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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秘」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14
2100 2026.06.27. 21:16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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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5장: 신들의 성소, 타바리 - 3









사서의 기록 발췌 (메데니아 도정기, 필사본 제7권 서문 중에서)

[문서고 관리인 주석]


: 본 단락부터 시작되는 셀라임 지방 및 타바리 부락에 관한 기술은,
이전까지 일관되게 유지되던 케일런의 친필 서명 및 특유의 간결한 문장 문법과 심각한 괴리를 보인다.

기존의 기록이 개인의 감각적 경험에 의존한 종군일기의 형태였다면,
이 타바리 장의 초입은 그와 물리적·정신적 궤적을 완전히 공유했던 ‘제3의 동행자’ 혹은
그의 행로를 멀리서 관조하던 또 다른 기록자의 시선이 개입된 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잉크의 성분 분석 결과 벨테인 화산재 성분이 뒤섞인 아만 고유의 검은 진액 안료임은 동일하나ㅡ
깃펜의 촉을 깎아낸 각도가 훨씬 완만하고 필체가 오른쪽 위를 향해 급격하게 치솟는 형태로 변화했다.

이것이 오랜 여독으로 인한 케일런 본인의 심경 및 육체적 변화인지,
혹은 셀라임부터 합류한 이방의 동행자가
그의 양해를 구하고 대필한 기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타바리라는 거대한 탐욕의 기단에 들어서던 순간의 감각을
이보다 정밀하게 포착해 낸 문헌은 존재하지 않기에 원문을 그대로 수록한다.


-


: 타바리


능선이 주저앉으며 계곡의 바닥과 만나는 경계에 이르러서야,
발밑이 지탱하던 감각이 완연히 다른 고유의 밀도를 드러낸다.

노엠의 모래는 한낮의 폭양 아래서도
손가락으로 깊이 헤집으면 차디차게 식은 대지의 속살을 고스란히 숨겨두고 있었고,
화론의 진흙 벌판은 디디는 걸음마다 구두굽을 집어삼킬 듯 점착질의 악력으로 들러붙었으며ㅡ
아만의 수림은 부식된 잎사귀가 뿜어내는 점막 같은 축축함으로 발목을 덮었다.

그러나 이 능선의 끝자락은 대지의 모든 물기가 바짝 말라 있다.

정오의 열기를 온종일 몸속에 가두어둔 맨돌의 완강한 온기가 두터운 가죽을 뚫고 올라와
거친 발바닥의 굳은살을 은근하게 지졌다. 아슬론의 무거운 가마에서부터 어깨에 이고 온 오랜 여독이
이 메마른 암반의 문턱에 이르러 돌연 이질적인 무게로 변환되는 것을 방랑자는 느끼고 있다.

바람보다 먼저 도달한 것은 귀를 찌르는 마찰음. 망치 소리.

고독한 석공이 단조로운 박자로 바위를 쪼아내는 것이 아닌...
사방에서 수십 개의 철붙이가 동시에 터져 나와 서로의 박자를 방해하는 거칠고 거대한 불협화음.

쇠와 돌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내는 파찰음 사이로 정과 끌이 암반의 결을 사정없이 갉아내는
불쾌한 소음이 끼어들었고, 그 아래에는 나귀를 모는 마부들의 탁한 고함과 탐욕에 절어 있는 흥정,
그리고 삿대질이 진흙처럼 뒤섞여 흐르고 있다.

수정 동굴의 푸른 정적에 너무 오랫동안 길들어 있던 차.
대기를 무자비하게 찢고 솟구치는 이 날것의 가쁜 소음들은 마비되었던 전신의 신경을 강제로 일깨우는 동시에,
이 땅의 무엇인가 근본부터 무언가 비틀려 있다는 기척을 실어 보냈다.

바위 절벽의 끄트머리에 서서 내려다본 타바리의 정경은 소문의 잘 정립된 계획된 도시라기보다
대지가 가차 없이 찢기며 흘린 하나의 거대한 흉터에 가깝다.

