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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秘」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16
477 2026.07.12. 00:03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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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5장: 신들의 성소, 타바리 - 5















: 케라시


관청의 그늘이 끝나는 주랑의 모퉁이를 돌아서기 전
어둠 속에 멎어 있던 시선 하나가 방랑자의 발길을 붙들었다.

높은 돌기둥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서 있던 한 젊은 사내가 인기척을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의복의 바느질과 천의 결은 방금 방랑자가 마주했던 지배자의 것에 뒤지지 않을 만큼 호사스러웠으나
좁은 어깨와 낮게 가라앉은 눈매에는 위엄 대신 오랜 불면에 시달린 듯한 피로가 짙게 고여 있었다.

"내 아버지가 던진 미끼를 결국 받아들였군."

사내의 목소리는 주랑의 메아리를 깨우지 않을 정도로 나직했다.

"케라시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방랑자가 걸음을 멈추며 묻자, 사내는 얇은 입술을 짧게 비틀어 보였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얼굴 가죽에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메마른 굴곡에 가까웠다.

사내는 대답 대신 턱 끝으로 관청 뒤편의 외진 마당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그 작은 정원 쪽으로 사내가 먼저 보폭을 옮겼고, 방랑자는 그 뒤를 따랐다.
비스듬히 들이친 저녁의 붉은 햇살이 벽면에 발린 누런 안료를 한층 더 진하고 이질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있었다.

"지금은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 그리 하시오.
나중에는 결국 다른 이름으로 불리게 될 테니까."

케라시는 흙바닥에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를 구두 끝으로 툭 차내며 말을 이었다.

"그 무덤의 인장을 가져오면 당신은 이 가혹한 샐라임에서 합법적인 백성의 권리를 얻겠지.
그리고 내 아버지는 그것을 명분 삼아 자신이 세운 위태로운 지배 체제 위에 단단한 법의 외피를 두를 것이오.

당신은 이 타바리가 하루가 다르게 부유해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소.
이곳을 찾는 모든 외지인과 상인들이 그렇게 믿으니까.

사방에 바른 저 빛나는 안료와 매일 밤 넓어지는 광장을 보면서 말이오.
하지만 정작 그 불길한 빛에서 어떤 냄새가 풍겨 나오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열어 묻지 않소."

"방금 관청 안에서 케라수라는 이름의 기원을 물었을 때, 부친의 안색이 잠시 비틀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방랑자의 말에 케라시는 붉게 물든 벽면을 응시하며 깊은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정원 너머에서 인부들의 거친 망치 소리가 서너 번 더 울리고 나서야, 사내는 한층 더 낮아진 주파수로 입을 열었다.

"그건 우리 가문이 대대로 써오던 고유한 이름이 아니오."

케라시의 시선이 지상의 흙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채석공들을 동원해 고대의 기단 아래를 처음으로 파헤치던 해였소.
인부들이 갱도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글귀가 빼곡하게 새겨진 낡은 석판 하나를 건져 올렸지.

아버지는 그 오래된 문자들을 온전히 해독하지 못했고, 그저 몇 개의 단어만을 겨우 읽어낼 수 있었소.
아버지는 그 단어들 중 가장 웅장하고 위압적인 울림을 가진 음절을 골라 제멋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삼아버렸지.

그게 ‘케라수’요. 자신이 침탈한 이 대지의 가장 오래된 언어로 스스로를 명명하면,
제 손으로 찬탈한 이 불안정한 통치 권력이 더 정당해 보일 거라 믿었던 얕은 수작이었소."

"그 석판의 글귀가 한때 무엇을 기록하고 있었는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습니까."

"이 탐욕스러운 장터에서 금전의 계산이 아닌 고대의 글자를 들여다보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소.
다만, 본질을 단 한 사람, 알고 있는 자가 있기는 하지."

케라시는 상체를 돌려 방랑자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는 붉은 노을빛을 받아 주홍색으로 깜박였다.

"북동쪽 석조건물의 가장 어두운 입구를 지키는 늙은 수문장이오.
그 노인은 우리 가문이 군사들을 몰고 와 이 거대한 선문명의 기단을 처음으로 차지하기 훨씬 전부터,
오직 무덤의 대문만을 지키며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소. 아버지마저도 그 노인의 침묵만은 함부로 깨뜨리지 못하지."

"그리고, 부친께서는 그 ‘케라수’라는 이름을 당신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줄 작정이라고 하더군요."

방랑자의 지적에 케라시의 입가에 다시 한번 메마른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이번에 서린 기색은 슬픔이나 체념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문에 흐르는 잔혹한 내력을 완벽하게 인지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냉소였다.

"내가 그 화맥수 의자에 앉게 되는 날, 지상의 모든 인간은 나를 향해 ‘케라수’라고 환호할 것이오.
그리고 그날이 오면, 내 등 뒤에 서 있게 될 내 아들이 비로소 ‘케라시’라는 껍데기를 이어받겠지.

아버지가 그렇게 율법을 정해두었소. 그것은 한 인간의 실체를 증명하는 이름이 아니라,
오직 지배하는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고안된 유령의 직함이오.

어쩌면 백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이 도정의 자취가 모두 먼지가 된 후에도
이 타바리에는 여전히 케라수가 군림하고 케라시가 그 뒤를 받치고 있을지 모르지.

각자의 가죽 속에 들어찬 인간의 실체는 흔적도 없이 썩어 잊힐지라도
그 기만적인 이름만큼은 이 돌기둥 사이에 영원히 박혀 지워지지 않도록 말이오."

사내는 정원 너머, 짙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관청의 가장 깊숙한 후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상인들의 불빛이 닿지 않는 거칠고 거뭇한 지평선이 걸려 있었다.

