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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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5장: 신들의 성소, 타바리 - 1
: 아만의 수문과 쏟아지는 하늘
아실리움의 거대한 뿌리가
땅속 깊이 박아 넣었던 지맥의 억센 고동이 점차 잦아들 무렵,
정글을 지탱하던 숲의 거대한 차양에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머리 위를 빈틈없이 메우고 있던 겹겹의 잎사귀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며
꽤나 긴 시간 동안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날것 그대로의 하늘이 가느다란 선이 되어 흘러내렸다.
그 빛의 틈새를 타고 밀려든 것은 유황의 냄새나 화맥수의 끈적한 진액 내음이 아니다.
살갗을 스칠 때마다 소름이 돋는 질박한, 순수한 물줄기의 숨.
알세이드스 내해에서부터 쉼 없이 불어왔을 거친 찬바람이 계곡의 좁은 협로를 타고 휘몰아치며
로브에 쌓여 있던 화산재 가루들을 털어냈다.
북쪽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대지의 고도가 급격하게 주저앉는 거대한 단층 지대로 이어졌다.
수림이 마침내 자신의 한계를 선언하듯 거대한 수직의 절벽을 드러낸 자리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거대한 백색의 장막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만의 북쪽 경계를 완강하게 지켜온 거대한 폭포. 대지의 수문.
절벽의 높이는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는 감히 그 아득함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솟구쳐 있다.
꼭대기의 성난 암반 틈새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물줄기는,
바닥의 암설 지대에 닿기 전에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운 물안개로 부서져 내렸다.
이 커다란 하얀 먼지들이 계곡 전체를 뒤덮으며 사방의 풍경을 지워낸다.
수천, 수만 마리의 군마가 대지를 한꺼번에 짓밟으며 폭주하는 듯한 웅장한 울림이 흉강 전체를 가득 채운다.
소리에 머물지 않는 거대한 울림. 발밑을 지탱하는 바위틀의 심재까지 가늘고 길게 흔들린다.
화론의 사당 깊숙한 곳에서 사제들이 놋쇠 종을 쳐서 만들어내던 공명이나 배타적인 위압감 따위와는 다른 성질.
대지가 지닌 가장 정직하고 거대한 질량이 낙하하며 내지르는 자연 고유의 노호.
폭포의 거센 물살이 끊임없이 박히는 하단부의 호수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고 차가운 비취색으로 출렁였다.
수면에 부딪친 물보라는 분수처럼 다시 솟구쳐 오르며 정글의 눅눅한 공기 속에 부유하던
잿나비의 날개 가루와 끈적한 미세 증기들을 남김없이 씻어내고 있었다.
폭포가 서 있는 자리는, 밀림의 독기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백색의 순수한 성벽이 되어 가로놓여 있었다.
아만족의 척후가 부락을 떠나던 내 등 뒤에 대고 퉁명스럽게 뱉어냈던 길눈은,
이 쏟아지는 물줄기의 한복판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이면으로 기어 들어가는 경로뿐이다.
다른 우회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벽 양옆의 암반은 이끼와 유황 진액으로 덮여 손가락 하나 걸칠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호수의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물살에 깎여 둥글고 미끄러운 바윗길을 향해 조심스럽게 무릎을 굽혔다.
부츠 밑창이 물이끼에 미끄러질 때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사방에서 비산하는 수천만 개의 물방울이
가죽 보호구의 이음새와 옷깃 사이로 사정없이 파고들어 살갗을 시리게 적셨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격렬하게 일어나는 물비린내가 단전 깊숙한 곳까지 차올라 차가운 한기를 퍼뜨린다.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의 폭압이 어깨와 목덜미를 무겁게 짓누른다.
눈을 뜨는 것조차 잊은 채 두 발의 뒤꿈치에 모든 체중을 실어 단단히 고정했다.
발 하나를 잘못 디디면 그대로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가 배를 훑고 지나갔지만,
물살이 만든 바위의 홈들은 놀랍게도 발끝이 파고들기 딱 맞는 형태로 패여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누군가의 발이 이 길을 지나갔다는 뜻이다.
아만족만이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길.
마침내 폭포 바로 뒷면에 숨겨진 거대한 바위의 틈새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쏟아져 내리는 물의 이면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사방을 찢어발기던 물화포의 노호는 거짓말처럼 단숨에 잦아들었다.
거대한 물장막의 두께가 외부의 모든 빛과 소음을 완벽하게 도려내고 차단해 버린 까닭이다.
그곳은 자연이 오랜 세월 동안 물줄기 뒤편에 숨겨놓은, 고요하고 은밀한 암석 통로였다.
뚝뚝 떨어지는 물소리만이 동굴 초입의 정적을 나직하게 깨뜨린다.
젖어 있는 바위 벽면을 더듬으며 어둠 속으로 몇 걸음 옮기지 않아, 축축했던 점막 같은 어둠은 홀연히 사라졌다.
눈앞에는 생전 처음 마주하는 영롱한 빛의 심연이, 셀라임의 가장 깊은 비밀이 장엄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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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 동굴
폭포의 포효를 뒤로하고 들어선 동굴의 내부는
머나먼 고대의 전설 속 한 대목의,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은 주랑에 가깝다.
사방을 에워싼 동굴의 거대한 벽면과 아득하게 높은 천장은
셀라임 지방의 태초부터 흘러내린 지맥의 기운을 빨아올려 자라난 투명하고 영롱한 수정 결정들의 성역이다.
기형적인 식생과 타오르는 유황의 질척함이 지배하던 아만의 세계는
이 차가운 결정의 성소 앞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소금기 없는 새벽의 공기처럼, 안쪽의 세계는 밖의 것들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었다.
