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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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5장: 신들의 성소, 타바리 - 2
: 셀라임
수정 동굴의 문턱을 넘어서자 잔상이 일시에 흩어지며 가차 없는 현실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아만 정글이 자랑하던 눅눅하고 빽빽한 녹색의 비옥함과 결별한 샐라임 지방의 메마른 숨이다.
대지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벨테인의 습한 화기는 이 높은 골짜기의 험준한 능선에 부딪혀 흔적도 없이 꺾여 나갔다.
대신 서대륙의 황량한 고원지대에서부터 수천 리를 거침없이 달려왔을
건조하고 서슬 퍼런 바람이 협곡을 타고 휘몰아쳤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밑바닥이 바짝 메마르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감돌았다.
한 걸음 전까지 나를 괴롭히던 유황의 지독한 냄새는 온데간데없다.
오직 바스러진 흙과 오래된 먼지, 그리고 죽은 것들이 남긴 건조한 잔향만이 대기에 두껍게 내려앉아 있다.
길목을 무겁게 채우고 있는 형상들은 더 이상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화맥수의 군락이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하를 흐르는 화맥의 방향이 뒤틀리고 지열의 급격한 변화를 견디지 못한 채,
마치 거대한 미라처럼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굳어버린 거목들의 유해가 골짜기 전체를 공동묘지처럼 메우고 있었다.
나무들은 몸통 내부의 수분이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증발해 버린 탓에
수피가 화산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하얗고 푸석하게 바스러져 내렸다.
발이 살짝만 스쳐도 오랜 시간의 흔적을 폭포처럼 바닥으로 쏟아냈다.
그중 어떤 완강한 줄기들은 과거 지각 변동이 남긴 산불의 상흔을 지우지 못한 채,
숯처럼 검고 처참한 몰골로 비틀린 채 서 있었다. 사방으로 사납게 꺾인 나뭇가지들은 하늘을 향해
무언가 억울한 하소연을 하듯 기괴하게 손가락을 뻗은 형태로 굳어 버렸다.
이 고목들이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십 년 전일 수도 있고, 수백 년 전일 수도 있다.
셀라임의 건조한 공기는 부패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죽은 것들이 죽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썩지도 쓰러지지도 않은 채, 그저 점점 더 말라간다. 이 골짜기는 무덤이 아니다. 무덤이 되지 못한 곳이다.
죽어버린 고목들이 만들어낸 앙상한 그림자 틈새로 겨우 나 있는 좁은 자갈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보폭을 옮겼다.
발밑의 지면은 정글의 질척한 진흙탕 대신 잘게 부서진 화산암 조각과
메마른 거친 흙으로 이루어져 있어 부츠가 닿을 때마다 스산하고 쓸쓸한 파편 소리를 골짜기 안 가득 울려 퍼뜨렸다.
허벅지까지 빠져들던 아만의 진흙 늪에 비하면 보폭을 옮기기가 훨씬 수월했다.
오랜만에 등에 진 짐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졌다.
바람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고목들의 메마른 가지들이 서로 부딪혔다.
그 소리는 현악기의 비명 같기도 했고, 오래된 건물의 마루판이 삐걱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나는 소리. 살았던 것들의 기억이 남긴 소리.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
아만 정글에서는 ** 못했던 하늘. 거기에 벨테인의 화산재 구름이 먼 지평선 너머에서 낮고 붉게 피어오르고 있다.
붉음이 말라비틀어진 고목들의 하얀 수피 위에 번져 골짜기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이 바스러지는 수림 지대는 아만이 보여준 습하고 강렬했던 녹색의 세계와,
이제 곧 저 멀리 언덕 너머에서 마주해야 할 새로운 문명지 사이를 가로막은 완벽한 완충지다.
흐르는 세월이 자비 없이 쌓아 올린 거대한 무덤의 제단과도 같은 그곳을 지나며,
나는 밖의 세상이 말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이 서대륙의 지맥 위에서는
얼마나 쉽게 뒤틀리고 허물어지는지를 새겨 넣어본다.
나의 도정은 더욱 깊숙이 침잠해 들어간다.
메마른 가지들이 바람에 부딪혀 서글픈 비명 같은 소리를 내는 골짜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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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거인들의 성벽
메마른 수림이 만들어낸 앙상한 미궁을 통과하여,
양옆의 암벽이 칼날처럼 솟구친 험준한 바위 협로로 접어들자 또 다른 격변을 맞이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를 내는 이 좁은 골짜기의 입구는
거친 자연의 조형물들 사이에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인공의 유해들이 뒤엉켜 지평선을 채우고 있다.
