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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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3장: 은둔의 낙원, 화론 - 3
: 금화장
화론의 심장부, 기와지붕의 붉은 파도가 가장 높게 굽이치는 정점에 금화장이 서 있다.
가옥이라기보다, 벨테인 화산이 뱉어낸 열기를 목재의 형상으로 박제해 놓은 거대한 무엇.
화산의 화기를 머금고 자란 검붉은 나무들을 수십 번 옻칠하여 세운 기둥들은
마치 굳어버린 대지의 핏줄처럼 음산하면서도 고결한 광택을 내뿜고 있다.
이곳은 화론을 찾은 이방인이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허락된 공간이자,
동시에 마을의 모든 질서가 시작되고 끝나는 촌장의 집무실이다.
처마 밑에는 사람 머리통만 한 붉은 등불들이 끝없이 걸려 있었는데, 화산재 섞인 밤바람에
일렁이는 그 빛들은 이곳이 나그네를 위한 안식처가 아닌ㅡ
외지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붉은 눈의 감옥임을 웅변했다.
육중한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노엠의 소란스러운 먼지바람이 아득한 전생의 기억처럼 느껴지는 기분에 압도되었다.
바닥은 거울처럼 매끄럽게 닦인 짙은 색 목재로 덮여 있어, 내 해진 부츠가 남기는 미세한 마찰음조차
사당의 종소리처럼 복도 끝까지 울려 퍼졌다. 복도는 길고 깊었으며, 양옆을 가로막은 종이 문 너머에서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직감했다.
저 얇은 창호지 한 장 너머에서
수십 개의 시선이 내 호흡의 주기와 발걸음의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하고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방을 배정받는다는 것은 잠자리를 얻는 행위가 아님을.
금화장의 가장 깊은 곳, 침향의 묵직한 향기가 고여있는 방에서 나는 마침내 화론의 촌장과 대면했다.
그는 노엠의 촌장처럼 장부를 뒤적이며 금화의 무게를 가늠하거나,
은근한 수사로 뒷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탁자 위에는 뇌물로 바칠 금화 주머니가 놓일 자리조차 없었다.
그는 단지 정좌한 채로, 내가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기까지의 모든 곡선을 꿰뚫어 보듯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벨테인의 화구 아래 가라앉은 차가운 암석 같았다.
그는 내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지, 낯선 향에 내 동공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내 심장박동이 사당에서 느꼈던 지맥의 진동과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노엠에서의 흥정이 '지갑의 두께'를 겨루는 세속적인 싸움이었다면, 이곳에서의 대면은
'영혼의 격'을 맞추는 고결하면서도 숨 막히는 심판이다.
침묵이 방 안의 향 연기처럼 자욱하게 깔렸을 무렵, 촌장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위엄 있게 깔려 지맥의 울림과 공명했다.
"화론의 주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이 붉은 기와 아래 몸을 뉘는 일이 아니네.
그것은 자네가 가진 그 나약하고 습한 이방인의 습성을 버리고, 이곳의 불꽃과 함께 스스로를 태워
고결한 정수로 다시 태어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앞에 놓인 빈 찻잔을 응시했다.
그 너머에는 내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수백 년간 쌓아 올린 은둔의 선이 단호하게 그어져 있었다.
"불꽃은 부정한 것을 태워 정화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에겐 그저 고통스러운 소멸일 뿐이네.
자네가 만약 그저 구경꾼으로 이곳에 머물고자 한다면, 금화장의 이 붉은 등불들은
자네를 따뜻하게 비추는 대신 자네의 모든 허물을 낱낱이 파헤치는 감옥의 창살이 될 걸세."
그의 목소리에는 이방인이 결코 넘을 수 없는 선을 긋는 냉정함이 서려 있었다.
배정받아 들어온 객실은 매우 단촐했다.
가구라고는 무릎 높이의 작은 탁자와 얇은 요 한 채가 전부였다.
