라는 하나의 맥락 안에 뒤섞인다.
나는 눈을 감아 이 고동에 정신을 맡겼다.
대지가 이방인인 나에게 내뱉는 훈계, 동시에 자신의 품 안으로 조금 더 깊이 들어오라는 유혹.
이 성소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화론 사람들의 지독한 배타성도,
사막의 살벌한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태초부터 이어져 온 거대한 생명의 리듬만이 존재할 뿐.
사당 구석에서 타오르는 침향의 연기가 지맥의 푸른 빛과 어우러져 기묘한 문양을 허공에 그린다.
빛의 흐름.
내가 지나온 길들이 결코 단절된 조각들이 아니었음을.
아슬론의 옹기 굽는 연기부터 노엠의 흙벽을 치는 망치 소리,
그리고 이곳 화론의 기와를 스치는 화산재의 소리까지, 이 모든 것은 대지의 심장이 내뱉는 거대한 화음의 일부.
나는 사당의 바닥에서 손을 떼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지맥의 진동은 여전히 발목을 잡고 늘어졌지만, 그 울림은 이제 공포가 아닌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당장 조급한 마음으로 저 음산한 흉가의 문을 두드려 인정을 구걸하기엔,
내 영혼에 묻은 사막의 모래바람과 노엠의 셈법이 아직 너무 무겁고 거칠다.
인정을 서두르기보다 이 고결한 맥동을 가슴 속에
온전히 갈무리하는 법을 먼저 익히는 것이ㅡ화론이 내게 준 첫 번째 예법임을 직감했다.
언젠가 이 지맥의 흐름과 내 호흡이 완벽한 화음을 이루는 날,
나는 비로소 이방인의 껍질을 벗고 이 붉은 기와의 물결 속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사당을 나서는 내 등 뒤로 사제들의 낮은 영창 소리가 산맥의 메아리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내일의 태양이 알세이드스의 지평선을 달구기 전,
대지의 가장 깊숙한 영혼에 한 걸음 더 다가섰음을 확신하며 성소의 무거운 침묵을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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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화
사당의 거대한 제단 아래서 몸을 떨게 하던 대지의 박동을 뒤로하고 돌계단을 내려왔을 때,
마을을 감싸고 있는 공기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농도로 나를 짓눌렀다.
지맥의 거대한 흐름이 지상으로 분출되지 못한 채, 화론이라는 공간에 켜켜이 쌓여 박제된 듯한 기묘한 중량감.
길가에 늘어선 주민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사당의 그 육중한 진동이 세밀한 파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화론!
지맥의 박동에 맞춰 자신의 자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깎아내고 다듬은 이들이 모여 이룩한,
거대하고 정교한 영혼의 수행처.
가장 먼저 내 시선을 붙든 것은 붉은 기와 담장 아래 피어난 연화 나무를 매만지는 한 노인의 손길이다.
그는 화산재를 뒤집어쓴 꽃잎을 함부로 털어내거나 닦지 않았다.
대신 가느다란 손가락을 꽃잎 근처에 멈춘 채, 대지의 떨림이 나무의 맥맥한 줄기를 타고 올라와
꽃대에 전해지는 그 찰나의 순간을 인내하며 기다렸다.
지맥의 박동과 꽃의 떨림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는 그제야 비로소 손을 뻗어 재를 걷어냈다.
내가 알던 '돌봄'이라는 가벼운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행위.
이곳에서 '인(仁)'이란 타인을 향한 가냘픈 연민이나 베풂이 아니다.
그것은 만물이 지맥에서 부여받은 각자의 제자리를 지키도록 돕고,
존재가 가진 본연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 지독하리만치 엄격한 질서의 옹호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 시든 풀잎 한 줄기조차 지맥의 흐름 속에서
마땅히 겪어야 할 인과가 있음을 믿기에, 이들은 함부로 자연의 순리에 손을 대어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만물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본연의 '결'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곁을 지키며 지켜봐야 할 경외의 대상이다.
그 숭고한 방관과 절제를 육신으로 실천하는 방식이 바로 '예(禮)'.
화론의 길목에서 마주치는 이들은
서로의 영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기가 막히게 감지하고 있다.
두 사람이 좁은 골목에서 마주칠 때, 그들은 성급히 비켜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서로의 호흡이
지맥의 박동과 어우러져 평온을 되찾는 순간을 기다린 뒤, 비로소 길을 내어주었다.