사방의 메마른 평지 위로 육중한 석조 기둥들이 아무런 규칙성 없이 불쑥불쑥 솟구쳐 있다.
역사시대의 첫 장이 기록되기도 전, 인간의 언어가 기단 위에 새겨지기 전의 시대에 번성했던 선문명의 아득한 뼈대.

이끼와 마른 덩굴손들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이 완강한 돌결을 절반도 채 잠식하지 못했고,
그 덕에 거대한 석조 모서리마다 고대의 누군가가 정밀하게 깎아낸 날카로운 직선의 각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타바리의 유랑민들은 거인들이 남긴 이 신성한 기단 위에
아무런 경외심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벌목 목재들을 못 박아 넣고 있다.

고대의 거대한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에는 아직 지붕조차 올리지 못한 날림벽들이 앙상한 갈비뼈처럼 늘어섰고,
누런 가죽 천막들이 그 빈틈을 누더기처럼 조잡하게 메웠다.

채석장에서 비산한 고운 돌가루와 건조한 흙먼지가 대기 중에 두껍게 정체되어 사방에 누런 유황 막을 씌운 탓에
멀리서 바라본 타바리의 전경은 마치 서서히 부식되어가는 황동 덩어리처럼 빛바랜 형상을 띠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상식을 벗어난 광경이 이방인의 시야를 사로잡는다.

분명한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의 창틀과 천막의 버팀목마다 두껍게 덧발라놓은
정체 모를 안료들이 은은하고 탁한 빛을 사방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순수한 황금이라 부르기엔 광택이 지나치게 탁했고,
흔한 노란색이라 치부하기엔 뿜어내는 안광의 깊이가 다르다.

방랑자는 걸음을 멈추고 가장 가까운 천막 기둥에 다가가 그 기괴한 표면을 찬찬히 응시했다.

거칠게 발린 안료의 표면 아래로 수많은 작은 기포들이 숨을 쉬듯 미세하게 거품을 일으키며 꿈틀거리고 있다.
빛은 얇은 기포의 막을 뚫고 스며 나오는 중이었다. 손을 뻗어 그 빛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그어보자,
가죽 끝을 타고 전해진 것은 온기가 아닌 뜻밖의 서늘함이다.

불이 꺼진 자리의 차가움, 그리고 점성 높은 진액 특유의 끈적함이 지문 사이에 달라붙었다.
그것은 광물이 지닌 천연의 질감이 아니다.
방금 숨이 끊어진 정글 괴수의 부드러운 살갗을 만졌을 때 전해지는 불길한 감각에 가까웠다.

"손대지 않는 게 신상에 좋을 거요."

등 뒤를 찌르는 거친 가래 섞인 목소리에 방랑자는 묻어난 진액을 털어내며 손을 거두었다.
두꺼운 무쇠 가죽 앞치마를 질질 끄는 사내가 수레를 멈춰 세운 채 불쾌한 눈으로 서 있었다.

그의 억센 손가락과 팔뚝은 이미 그 노란 안료 자국으로 얼룩덜룩하게 오염되어,
마치 문둥병의 반점처럼 굳어 있었다.

"그 진액이 살가죽에 한 번 스며들면 손끝이 이레 동안은 불에 타는 듯이 가렵소.
이 가혹한 샐라임에 막 발을 들인 외지인 같은데, 호기심이 과하면 명을 갉아먹는 법이지."

"...아슬론의 가마에서부터 도정을 시작했습니다.
노엠의 황야와 화론의 석벽을 거쳐, 아만의 정글과 수정 동굴을 통과해 여기까지 도달했습니다."

사내는 짐수레의 둥근 나무 손잡이를 고쳐 잡으며
방랑자의 초라한 행색과 먼지 앉은 배낭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의 찌푸린 눈동자 속에는 이방인을 향한 고질적인 경계심과,
머나먼 남부의 이름을 들은 데서 오는 가느다란 호기심이 대등한 무게로 섞여 요동친다.