벽면에 걸린 붉은 등 하나가 방 안을 피처럼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창밖으로 보이는 벨테인의 화광은 밤하늘을 붉게 태우고 있었다.
나는 그 서늘한 방 한가운데 앉아, 노엠의 촌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곳에선 금화보다 예법을 따질 것이라던 그 능청스러운 조언은 사실이었다.
금화장의 화려한 붉은 목재들은 나를 환대하는 장식이 아니라,
내 일거수일투족을 옥죄는 거대한 격식의 틀이었다.
천장에서는 연화 꽃잎의 향기와 지맥의 묵직한 진동이 섞여 내려왔다.
이 붉은 등불의 감옥에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이방인의 흔적을 지워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한다면, 내일 아침 나는 화론의 주민이 되는 대신
벨테인의 화산재가 되어 이 붉은 기와 위로 흩뿌려질지도 모른다.
나는 배낭 옆의 물병을 만지작거리며,
화론이 내미는 이 가혹한 '정화의 예법' 속으로 천천히 침잠해 들어갔다.
화론의 밤은 벨테인의 불길보다 차갑고, 화론의 응시는 사막의 태양보다 따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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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행
화론의 한복판, 기와지붕의 곡선 아래 둥지를 튼 메데니아 뱅크는
내가 루어스의 번화가에서 목격했던 화려하고 오만한 석조 건축물들과는 결을 달리했다.
루어스의 은행들이 거대한 대리석 기둥을 앞세워 대륙의 모든 부를 집어삼키려는 탐욕스러운 포식자의 성채 같았다면,
이곳은 수천 년간 지열을 견뎌내며 검게 그을린 화산동 나무로 지어져 정갈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가슴을 찌르는 것은 금전의 비린내가 아니라,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농밀하게 배어든 침향과 오래된 목재의 탄내였다.
이곳은 재화가 오가는 시장의 연장선이라기보다 화폐라는 이름의 새로운 종교를 숭배하는 성소와도 같다.
창구 너머에 정좌하고 앉은 은행원은 여행자의 해진 옷차림이나 배낭의 무게 따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내가 노엠에서부터 목숨처럼 갈무리해 온 마이소시아 골드 주머니를 탁자 위에 조용히 내려놓자,
그의 눈썹 끝이 아주 미세하게, 마치 불결한 오물을 목격한 듯 경련했다.
그들에게 대륙 공용 화폐인 골드는 만물의 가치를 매기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화론의 순수한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막의 흙먼지와 이방인의 땀 냄새가 뒤섞인 ‘천박한 쇳덩이’에 불과하다.
은행원은 비단으로 감싼 집게를 들어 내 금화 한 닢을 집어 올리더니,
마치 역병이 옮을까 두려워하는 의사처럼 신중하고도 불쾌한 표정으로 금화의 앞뒷면을 훑었다.
"이곳의 가치는 오직 이곳의 언어로만 증명됩니다.
밖에서 가져온 이 소란스러운 쇠붙이들은 화론의 문턱을 넘는 순간 그 힘을 잃지요."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으며, 거기에는 수백 년간 외부 문명과 선을 긋고 살아온 자들만의
독한 선민의식이 서려 있었다. 그는 골드를 화론의 전용 화폐로 바꾸어주면서도
오염된 물건을 정화하는 의식을 치르듯 수건으로 가판대를 닦아냈다.
그 노골적인 혐오감 앞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내 손바닥에 떨어진 화론의 화폐ㅡ불꽃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차가운 옥빛 주화들은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위압감을 전달했다. 이 주화를 손에 쥐는 순간,
나는 비로소 대륙을 유랑하던 자유로운 방랑자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했음을 깨달았다.
환전. 마이소시아 대륙이 공유하던 보편적인 상식을 폐기하고,
화론이라는 은둔의 제국이 설계한 폐쇄적인 질서에 스스로 투항하는 첫 번째 굴욕이자 의식.