상체를 굽히는 각도는 상대의 기운을 억누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지점에서 멈췄고,
그 찰나의 시선 교환 속에는 수천 가지의 말이 압축되어 있었다.
사회적 굴복이나 형식이 아니다. 내면에서 타오르는 각자의 불꽃이 타인의 평온을 그을리지 않도록 배려하는,
화론인들만의 고결한 영적 완충이다. 이들이 두른 여러 겹의 비단 옷 또한
자신의 감정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가두는 단단한 둑과 같다.
옷자락이 돌바닥에 쓸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그 정갈하고 소리 없는 보행법은,
대지를 밟는 행위조차 하나의 제의로 여기는 그들의 결벽증적인 자부심의 발현이다.
찻집 안 풍경은 방랑의 상식을 더욱 깊게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차를 따르는 여인의 손목 곡선은 벨테인 활산의 능선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유려했고,
찻잔 속에 고인 액체는 지맥의 박동만을 정직하게 투영하며 단 한 방울의 물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손님에게 차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손님 또한 소리 내어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다.
오직 찻물 떨어지는 가느다란 소리와 그 소리가 지맥의 울림과 맞물려 만들어내는 미세한 공명만이 찻방의 공기를 채운다.
이것이 화론을 지탱하는 진정한 뼈대인 '율(律)'이다.
국가의 법령이나 군주의 명령보다 앞서는, 자신의 맥박을 벨테인의 화기와 동기화하고
호흡의 간격을 연화 꽃잎의 낙하 속도에 맞추는 철저한 내면의 통제력.
이 율법을 어기고 목소리를 높이거나 감정의 파고를 통제하지 못하는 자는, 그 즉시
화론이라는 정교한 합주에서 불협화음을 내는 부끄러운 존재로 전락하여 영구히 추방당하게 된다.
노엠의 촌장이 이곳을 '결벽증적인 전통의 환상'이라 평했던 것은
실상 부러움 섞인 무지의 고백에 가까웠을 터다.
흙먼지 날리는 노엠의 시장통에서 상인들은 물건의 무게와 금화의 가치를 재며 생존을 도모했지만,
화론 사람들은 그 물건 속에 깃든 '마음의 층위'와 '기다림의 시간'을 읽어내며 영혼의 품격을 도모한다.
그들은 백 마디의 화려한 웅변보다 단 한 번의 깊은 침묵이 대지의 진실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만 송이의 연화 꽃잎이 지는 화려한 장관보다,
단 한 송이의 꽃이 지맥의 허락을 얻어 대지로 돌아가는 고요하고 필연적인 찰나의 질서를 보다 중히 여긴다.
나는 이들의 틈바구니를 걸으며 배낭에서 나는 가죽 부딪히는 소리ㅡ
내 낡은 부츠가 돌바닥을 긁는 거친 소음이 이 정교한 정적을 헤치고 있다는 사실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화론의 주민들은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삶의 궤적이 내가 알던 거칠고 날 것 그대로의 세계관과
어떠한 접점도 찾지 못한 채 빗겨 가고 있을 뿐이었다.
파수꾼이 나를 응시하며 고개를 천천히 돌릴 때,
그의 눈동자에는 지맥의 푸른 빛과 벨테인의 화광이 동시에 일렁이며 내 영혼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최대한 발등에 힘을 주어 소리를 죽이며 금화장으로 향했다.
화론의 생태는 지독하게 고립되어 있었으나, 이 고립이야말로 벨테인의 광포한 분노 속에서
자신들의 정신을 맑게 보존하는 견고한 방패였으리라.
지맥의 박동은 이제 내 발바닥을 넘어 심장까지 올라와 있다.
나는 이 낯선 낙원의 율법 속으로, 그들이 지어 올린 침묵의 성소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밀어 넣었다.
화론의 밤.
이방인의 영혼을 정제하려 달려드는 거대한 불꽃의 숨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화론에서 보낸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인간이 대지에 순응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경이로움이다.
노엠이 대지를 이용해 부를 일구었다면, 화론은 대지의 고동에 맞춰 자신들의 영혼을 조율하고 있다.
그 조율의 과정이 타인에게는 배타적이고 차갑게 보일지 모르나,
그것은 자신들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한 필사의 예의였음을 나는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었다.
벨테인의 붉은 하늘 아래, 화론의 기와는 오늘도 대지의 숨결을 머금은 채 소리 없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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