셀라임 지방의 심부이자 최종 목적지인 타바리 마을로 향하는 길목.
대륙의 역사서에 단 한 줄의 기록조차 남지 않은 시대,
인간의 빈약한 기억이 감히 가닿지 못하는 아득한 태초에 번성했던 고대 문명의
거대한 골격들이 길 전체를 옥죄듯 에워싸고 있다.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 부서진 대지 위로 드러난 회색 파편들은
그 크기와 배치만으로도 지나가는 이의 오만함을 단숨에 꺾어놓는다.
풍경의 압도감은 협로의 초입,
세월의 풍파에 반쯤 바스러진 고목의 둥치 곁에 우뚝 선 거대한 석조 기둥의 잔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륙 동방이나 화론의 이름난 석공들이 정과 망치로 세련되게 깎아낸 그런 종류의 석조물과 분명 다르다.
인간의 완력으로는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질량의 흑회색 암석들이
지동의 충격을 견뎌내며 거인의 뼈대처럼 비틀린 채 솟아 있다.
기둥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들이 바위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기둥임을 알았다.
이끼와 덩굴손이 수백 년 동안 표면을 덮고 자라나 수피와 돌의 경계를 흐려놓았음에도,
수직으로 깊게 패인 정교한 선들과 거대한 사각형 서까래를 받치던 홈자국은
여전히 날카로운 예리함을 간직한 채 뚜렷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단단한 석재의 단면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대지의 마법과 알 수 없는 고대의 기술이 결합하여 빚어낸 것이리라.
이것을 만든 자들은 돌을 다듬은 것이 아니다. 돌에게 형태를 요청한 것이다. 대지의 신에게 기도한 것이다.
마이소시아를 여행할 때 전설로만 전해 듣던 엔트 시대의 고대 거수들이 남긴 흔적처럼,
이 서쪽 대륙의 척박한 샐라임 변방 역시 역사시대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고도로 발달한
선문명의 영토였다는 학자들의 오랜 가설은 이제 의심할 여지 없는 눈앞의 실체로 다가왔다.
무너진 성벽의 거대한 파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지열과 칼바람에 깎이고 허물어졌으나,
결코 바스러지지 않는 완강한 성질을 유지한 채 이 험난한 산길의 단단한 토대를 이루고 있다.
무너진 돌들은 길을 막아서는 장애물이 아니다.
도리어 늪지대와 갈라진 암반 위를 안전하게 디딜 수 있도록 돕는 거대한 기단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협로의 굽이마다 이 거인들이 남긴 유산이 계단과 벽의 형태로 길을 안내했다.
어떤 파편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별자리인지, 지형도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언어의 문자인지 알 수 없는 형태들이 돌의 표면 위에 깊고 규칙적으로 패여 있다.
손끝으로 홈을 따라가 보았다. 깊이가 고르고 매끄러워 돌을 긁어낸 것이 아니라 돌 안쪽으로 밀어 넣은 것 같다.
이것을 새긴 자들의 손가락이 어떤 형태였는지, 그 손들의 기억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바위들의 깊은 틈새와 깨진 돌의 단면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변질한 고대의 마력이 미세한 주홍빛 안광이 되어 밤안개 속으로 가늘게 흘러나오고 있다.
살가죽을 태우던 정글의 독기와 달리,
이 오래된 잔해들이 품은 기운은 이방인의 마음에 공포나 거부감을 심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긴 세월 동안 이 땅을 묵묵히 거쳐 간 무수한 생명들과 사라져간 문명들이 남긴
거대한 연대기의 마지막 장을 읽는 듯한 기분을 주었다.
소란스럽던 가슴속의 잡념들을 차분하고 엄숙하게 가라앉혀 주었다.
나는 거대한 석조 서까래의 파편 위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그 차가운 돌의 표면에 가져다 대었다.
돌은 지열을 머금어 은근한 온기를 품고 있다. 표면을 흐르는 파동은 아만의 화맥수들이 내뿜던
탐욕스러운 박동과 달리 먼지처럼 고요하고 정제되어 있다.
수천 년 전 이 돌을 다듬고 쌓아 올렸을 이름 모를 거인들의 손길과,
그들이 누렸을 번영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 번영이 왜 사라졌는지를 이 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지의 큰어른인 돌은 언제나 인간보다 긴 침묵을 알고 있다.
거대한 회색 성벽의 잔해를 타고 흘러내린 마른 덩굴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고대의 기둥들은 인간의 짧은 생애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시간의 위엄을 묵묵히 웅변하고 있다.