"참으로 지독하게도 긴 길을 걸어왔군.

이 노란 빛줄기가 신령스러운 유물처럼 보이나 본데, 이곳에서 평생 돌을 나르는 나 같은 인부들도
본질은 정확히 모른다오. 북쪽 채석장의 인부들이 대지 깊은 곳의 광맥을 깨부수다 발견한 지하의 진액이라더군.

불과 두번의 겨울 전까지만 해도 이 거친 타바리에는 이런 기이한 안료 따윈 존재하지 않았소.

누군가 무덤 같은 땅속 깊은 곳에서 잠자던 무언가를 억지로 건드린 다음에,
이 황금빛 고름이 갑자기 사방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거지."

사내는 잠시 말을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주변을 슬쩍 살피며 목소리를 은밀하게 낮추었다.

"이 빛을 많이 캐내고 가옥에 바를수록
다들 거상이 되고 부자가 된다며 축제를 벌이고 있지만, 내 눈에는 영 곱게 보이지 않소.

대지가 허락하지 않은 부가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과하게 쏟아져 나온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렇듯, 어디선가 그만큼의 대가와 생명력을 몰래 빌려오고 있다는 뜻 아니겠소."

냉소를 마지막으로 사내는 다시 몸을 굽혀 짐수레를 끌고 먼지 구덩이 속으로 사라졌다.
무거운 나무 바퀴가 자갈과 돌가루를 지질하게 갈아내는 마찰음이 시장의 소음 속으로 천천히 멀어졌다.

방랑자는 사내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그가 던진 ‘빌려온다’는 단어가 품은 둔중한 무게를 저울 위에 올려두었다.


-


: 황금빛 시장과 이방의 기록자


도시의 내부, 선문명의 기단들이 밀집된 심부로 발을 들일수록
사방을 에워싼 소음의 성질이 확연하게 변모했다.

귓등을 단조롭게 때리던 망치 소리와 암반을 쪼아대던 정끝의 날카로운 파찰음은 완만하게 잦아들었고,
빈자리를 메운 것은 탐욕으로 달아오른 인간들의 거친 숨결과 비명에 가까운 목청이다.

아직은 제대로 된 지붕조차 갖추지 못한 채 절반은 노점의 헝겊 천막으로,
절반은 임시로 이어 붙인 가건물로 뒤덮인 시장 거리는 욕망이 교차하는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거리의 한편에는 아만의 정글에서 갓 뜯어내어 진액이 채 마르지 않은 괴수의 가죽들과
기형적으로 뒤틀린 약초 더미가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쌓여 있었고, 맞은편 좌판에는 거울숲 깊은 곳에서 파내었다는
은제 그릇과 정교한 장신구들이 한낮의 탁한 햇살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틈새마다 덜 자란 목조 가옥의 골조 위로 매달린 인부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썩어가는 고기 위에 연고를 바르듯, 황금색 안료를 붓에 적셔 가옥의 외벽에 연신 칠해대고 있다.
타바리는 자신이 향후 어떤 형태의 도시가 될지 채 결정하기도 전에,
오직 지하에서 쏟아지는 부의 질량에 밀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방랑자는 조잡하게 가공된 은제품들이 무더기로 널린 어느 노점의 좌판 앞에서 마침내 걸음을 멈추었다.

거칠게 두들겨 만든 은잔과 투박한 팔찌, 그리고 모서리가 깨져나간 작은 인장들.
그것들의 표면에는 하나같이 가느다란 선들이 문양처럼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방랑자의 판단으로는, 분명 장식적인 목적으로 고안된 문양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륙의 오래된 명문을 목도한 적이 있는 그의 눈에는,
그것이 한때 거대하고 장엄한 문장을 이루고 있었던 고대 왕국의 무참하게 잘려 나간 단면으로 읽혔다.

