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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사람냄새 [에세이]
9156 2026.05.20. 14:27




예전 본 서버에서 인간관계에 깊은 환멸을 느끼는 작은 소동이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오는 상처는 나를 분노케 했고,
결국 잠시 어둠의전설을 떠나 이 게임 저 게임을 전전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고, '썩어도 준치'라 하지 않았던가.
결국 나는 다시 어둠의전설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다만 본 서버에는 도저히 정이 가지 않아, 새로운 마음으로 셔스 서버의 문을 두드렸다.





어느 마을을 가도 풍경은 텅 비어 있었다.
가끔 보이는 잠수 유저에게 말을 건네보아도 돌아오는 건 서늘한 침묵뿐,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타인과 굳이 관계를 맺지 않고 편하게 게임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홀로 성장을 시작했다.






일단 '콘30 올힘 무도가'를 키워 99레벨이라도 찍어보자는 마음이었다.
포테의 숲에서 핀을 잡으며 묵묵히 사냥한 끝에 마침내 레벨 99가 되었지만,
그 순간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다.
퀵던전이 존재하긴 했으나, 혼자서는 도저히 진입할 수 없는 외로운 솔로 플레이어였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성장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나는 그저 마을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뉴비인데 쩔해주실 분 계신가요?"


외치기를 날리고 게시판에도 나의 절박한 상황을 적어둔 채,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헛된 희망을 품으며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기적 같은 귓속말이 찾아왔다.


"쩔 해드릴게요."



귓속말을 받고 다시 성장할 수 있다는 흥분감에 그의 안내를 고스란히 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의 지존 무도가는 어느새 환골탈태를 거쳐 2차 승급까지 완료한 채 멋진 독수리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승급이 끝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무도가 기술서와 얼마간의 금전을 건네주며,
무도가의 모든 기술을 레벨 2까지 올릴 수 있도록 살뜰히 도와주고서야 비로소 사냥을 마쳤다.




"이제 퀵던전 혼자서도 도실 수 있을 거예요. 다른 캐릭터도 키우셔서 멀티로 사냥하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셔스 서버에도 이런 분이 계셨군요."

"아니에요, ㅋㅋ 그냥 재밌어서 한 겁니다. 접지만 마세요."




아무런 대가도, 이유도 묻지 않고 조건 없는 선행을 베풀어준 그는 암흑 같던 내 게임 플레이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사람이었다.




기술서 값이 워낙 비쌌기에, 나는 그가 다져준 무도가 캐릭터로 솔로 던전을 돌고 돌며 여러 부캐릭터를 키워냈다.
직접 기술서를 캐서 팔기도 하고,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도 하면서 어느덧 셔스 서버에 안정적으로 정착해 나갔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본 서버에서 다투었던 옛 동료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악수를 시작으로 나는 다시 본 서버로 넘어오게 되었고,
또다시 어둠의전설에 깊이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셔스 서버에 접속하는 횟수가 뜸해졌다.




은인에게 제대로 된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고 떠나버린 내 간사한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 서버 인맥들에게서 느껴지는 따뜻한 정과 사람 냄새는 이내 나를 백지상태로 만들었고,
그런 미안함을 흐려지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나 정말 오랜만에 셔스 서버에 접속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던 은인의 편지 두 통이 도착해 있었다.




[편지 1] "접으셨나여~? 요새 안 들어오시네."


[편지 2] "접으셨군… ㅋㅋ. 씁쓸하지만 이해합니다. 어둠을 접으신 건가요, 아니면 셔스를? 근황이라도 압시다, ㅋㅋ."




반가움과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와 급히 귓속말을 넣었더니 신호가 갔다.
그동안 접속하지 못했던 나의 죄스러운 마음을 담아 작게나마 사과를 전하며 그와 오랜만의 대화를 나눴다.


그는 또다시 쩔을 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미 셔스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내게 그것은 무의미했다.
나는 셔스 서버를 완전히 정리하기 전, 평소 마음속에 품었던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왜 이렇게까지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가 담담하게 답했다.



"원래 게임은 같이 해야 재밌는 거니까요."




그는 셔스 서버로 이주해 온 유저들을 지금까지 묵묵히 도와주며 조용히 살아가고 있었다고 했다.
다만, 그렇게 도와준 100명 중 99명은 아무런 말도 없이 게임을 접거나 연락이 두절된다고 했다.

그나마 남은 한두 명만이 아주 가끔, 자주는 아니더라도 함께 게임을 즐길 뿐이라고 씁쓸하게 덧붙였다.




조건 없이 선행을 베푸는 고결한 그에게, 나는 지금까지 셔스 서버에서 땀 흘려 모은 기술서와 금전을 모조리 건넸다.
그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훗날 셔스 서버를 찾아올 또 다른 뉴비들을 위해 써달라"는 내 말에 마침내 교환창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그와의 따뜻한 인사를 끝으로, 나는 셔스 서버의 여정을 완전히 마무리했다.







항상 어둠의전설을 하며 생각해왔다.

이 세계에는 정말 다양한 유형의 유저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뉴비를 어떻게든 도와주려는 사람들,
소외된 이들을 따뜻하게 품으려 노력하는 길드와 유저들이 있다.

이렇듯 '사람 냄새' 나는 이들이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고 있기에, 우리가 여전히 이 오래된 게임을 사랑하고 못 잊는 게 아닐까.




동시에 깊이 반성해본다.


'나는 과연 어둠의전설 유저들을 위해 어떤 선행을 베풀어보았는가.'


당연하게도 나는 그저 받기만 했을 뿐,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베푼 적이 기억나지 않았다.




2026년, 과분하게도 시인에 당선되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그저 손이 가는 대로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을 읽어줄 유저들의 기대와 니즈를 맞추기 위해 고뇌한다.
자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글을 썼다 지웠다 반복하는 치열한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과거 내게 조건 없는 구원을 베풀어주었던 그 사람 냄새 나는 유저처럼,

나 또한 언젠가 이 세계의 유저들에게 따스한 '사람 냄새'가 나는 읽을거리를 선물했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그 깊은 소망을, 2026년 5월 20일 오늘 이곳에 조용히 적어두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