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게임실행 및 홈페이지 이용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시인의 마을 세오
「秘」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8
11395 2026.05.15. 23:12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


[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4장: 비취색 용광로, 아만 - 1









: 정글


무거운 무쇠 빗장이 맞물리는 진동. 발바닥을 훑고 올라오는 둔탁한 감각은
화론에서의 인연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고와도 같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뒤를 보았다면ㅡ기하학적인 곡선을 그리던 붉은 기와와 처마,
사당의 검은 기둥을 타고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던 침향의 잔향을 다시 탐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론의 정취란 그런 식이다. 서늘하고 완고한 예의 껍질 아래,
이방인의 발길을 붙드는 정이 도사리고 있다.

안락함을 뿌리치는 데 사흘 밤낮의 고민이 필요했으나
성문이 닫히는 데에는 단 한 번의 쇳소리로 충분하다.

알세이드스의 황야.
노에스의 사막을 지배하던 그 건조한 침묵, 열기가 대지를 박제해버린 듯한 정적은 더 이상 없다.

서북쪽으로 발을 내디딜수록 대기는 점차 질척한 점막이 되어 몸을 감싸온다.
시간이 흐를수록 깊숙이 밀려드는 공기는 끓는 물에 적신 솜뭉치에 가까워졌다.

살갗 위에 맺힌 땀은 증발할 기회를 잃은 채 대기 중의 습기에 포섭되어 끈적한 막을 형성했다.
광막한 벌판 한가운데 서 있었으나, 나는 이미 다른 세계의 아가리 속에 삼켜지고 있었다.

벨테인.

화론의 촌장은 알세이드스 중부에 웅크린 그 활화산의 이름을 뱉을 때마다 마디를 두었다.

벨ㅡ테인.

마치 거대한 아궁이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호흡을 고르는 의식처럼 들리는 이름.
화산의 화마가 지하의 수맥과 충돌하며 빚어내는 비명, 그것이 화론 사람들이 말하는 '증기 장막'의 정체.

지도 위에는 잉크 한 방울조차 허락되지 않은 경계.
오직 부츠 밑창에 들러붙는 흙의 점도와 피부를 찌르는 유황의 농도로만 더듬어 알 수 있는 국경이다.

이 선을 넘은 것은 황야를 가로지른 지 이틀째 되던 새벽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그러나 해가 뜨고 땅이 달구어지기 시작하자 지면에서 피어오르는 것은
안개가 아니라 대지가 뱉어내는 뜨거운 가래였다.

안개는 차갑기는커녕 살결에 닿는 순간 모공을 억지로 열어젖힐 만큼 얼얼했다.
그때 촌장의 마지막 찻잔 속에 담겼던 경고가 육성으로 되살아났다.

"불은 제 몸을 태워 빛을 낼 때보다, 녹색의 수풀 뒤에서 숨을 쉭쉭거릴 때 더 치명적인 법이지.
정글의 녹색은 생명의 빛이라기보다 대지가 곪아 터지며 뱉어낸 뜨거운 고름일 수도 있네."

노인의 짓궂은 농담이라 치부했던 그 말은 사흘째 되던 날 오후,
지평선을 가로막은 거대한 형상 앞에서 진실로 화했다.

눈앞을 메운 것은 내가 알던 어떤 생명의 색채도 아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빛깔을 삼키고 침묵시키는 비취색 심연이었다.

지평선 끝에서 하늘을 찌를 듯 수직으로 솟구친 육중한 장벽은 숲이라기보다,
무언가 끔찍한 것을 가두기 위해 대지 스스로가 융기시킨 거대한 소각로처럼 보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춘다면, 대지의 고름이 고인 저 울창한 아가리 속으로
다시는 발을 들이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로 증기의 장막을 찢고, 아만 정글의 눅눅한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


: 경계


정글의 첫 나무는 혼자였다.

황야와 밀림의 경계에서 수십 척 앞에ㅡ다른 나무들과 간격을 두고 홀로 서 있는 거목이 있었다.
척후병 같기도 하고 동시에 문지기 같기도 하다.

껍질은 숯보다 진한 흑색이었으며 군데군데 붉은 빛이 실처럼 흘렀는데,
가까이 다가서자 그것이 단순한 무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껍질 아래에 무언가 흐르고 있다.
나무의 내부가 펄럭이고 있다.

살아있는 짐승의 가죽 아래를 흐르는 핏물처럼, 실핏줄 같은 붉은 수액의 통로가
나무 표면에 또렷하게 돋아나 있었고ㅡ그것들은 규칙적으로 수축과 팽창을 반복했다.

나는 한동안 그 나무 앞에 서서 그것이 내쉬는 숨을 느꼈다.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손바닥을 껍질에 대었을 때, 심장박동과 같은 진동이 느껴졌다는 것만큼은 착각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화맥수(火脈樹).

화론의 상약국에서 이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진귀한 약재의 산지 정도로 여겼다.
벨테인의 지열을 뿌리로 빨아올려 자라는 나무들의 수액이 화독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는 이야기.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선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이 정글의 뼈대다.

뿌리는 지맥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열을 빨아올리고, 그 열을 줄기와 가지로 분배하며
주변 온도가 내려가는 새벽이나 우기에는 스스로 발열하여 정글 전체의 기온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이 나무들이 없으면 정글의 생태 전체가 무너진다.
정글이 나무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들이 정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홀로 선 문지기 나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하늘이 사라졌다.

위를 올려다보았다. 수백 척 높이로 솟구친 거목들의 잎사귀가 빈틈 없이 하늘을 덮고 있다.
빛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빛은 밖에서 보던 햇살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잎사귀들을 통과하며 색이 바뀌었다.