이제 나는 이 옥빛 주화 없이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으며,
이들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서는 단 한 치의 비단도 몸에 걸칠 수 없다.
노엠의 촌장이 했던 "그곳에선 금화보다 예법을 따질 것"이라던 조언은
이곳 메데니아 뱅크의 창구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금화를 버리고 옥색 주화를 챙겨 넣는 내 손길은 낯선 신에게 귀의하는 신도의 그것처럼 조심스럽고도 비굴하다.
은행의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산판 두드리는 소리는 지맥의 고동처럼 고막을 두드린다.
이곳 사람들은 이 고립된 경제 체제를 통해 자신들의 자부심을 지탱하고 있다.
외부의 금력이 화론의 정신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세워둔 이 무형의 성벽은,
벨테인 화산의 용암보다 더 뜨겁게 이방인의 자아를 녹여내고 있다.
나는 환전된 주머니를 가슴 깊숙이 갈무리하며 이 옥색 주화가 약속하는 것은 안락한 여정이 아니라
이 기괴하고 아름다운 감옥 속으로의 더 깊은 침잠임을 직감했다.
세오 112년, 대륙의 통용되는 모든 가치가 부정당하는
이 작은 창구 앞에서 나는 내가 알던 세계의 종말을 보았다.
이제 나는 화론이 허락한 만큼만 존재하고,
그들이 정한 가치만큼만 숨 쉴 수 있는 가련한 포로가 되어 다시 붉은 기와의 미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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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복
은행을 뒤로하고 화론의 돌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공기의 질감이 다시 한번 변모하는 지점에 이른다.
마을의 의복을 책임지는 천의방에 들어섰을 때,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벽면을 따라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비단의 향연이다.
그 천들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미세한 바람에도 파들거렸고, 빛이 닿는 각도에 따라
알세이드스의 타오르는 노을빛을 머금었다가도 찰나의 순간 심해의 서늘한 푸른 빛으로 자취를 감췄다.
손끝으로 비단의 표면을 스치려 하자, 가늘고 예리한 목소리가 내 손등을 쳤다. "무례하군."
고개를 들어보니 비단 뭉치 뒤로 정좌한 노파가 나를 벌레 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화론의 그 어떤 파수꾼보다 엄격했다.
이곳에서 옷이란 추위를 막거나 몸을 가리는 천 조각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착용자가 닦아온 삶의 궤적, 즉 '격'을 세상에 공표하는 성적표에 가깝다.
화론의 예법을 익히지 못한 자,
혹은 이 마을의 질서에 투항하지 않은 이방인은 천의방의 비단을 만질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노파는 내 해진 여행복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영혼의 매무새가 흐트러진 자에게 이 비단은 한갓 거친 삼베보다 무거울 것이야."
옷을 입는 행위조차 수행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그들의 결벽이,
흘러내리는 비단의 곡선 속에 날카롭게 박혀 있다.
천의방의 우아한 침묵과는 대조적으로,
마을 서쪽 끝단에 위치한 연무관은 벨테인 화산의 박동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광포한 열기로 가득하다.
육중한 목조 건물의 틈새마다 뿜어져 나오는 유황 냄새와 쇳물 타는 향이 코를 찌른다.
이곳의 장인들은 활화산 벨테인이 내뱉는 화기를 제 손바닥으로 직접 주물러 가두는 자들이다.
망치가 강철을 때리는 소리는 규칙적인 맥동이 되어 지면을 뒤흔들었고,
갓 벼려낸 칼날이 냉각수에 잠길 때마다 내뱉는 비명은 연무관의 공기를 하얗게 태워버린다.
조심스럽게 연무관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전시대 위에 놓인 화론 특제의 방어구와 무기들이 보였다.
그 무기들의 표면에는 마치 용암이 흐르는 실핏줄처럼 불꽃의 문양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정교하게 새겨진 조각이라기보다, 강철 속에 가두어진 화염령이 탈출을 꿈꾸며 몸부림치는 흔적에 가까웠다.