"과연 안목이 보통이 아니시군."

목에 화려한 비단 천을 여러 겹 두르고,
열 손가락마다 알이 굵은 반지를 가득 끼워 부를 과시하는 상인이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대륙 상방에서 떼어온 흔해 빠진 은붙이가 아니오.
저 북동쪽 카타콤의 깊은 갱도에서 인부들이 목숨을 걸고 파낸 고대의 은이기에,
뿜어내는 안광의 깊이 자체가 다르지."

"이 은제품들의 표면에 새겨진 이 선들은 어디서 유래한 것입니까."

방랑자의 나직한 질문에 상인의 가식적인 미소가 찰나의 순간 경직되었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풀려났다. 인간의 눈이 포착하기 힘들 만큼 매끄럽고 신속한 은폐.

"그저 지하에서 돌을 캐던 광부놈들의 손재주가 거칠어 생긴 흠집이거나,
저희끼리 표식을 남기려 제멋대로 새겨 넣은 쪼개진 자국들이겠지."

상인은 커다란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차피 이대로 쓰기엔 너무 낡았으니, 화로에 통째로 녹여서 대륙 양식의 세련된 잔으로 새로 주조하면
가치가 몇 배는 뛸 것이오. 하지만 손님은 이 기괴한 원형이 마음에 드는 눈치니, 내 특별히 싼값에 넘겨드리리다."

방랑자는 상인의 상술 섞인 웅변을 듣는 대신,
좌판 너머 천막 안쪽 어두운 그늘에 놓인 작은 화로 곁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부서진 은제 식기들과
선문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신구 더미가 시체처럼 쌓여 있었다.

불꽃에 닿아 녹아내리기 직전의 깨어진 단면마다,
좌판 위의 물건들과 동일한 결의 가느다란 선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형상이나 윤곽의 파편이 아니다. 분명 특정한 서사와 기억을 담고 있던 글자들의 훼손된 사지였다.
방랑자는 더 이상의 무익한 질문을 던지지 않은 채 자리를 떴다.

시장의 긴 회랑을 가로지르며 이와 유사한 연금술 화로를 몇 개나 마주쳤는지 헤아려 보니,
눈에 밟힌 것만 하더라도 이미 다섯을 넘어서고 있었다.
타바리는 고대의 기억을 녹여 현재의 황금으로 치환하는 거대한 용광로였다.

"저 부서진 선들이 무엇을 기록하고 있었든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저 천박한 장사꾼보다는 내가 조금 더 정직한 답을 건넬 수 있을 거요."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는
시장의 번잡함이 미치지 못하는 낡은 천막의 그늘진 틈새에서 흘러나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타바리의 상인들과는 전혀 다른 기척을 풍기는 낯선 행색의 사내가 홀로 서 있었다.

그는 물건을 늘어놓을 좌판조차 없이 오직 낡은 가죽 가방 하나만을 어깨에 메고 있었으나,
그의 의복은 메데니아 대륙 어느 지방의 양식과도 부합하지 않았다.

천의 짜임은 바다 너머의 것처럼 지극히 정교했고, 마름질의 선은 엄격했으며,
어깨를 감싼 망토의 자락에는 대륙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점성술의 문양이 은실로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멀리 바다를 건너오신 분 같습니다."

"그대와 마찬가지로 마이소시아의 흙먼지를 밟고 온 자요. 나를 이스카라고 부르시오."

사내는 가방 안쪽에서 수없이 접히고 펼쳐져
모서리가 헤어진 종이 묶음을 꺼내 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글을 쓰고 서사를 수집하는 기록자요.
대륙의 도처에 묻힌 해묵은 이야기들을 *아 여기까지 흘러들었지.

그대가 좌판에서 보았던 저 잔혹한 선들은 단순한 흠집이 아니라 글자요.

다만 지금 이 거친 타바리의 인간들이 사용하는 천박한 상업 언어가 아니라,
이 위대한 기단들을 처음 세우고 대지를 다스렸던 선문명 거인들의 율법이지.