동굴이 품은 구조는 육안으로는 도저히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웅장한 궤적으로 이어져 있다.
천장부에서는 수백 년 동안 자라난 수정 주착들이
마치 거꾸로 솟아오른 은빛숲처럼 아래를 향해 촘촘하게 침을 꽂고 있다.
바닥의 암반에서는 대지의 거친 숨결을 받아 솟구친
수정 첨탑들이 신전의 회랑을 지키는 기사들처럼 성벽의 형태로 늘어서 있었다.
이 거대한 공간 속의 무수한 결정들은 누구의 손길도 빌리지 않은 채
스스로 맑고 푸른 안광을 은은하게 사방으로 뿜어냈다.
기름진 불꽃이나 인위적인 마법의 등불이 흉내 낼 수 없는,
대지의 가장 순수한 심재가 스스로를 정화하며 토해내는 빛.
수정 첨탑들의 매끄러운 표면은 잘 벼려낸 강철 거울처럼 차갑고 투명하여,
통로를 걷는 나의 초라한 형색과 젖은 부츠의 흔적을 사방으로 수십 개씩 반사하며 영롱함을 자아냈다.
발을 옮겨 디딜 때마다 가죽 밑창과 굳건한 바위 바닥이 마찰하며 내는 투박한 소리는
수정의 단단한 벽면에 부딪치는 순간 가늘고 청명한 공명음으로 여과되어,
동굴의 아득한 심부를 향해 아벨 대성당의 종소리처럼 퍼져나간다.
울림은 외지인을 거부하는 날 선 위협의 기척을 담고 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 어떤 발길도 허락하지 않았던 고요한 신전이ㅡ
마침내 자신을 찾아온 방랑자의 무거운 걸음걸이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고단함을 쓸어내려 주는 듯한 환대로 느껴진다.
천장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드리운 수정 주착 하나가
내가 지나칠 때 생겨난 작은 기류를 받아 미세하게 진동했다.
떨림은 주착들 사이를 파장처럼 번져 나가며,
하프의 최저음 현을 손가락 끝으로 건드렸을 때 일어나는 것과 흡사한 울림을 동굴 전체에 낮게 깔아놓았다.
소리는 배 안쪽, 명치의 바로 아래 지점에 걸려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진다.
나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손가락을 가장 가까운 수정 첨탑의 옆면에 가져다 댔다.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통해 전해져 왔다. 살아 있는 것의 심박과 다를 바 없다.
돌이, 수정이, 대지의 깊은 뼈가 살아서 빛난다.
아만족이 아실리움을 경배하는 방식과
이 땅의 사람들이 수정 동굴을 경배하는 방식이 어쩌면 같은 문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전이 아닌, 대지 스스로가 지어 올린 성소.
인간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지가 인간을 들이는 공간.
이 영롱한 빛의 미로 속에 머무는 동안, 나를 옥죄던 시간의 흐름과 조급한 계산은 무의미하리라.
동굴 내벽의 틈새에서 돋아난 미세한 결정들은 걸음의 방향에 따라
주홍빛이나 연보랏빛으로 은은하게 제 색조를 바꾸며 가야 할 방향을 인도했다.
나는 대지가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지어 올린 순수한 결정체들의 호위를 받으며 묵묵히 보폭을 옮겼다.
밀림의 매캐한 압박감과 열독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신의 감각이 수정이 내뿜는 서늘한 기운을 받아 투명하게 정화되는 기분이다.
걸음이 깊어질수록 동굴의 폭은 점차 넓어졌다.
천장의 수정 주착들은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의 건반처럼 웅장하게 정렬하여 빛의 위엄을 더한다.
바닥에 고인 맑은 샘물 위로 수정의 안광이 굴절되어 수면에 춤추는 푸른 그림자들은,
신화 시대의 정령들이 여전히 이곳에 숨어 숨을 쉬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언의 흔적 같았다.
나는 배낭에 매달린 투박한 물병의 가죽 끈이 수정 표면에 닿아 내는 아주 작은 마찰음조차
이 거룩한 고요를 깨뜨릴까 두려워, 호흡의 속도를 늦추고 온전히 대지의 결정이 건네는 침묵의 서사에 몸을 맡기기로 한다.
사방을 가득 채운 푸른 빛의 물결은 이방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았다.
도리어 정글의 어둠 속에서 흐려졌던 이성의 눈을 더 매끄럽게 벼려내며
앞으로 마주할 척박한 대지의 여정을 준비하게 만들어준다.
맑은 샘물 위에 고인 자신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정글의 시간이 얼굴 위에 두껍게 쌓여 있다. 깊게 팬 피로의 주름,
화맥수 진액이 말라붙은 눈썹 끝, 유황 증기에 거칠어진 입술.
그러나 수정의 푸른 빛을 받아 물 위에 비친 그 얼굴은 낯선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고단함이 일종의 형태를 얻은 것처럼. 이 땅을 통과한 것들만이 얻는 형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이 영롱한 미로 속에서 보냈는지 알 수 없을 무렵,
수정들의 밀도가 차츰 낮아지며 전방의 암반 틈새로 거칠고 건조한 바람 소리가 나직하게 밀려들기 시작했다.
정글의 축축함과는 다른 결.
그것은 이내 동굴의 끝을 알리는 백색의 출구로 이어졌다.
나는 빛을 향해 또 한걸음을 내디뎠다.
등 뒤로 펼쳐져 있던 수정의 화랑은
다시 인간의 기억이 닿지 않는 영원한 고요 속으로 자신의 신비로운 장막을 닫아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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