나는 그중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도 한 자루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자루에 닿기도 전, 벌겋게 달아오른 쇠막대기를 든 장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근력으로 이 칼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하나? 어리석군."
장인의 피부는 화산암처럼 거칠고 검게 그을려 있었으며, 그의 눈동자 속에서는 꺼지지 않는 불씨가 일렁였다.
화론의 무기를 휘두르기 위해선 칼날 속에 깃든 불꽃의 기운을 억누르고 다스릴 수 있는,
강철보다 단단한 정신의 정수가 필요하다. 마음이 흔들리는 자가 이 칼을 잡는다면ㅡ
적을 베기도 전에 자신의 영혼이 먼저 벨테인의 화기에 타버릴 것이라는 경고.
장인은 내 조급한 호기심을 단칼에 베어버리듯 차갑게 덧붙였다. "무기는 제 주인을 스스로 선택하는 법.
자네처럼 사막의 흙먼지를 털어내지 못한 이방인이 주인이 될 자리는 여기 없네."
그는 다시 화덕 앞으로 걸어갔다. 불꽃이 빚어낸 이 치명적인 예술품들은 화론이 간직한 오만함의 정점이자,
그들이 사막의 침략자들로부터 수백 년간 자신들을 지켜온 힘의 근원이다.
나는 빈손으로 연무관을 나오며, 어깨를 짓누르는 화론의 공기가 이전보다 훨씬 더 뜨겁고 날카로워졌음을 느꼈다.
비단은 예법을 요구하고, 강철은 정신의 격을 시험한다.
화론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가혹한 저울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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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목
마을의 가장 깊고 습한 후미, 화산암의 지열이 식지 않아 공기마저 눅진하게 가라앉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면 후각을 마비시키는 농밀한 약초 내음이 진동하는 상약국을 마주하게 된다.
그곳은 연무관의 날 선 쇠 냄새나 천의방의 매끄러운 비단 향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묵직한 중압감을 내뿜고 있다.
문턱을 넘기도 전에 사방에 널린 선반 위로는 검게 말라 비틀어진 뿌리들이 마치 화석이 된 지네 떼처럼 엉켜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마른 약재들은 벨테인의 미풍이 불 때마다 바스스 소리를 내며 기괴한 그림자를 발치에 뿌렸다.
이곳의 주인은 찾아온 이방인을 반기는 법이 없다.
그는 그저 구석에 앉아 숯처럼 검은 약탕기를 젓으며,
끓어오르는 액체에서 피어오르는 매캐한 증기 속에 자신의 시선을 묻고 있을 뿐이다.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그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투박한 나무 그릇에 짙은 갈색의 액체를 가득 담아 내밀었다.
그것은 벨테인 화산의 유황 가스가 폐부를 갉아먹기 전
이방인의 흐릿해진 정신을 강제로 일깨우는 '청연근'의 정수였다.
한 모금 들이켜자마자 혀끝에서부터 위장까지 타오르는 듯한 지독한 쓴맛이 나를 덮쳤다.
그것은 미각의 고통을 넘어, 뇌수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명징한 통증을 동반했다.
이 고통이야말로 화론이 이방인에게 허락하는 유일한 해독제이자 경고라 짐작한다.
벨테인의 숨결에 취해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자들은
결국 이 마을의 법도를 어기고 광인이 되어 사막으로 쫓겨나기 마련이었으므로.
나는 눈물을 삼키며 그 비릿하고 쓴 액체를 목구멍 뒤로 넘겼다.
상약국의 장인은 그제야 내 눈을 잠시 응시하며 쉰 목소리로 내뱉었다.
"정신을 놓지 마라. 이곳의 공기는 자네가 알던 세상보다 훨씬 무거우니까."
상약국을 나와 마을의 북서쪽 끝단,
붉은 기와의 행렬이 끊기고 검은 암석이 날카롭게 솟아오른 경계에 서면, 기괴한 공간인 흉가에 도달하게 된다.