이 도시의 지배층들은 그 완전한 문장이 지닌 마력과 위험성을 군중이 알아챌까 두려워,
의도적으로 조각상을 깨부수고 글귀의 일부만을 남긴 채 은밀하게 녹여내고 있는 것이오."

"기록자께서 이 서방의 척박한 변방까지 찾아오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이스카는 잠시 시장 거리를 가득 채운 인간들의 광기 어린 소음을 둘러보더니,
방랑자의 귀를 향해 목소리의 주파를 나직하게 낮추었다.

"정복왕 루딘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대의 눈빛에 서리는 둔중한 무게감을 나 역시 삼키고 있소."

방랑자는 묵묵히 시선을 가라앉혔다.
마이소시아의 지맥을 밟아온 자치고 이 음절에 담긴 피비린내를 모르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대도 잘 알겠지만,
통일전쟁 당시 어둠의 전설 연합이었던 우리 수오미에서는 어린아이조차 그 이름 앞에 숨을 죽이지.
마이소시아의 정복왕 루딘. 한 세대라는 짧은 세월 안에 동방의 절반을 자신의 철갑 아래 무릎 꿇렸던 불패의 군주.

그가 전장마다 꽂아 넣었던 적들의 깃발을 전부 모아 한데 엮으면,
지금의 루어스 왕궁의 거대한 지붕을 세 번은 덮고도 남는다는 음유시인들의 노랫소리는 결코 과장이 아니오."

이스카는 손때가 묻은 지도 한 장을 바위 기단 위에 길게 펼쳤다.
그것은 정교한 필치로 서대륙과 동대륙의 지맥을 직조해 낸 낡은 양피지였다.

"그러나 절정의 순간에, 위대한 군주는 스스로 왕좌를 버리고 역사에서 증발했소.
그 잔혹한 결단의 내막은 왕실의 어떤 비밀 사서도 정확히 기록하지 못했지.

다만 마이소시아의 정통 군주들이 왕좌를 영원히 떠날 때, 제 몸의 일부와도 같던
한 쌍의 전설적인 귀걸이 중 하나를 벗어던지는 은밀한 의식을 치른다는 전설만이 전해질 뿐이오.

한쪽은 ‘전쟁’이라 명명되었고, 다른 한쪽은 ‘평화’라 불리지.

선문명의 율법에 이르기를, 전쟁의 귀걸이를 벗어 던지는 자리는
자신이 군마를 몰아 유린했던 영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세계의 끝이어야 한다고 정해져 있소.

자신이 촉발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원혼들이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하도록,
시공간의 심연 속에 영원히 매장하기 위함이지."

"그렇다면 그 정복자가 자신의 전쟁을 영원히 버리려 선택한 세계의 끝이,
사실은 자신이 최초로 도망쳐 나왔던 고향의 안마당이었을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그것이 내가 이 도정의 끝에서 마주하고자 하는 가장 비극적인 가설이오."

이스카는 미련 없이 지도를 접어 가죽 가방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정복자는 자신이 가장 먼 이방의 영토에 과거를 파묻었다고 믿으며 안도했겠지.
하지만 인간의 핏줄과 대지의 인력이라는 것은
지도 위에 가볍게 그어놓은 거리의 수치 따위로 감히 재단할 수 없는 법이오.

만약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가 이곳 북동쪽 카타콤 성소에 벗어던진 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닐 것이오.
자기 자신의 가장 오래된 영혼의 조각을, 태어난 자리에 도로 박아 넣은 채 스스로를 박제해 버린 셈이니까."

이윽고 이스카는 황금색 안료를 바르는 인부들의 소란스러운 인파 속으로 신기루처럼 스며들어 사라졌다.

방랑자는 한동안 머무르며, 시장의 좌판마다
산처럼 쌓여 연기를 뿜어내던 부서진 은제품들을 묵묵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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