역사 이전의 기억을 품은 거대한 석벽의 호위를 받으며,
나는 이 서대륙의 가장 은밀한 연대기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간다.
벨테인의 먼 화산재 구름이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시간, 오늘도 지키고 있다.
무너진 거인들의 성벽이, 대지의 오랜 기억을 머금은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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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바리 길목
험준한 바위 협로의 비탈길이 완만하게 누워버리는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야,
거인의 무덤 같던 풍경 속으로 낯익은 연기의 자취가 번져왔다.
샐라임 지방의 척박한 지표면 위로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선문명의 잔해들이ㅡ
어느 순간 일정한 양식과 목적을 지닌 채 정렬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하프엘프의 손길이 고대의 차가운 석조 유적을 자신들의 소박한 일상 안으로 거두어들인 흔적들.
타바리 마을의 거주민들은 외지인들이 신성한 두려움으로 바라보던
거대한 석조 기둥과 부서진 성벽 조각들을 다듬어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가꾸고, 가축을 가둘 울타리를 세웠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진 거인들의 거대한 기단은
그대로 새 가옥들의 단단한 주춧돌이자 바닥재가 되었다.
이끼 낀 사각형 석재들은 거친 유랑 생활의 종착지가 된 주방과 헛간의 외벽으로 다시 태어났다.
먼 과거의 신화적 파편 위에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정갈한 숨결이 덧칠해진 그림은 온화한 서정을 풍겼다.
마을 사람들은 이 오래된 암석들 밑에 흐르는 기운이
벨테인의 광포한 화독과 정글의 마물들로부터 집안을 지켜주는 방패가 된다고 믿었다.
영리한 축조공들은 가옥의 출입구와 창틀마다 고대의 문양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돌들을 골라 배치했다.
그 튼튼한 이음새 사이로 저녁 밥을 짓는 뽀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은 더없이 평화로웠다.
연기는 화론의 사당을 채우던 인위적인 향취와 달리,
마른 밀이삭을 태우는 구수한 내음을 머금은 채 가라앉은 서대륙의 밤공기 속으로 부드럽게 섞여 들었다.
돌 속에 갇힌 태초의 마력은 이제 거창한 이적을 행하는 대신, 겨울밤의 매서운 한기를 막아주고
이 자그마한 부락의 온기를 보존하는 소박한 율법으로 쓰이고 있다.
마을 어귀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잘려 나간 거대 석상의 종아리 부분을
의자 삼아 앉은 한 노인이 무심히 송곳을 놀리며 낡은 가죽 부츠를 수선하는 데 몰두했다.
노인의 등 뒤로 펼쳐진 고대 문명의 거대한 석벽은 마을 전체를 감싸 안은 천연의 병풍처럼 든든하게 둘러쳐져 있다.
노인은 그것을 한 번도 올려다** 않았다. 매일 보는 것일테지. 전설이 일상이 된 자리.
가옥들 사이의 좁은 골목을 지날 때, 아이들이 커다란 석재 파편 위를 뛰어다니고 있다.
돌들 위에 새겨진 문양들을 밟고 달렸다. 수천 년 전 어떤 문명이 그토록 공들여 새겼을 기호들 위를,
지금 아이들의 맨발이 아무렇지 않게 달렸다. 이것이 세월이 하는 일이다. 신성함을 일상의 바닥으로 만드는 것.
그런 행위가 신성함을 지우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문양들 위에서 울려 퍼지는 한, 돌들은 제 역할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거주민들은 빛바랜 영광을 가슴 깊이 새겨두거나 박물관처럼 보존하려 들지 않았다.
무너진 돌들이 지닌 정직한 견고함을 빌려, 오늘 마주한 고단한 하루의 삶을 묵묵하고 단단하게 지탱해 낼 뿐이다.
신화와 일상이 완벽하게 버무려진 자갈길을 걸으며, 장화 끝에 채이는 부드러운 화산재 흙을 느꼈다.
손등에 박힌 정글 가시덩굴의 붉은 상흔은 샐라임의 건조한 바람 속에서 굳은살로 변해가고 있다.
아만의 밀림이 날 선 생존의 저울 위에서 나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벼려냈다면,
이곳 타바리의 길목은 무너진 세월의 파편들을 통해
이방인의 성급한 보폭과 날카로웠던 신경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중이다.
저녁 빛이 기울며 석조 기둥들의 긴 그림자가 자갈길 위로 납작하게 드리워졌다.
그림자 안을 걸었다. 그늘이 다소 서늘하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그늘이,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서늘함을 나누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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