그곳은 화론의 다른 가옥들과는 달리 지붕이 반쯤 내려앉아 있었고,
기와 사이로는 이끼 대신 검은 안개가 실핏줄처럼 돋아나 있다.
그 안개는 바람에 흩어지지 않았다. 마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집 전체를 칭칭 휘감고는,
침입자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세하게 요동치며 소리 없는 박동을 반복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갈 때면 숨을 죽이고 먼 길을 돌아갔다.
인간의 내면 깊숙이 숨겨진 '직관'과 '집중력'을 발가락 끝까지 쥐어짜야만 하는 심연의 시험장이기에.
흉가 앞의 공기는 정적이었다.
벨테인의 화산재조차 근처에선 지면으로 내려앉지 못하고 멈춰 섰다.
낡은 대문의 문턱에 발을 올리는 순간,
나는 내가 이 거대한 어둠을 마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직감했다.
검은 안개가 내 장화 끝을 타고 올라오며 차가운 혀처럼 발목을 핥았고
사당에서 느꼈던 지맥의 맥동은 이곳에서 더욱 불규칙하고 날카롭게 변해 심장을 압박해 왔다.
대문 틈새로 보이는 1층의 내부는 빛조차 질식시키는 칠흑 같은 심연이다.
그곳에는 썰어야 할 마물도, 부수어야 할 장벽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나 자신이라는 가장 거대한 적과 마주해야 하는 고독만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상약국에서 삼킨 그 쓴 약초의 기운이 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렸다.
지금의 내 정신은 이 안개가 만들어내는 환각의 무게를 견디기에 너무도 가볍고,
내 영혼의 이정표는 화론의 법도를 담기엔 아직 사막의 모래가 너무 많이 섞여 있다.
나는 흉가 내부로 깊숙이 뻗으려던 발을 마지못해 거두어들였다.
억지로 발을 들이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화론의 '예'에 어긋나는 만용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격'을 아는 것이야말로 이 마을에서 살아남는 첫 번째 수칙이다.
나는 흉가의 낡은 대문을 등지고 천천히 돌아 나왔다.
등 뒤로 검은 안개가 조롱하듯 낮게 내려앉았지만,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로 했다.
내일의 태양이 내 등을 비춘다 해도 나는 당장 저 어둠 속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화론의 거리를 걸으며,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그 결벽의 이유를 하나씩 몸소 겪어낼 작정이다.
알세이드스의 화염은 이제 내 피부뿐만 아니라 내 영혼을 천천히 구워내고 있다.
언젠가 내가 사막의 모든 먼지를 털어내고 진정으로 화론의 공기에 익숙해지는 날,
그때 나는 이 흉가의 대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 내 영혼의 가장 깊은 진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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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혼의 도정
알세이드스의 밤은 고요했으나 침묵 속에는 벨테인 화산이 내뿜는 둔중한 맥동이 맥맥히 흐르고 있다.
금화장의 옻칠한 기둥에 몸을 기대고 서서, 처마 끝에 걸린 등불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는 양을 지켜보았다.
어둠이라는 거대한 화포(畵布) 위에 붉은 선을 긋는 예리한 붓질.
화론이라는 은둔의 영토가 외부를 향해 내뱉는 자존심.
성문 밖 불의 사막에서 들려오던 광포한 바람 소리는 이곳에 닿는 순간 정제되어,
사당의 사제들이 연주하는 가느다란 현악기의 선율처럼 고막을 부드럽게 긁어내렸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육신을 깎아내는 비명이었다면,
이곳의 밤바람은 영혼의 군더더기를 털어내는 정갈한 훈계와도 같다.
나는 이 마을이 두른 차가움의 실체를 다시금 반추했다.
흔한 증오나 멸시가 아니다. 자신들의 내면에서 타오르는 고결한 불꽃이,
준비되지 않은 타인의 습한 숨결에 의해 자그마한 불씨라도 꺼질까 두려워하는 결벽이다.