황금빛이 되었다가 황록빛이 되었다가, 바닥에 도달할 무렵에는
마치 오래된 담즙처럼 끈적한 빛이 되어 지면 위에 고였다.

그 빛 속에 먼지들이 유영한다. 아니, 먼지가 아니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미세한 증기다. 나는 내가 이미 이 연결점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밑둥치를 뒤덮은 이끼를 밟은 것은 실수였다.
발이 빠졌다기보다 발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바닥 아래에서 흰 증기가 치솟았고,
이끼가 내뿜는 열기가 부츠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황급히 발을 빼고 그것을 살펴보았다.

이끼는 어둠 속에서 미세한 인광을 내뿜고 있었다. 연한 주황빛이었는데,
가만히 보면 그것이 발광이 아니라 열이 빛으로 보이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이끼들은 화맥수의 뿌리 근처에서만 자란다. 지열이 충분하지 않으면 사그라든다.

그리고 외부에서 무언가가 자극하면,
자극을 화맥수의 뿌리망에 어떠한 신호로 전달한다고 아만족의 후일담에서 들었다.

나무들이 나를 주시한다.
정글은 이미 나를 알고 있다.


-


:갈증


정글의 대기에 고여있는 무엇.
그것이 벨테인 활산이 내뱉는 머나먼 노호이거나 수림의 머리채를 흔드는 바람 소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이 폐쇄적인 녹색의 소각로 안에는 바람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거목들이 겹겹이 두른 이파리 차양은 외부의 모든 기류를 완벽히 차단하여,
숲 안의 공기를 눅눅하고 무거운 점막처럼 가두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는 산발적이고 비정형적이었으며, 가끔은 고막을 찌르는 금속성 마찰음으로,
가끔은 가슴속 깊은 곳을 긁어내리는 낮은 흐느낌으로 변모하며 이방인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소리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중층의 어둠으로 끌어올렸을 때,
나는 보랏빛 낙인처럼 가지마다 박힌 꽃들의 군락을 목격했다.

거목의 굵은 가지가 비틀리며 엉킨 습한 틈새마다 잎사귀도 없이 화려하게 피어난 그것들은
마치 숲의 육부가 밖으로 툭 튀어나온 듯 기괴한 모습이었다.

보랏빛 꽃잎들이 주기적으로 벌어지고 오므라들 때마다, 대기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개화가 아니라 탐욕스러운 ‘포식’의 소리였다.

꽃잎이 벌어지는 찰나,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보랏빛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로 인해 생겨난 허공의 빈자리를 채우려던 대기가 거칠게 부딪히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화론의 학자들이 ‘혼흡란’이라 명명했던 이 기이한 생물들은 곤충의 육신 대신
대기에 떠도는 정령의 잔해와 마력을 탐닉한다.

수만 송이의 난초가 집단으로 내뱉는 호흡은 숲 전체를 거대한 허파로 탈바꿈시켰고,
휘파람 소리는 침입자의 생기마저 앗아가는 탐욕스러운 갈증의 노래가 된다.

나는 그 기이한 공명 속을 걸으며 사지가 점차 납덩이처럼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력을 다루는 많은 영매와 소환사들이 아만 정글의 초입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이유를 실감한다.

난초들은 마력만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ㅡ
살아있는 존재가 발산하는 미세한 생명의 불씨까지 거칠게 낚아채고 있다.

나는 말린 고기를 *으며 흐려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이 정글에서 걸음을 멈춘다는 것은, 스스로를 정갈하게 차려진 제물로 바치는 행위와 다름없다.

거목의 동체를 비늘처럼 감고 올라가는 덩굴들은 육안으로는 평범한 고목의 껍질과 구별되지 않았다.
기름기 어린 짙은 초록 잎사귀 아래 감춰진 갈색 줄기에는 예리한 가시들이 독사의 송곳니처럼 숨죽이고 있다.

비극은 아주 사소한 접촉에서 시작되었다.
협로를 지나던 부츠 끝이 덩굴의 가장자리를 스쳤을 뿐이었다.

그 찰나, 덩굴은 식물의 범주를 벗어난 기동으로 뒤틀렸다.

부츠의 발목 부분을 조여드는 힘은 뱀의 수축보다 집요했고, 강철 사슬보다 단단했다.
반사적으로 단도를 뽑아 줄기를 베어내자, 잘린 단면에서 끓는 기름 같은 검붉은 액체가 터져 나왔다.
손등에 튄 단 한 방울의 액체는 피부를 태우는 통증이 되어 순식간에 어깨까지 치솟았다.

물병의 귀한 물을 쏟아부어 씻어냈으나, 손등에는 이미 검붉은 수포가 흉측하게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수액이 아니라, 벨테인의 열기를 농축해 담은 지열의 고름이었다.

화론의 상약국에서 보았던 표본, ‘염화혈만’의 위력이다.
이 식물의 열독은 혈관을 타고 들어가 체온을 비정상적으로 끓어오르게 만든다.

장기가 안쪽에서부터 익어가는 고통 속에서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진 자들은,
결국 숲의 거름으로 환원된다.

아만족 전사들이 이 독을 정제해 화살촉에 바른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 덩굴들은 시각이 아닌 체온의 파동을 감지해 사냥감을 낚아챈다.
빙혈초에 절여 냉기를 머금은 가죽 옷이나 화론의 사제들이 입는 특수한 법복이 없는 나로서는,
이 숲의 모든 생명에게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걷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제 손등의 통증을 훈장 삼아, 덩굴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우회로를 찾아 눅눅한 늪지대로 발을 내디뎠다.
정글은 이제 숲이 아니라, 나를 삶아내기 위해 솥뚜껑을 닫은 거대한 가마솥으로 변해가고 있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