노엠이 수백 년간 이 붉은 기와의 물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까닭을 이제야 명확히 알 수 있다.
흙의 도시 사람들은 화론의 '비단'이라는 결과물과 '강철'이라는 형체만을 탐했을 뿐,
그 천 조각 하나에 깃든 '인(仁)'의 무게와 칼날 한 줄기에 박힌 '예(禮)'의 법도를 ** 못했던 것이다.
화론 사람들에게 세상은 물질로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다.
그들에게 만물은 엄격한 '율(律)'에 따라 흐르는 하나의 거대한 화음이다.
옷깃을 여미는 각도,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ㅡ
타인을 대할 때의 시선 처리 하나하나가 대지의 지맥과 공명해야 한다는 그들의 철학은,
이방인인 나에게는 다른 차원의 신화처럼 다가왔다.
이곳에서 '인'이란 그저 가여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만물의 근원을 존중하는 태도였고
'예'는 형식이 아니라 그 존중을 표현하는 가장 정교한 방식이다.
벨테인의 화산재가 연화 꽃잎과 뒤섞여 기와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는 광경을 보며,
나는 아슬론의 물병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진흙으로 빚은 이 투박한 병이 화론의 정갈한 목재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은 다어색했으나,
동시에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흙이 불을 견뎌 옹기가 되듯,
나의 여정도 이곳 알세이드스의 화염 속에서 비로소 단단해지고 있다.
화론의 법도는 나에게 가르치고 있다.
사막을 건너는 힘은 다리의 근육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얼마나 투명하게 벼려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내가 만약 오늘 밤 저 흉가의 어둠 속으로 뛰어든다면, 어쩌면 당장 화론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조급함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의 나는 아직 화론의 비단을 걸치기에 그 영혼이 거칠고, 그들의 무기를 들기에 정신의 맥동이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통행증을 얻거나 흉가의 수수께끼를 푸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화론의 붉은 등불이 내뿜는 그 고요한 위엄을 내면의 거울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때
비로소 허락되는 신성한 자격이다. 나는 등불의 불씨가 잦아드는 것을 지켜보며,
언젠가 내가 사막의 모든 먼지를 털어내고 진정으로 '격'을 갖춘 탐구자가 되어 다시 이 문을 두드리는 날을 그렸다.
그날이 오면, 노엠의 촌장은 나를 향해 '얼마까지 알아봤느냐'는 저열한 질문 대신,
차 한 잔을 내밀며 '자네의 길이 얼마나 깊어졌는가'를 물어올 것이다.
그때 나는 파수꾼들의 창날 사이를 당당히 지나, 화론의 붉은 기와 아래에서
이방인이 아닌 대지의 진정한 자손으로서 그들과 나란히 앉아 벨테인의 맥동을 논할 수 있으리라.
나의 견문록은 이제 흙의 장을 완전히 덮고, 타오르는 불꽃의 연대기 속으로 더 깊숙이 침잠하려 한다.
비록 지금은 이방인의 신분으로 이 기묘한 낙원을 잠시 떠나야 하지만,
내 심장 한구석에는 이미 화론의 붉은 불씨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세오 112년, 화론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내일의 태양이 알세이드스의 지평선을 달구면 나는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
하지만 발밑의 흙은 이전보다 단단하게 느껴질 것이고,
내 등 뒤를 지키는 벨테인의 화광은 나를 태우는 불길이 아닌, 나의 앞길을 비추는 거대한 성화봉이 되어 줄 것이다.
나는 이 닫힌 낙원이 내게 준 '침묵'이라는 가장 고결한 가르침을 배낭 속에 갈무리하며,
언젠가 다시 마주할 '불꽃의 세계수'를 기약했다.
밤은 깊었으나, 화론의 붉은 등불들은 여전히 꺼지지 않은 채
이방인의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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