"매일 밤 대지가 식어갈 때면, 저 지하의 틈새로부터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들이 주랑을 타고 올라오오.
변두리의 유랑민들은 그것을 무덤에 갇힌 원혼들의 비명이라 부르고,
눈이 먼 상인들은 그저 계곡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바람 소리일 뿐이라며 귀를 막지.

아버지는 매일 밤 저 기분 나쁜 울림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황금 잔에 독한 독주를 가득 채워 폭음하듯 들이켜오. 나는 기름이 타들어 가는 등잔 밑에서 그 비참한 뒷모습을 너무도 오랫동안 지켜봐야 했소."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까."

방랑자가 나직하게 묻자, 케라시의 눈꺼풀이 가늘게 경련했다.
메마른 목소리 밑바닥에서 억눌린 감정의 파동이 얇게 새어 나왔다.

"진실을 원하오."

그는 방랑자의 낡은 옷자락을 움켜쥘 듯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두었다.

"당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그 금역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면ㅡ
부디 그분이 원하는 그 무거운 인장만을 손에 쥐고 돌아오지 말아 주시오.

어두운 구덩이 안에서 당신의 눈과 귀로 무엇을 목도하든,
그 조각들을 단 하나도 숨기지 말고 나에게도 온전히 전해주시오.

우리가 매일 밤 비명을 지우며 짓고 있는 이 거대한 이름이 과연 어떤 추악한 핏값으로 지어졌는지,
나는 눈을 감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겠소.

그 본질을 모른 채로 내 차례가 되어 그 불길한 이름을 물려받는 것은
나로서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오."


-


: 율법의 계단


다음 날 새벽, 네 사람은 짙게 깔린 안개를 헤치고 북동쪽 금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삼엄하게 늘어선 경비병 둘이 창을 교차해 막아섰으나
케라수의 인장이 찍힌 허가증을 내밀자 마지못해 창을 거두고 육중한 석조 대문을 열어주었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완연히 달라졌다.
지상의 소란스러운 돌가루와 누런 먼지 냄새는 씻은 듯 사라졌고,
깊은 우물 바닥에서나 느껴질 법한 서늘하고 묵직한 냉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아래로 어둡게 휘감겨 내려가는 긴 계단이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느껴지나."

로한이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세 걸음씩 바닥으로 내려설 때마다 어깨 위에 추를 얹는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고 있소."

방랑자는 대답하는 대신 제 가슴팍을 가만히 짚었다.
가슴이 짓눌리는 듯 들이쉬는 숨이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피로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머리 위에서부터 서서히 체중을 실어 눌러오는 듯한 압박감.

"선문명의 기술이라더군."

다인이 이끼가 낀 벽면을 투박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밀하게 깎인 암반 속에 묻혀 있는
문양들이 침입자의 발소리에 반응하듯 희미한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지맥을 인위적으로 압축하여 흐르게 만드는 장치지. 정신력이나 영혼의 힘이
고대인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가 들어서면, 폐부가 터져 피를 토하게 만드는 율법의 계단이라더군."

그렇게 세 층을 더 내려섰을 때,
벽면에 걸린 횃불의 잔잔한 불꽃 곁에 웅크려 앉아 있던 늙은 수문장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걸치고 있는 갑주는 수십 년간 손질하지 않은 듯 녹슬고 낡아 있었고
그의 눈빛은 지상의 빛을 너무 오래 ** 못해 초점을 잃은 유령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결국 네 사람이 조를 짜서 여기까지 왔군."

노인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 정도 영혼의 무게라면 이 상층부의 압박은 서로 나누어 짊어지며 통과할 수 있을 게야.
다만, 문을 열기 전에 하나만 묻지. 너희는 이 깊은 구덩이에서 무엇을 꺼내 가려고 눈을 번뜩이는 게냐."

"케라수의 명령으로 고대의 인장을 가지러 왔습니다. 하지만 장식물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방랑자가 노인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타바리의 지배자가 짊어진 ‘케라수’라는 이름의 진짜 뜻을 아십니까."

노인의 흐릿하던 눈동자가 순간 또렷한 초점을 맺으며 방랑자를 정면으로 향했다.
아주 오랫동안, 누구도 이 어둠 속에서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도굴꾼 놈이 지하에서 캐낸 석판에 그 글귀가 새겨져 있었지, 그래."

수문장이 마른 침을 삼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인 놈은 석판의 문양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으뜸가는 지배자’라는 뜻으로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지.
제 눈에 보기 좋은 대로 겉치레만 읽은 게야. 본래 그 문자는 권력을 쥔 통치자를 가리키는 영광스러운 말이 아니라네.

선문명의 언어로 ‘스스로 갚아야 할 자’를 뜻하는 비극의 낙인이지.
고대의 선조들은 이 기단 아래 묻혀 있는 존재들에게 씻을 수 없는 거대한 빚을 졌다고 믿었어.

그래서 그 업보와 책임을 대대로 대신 짊어지고 갚아나가야 할 제물 같은 후계자를 그렇게 불렀다네.
영예가 아니라 평생 내릴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진 자의 이름이지."

이야기를 듣던 다인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진짜 왕이 되는 줄 알고 그 가문 전체에 칭호로 붙여둔 것인데."

"그러니 매일 밤 지상에서 그가 그렇게 독한 술을 채워 마시는 게지."

수문장이 횃불의 붉은 불씨를 다시 응시하며 답했다.

"이름에는 뼈가 있어서, 주인이 그 뜻을 알든 모르든 평생을 쫓아다니며 숨통을 죄는 법이거든."

"이 무덤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 아래에 도대체 누가 묻혀 있는 것입니까."

수문장은 손에 쥔 낡은 창대를 만지작거리며 깊은 침묵에 잠겼다.
동굴 벽면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소리가 대여섯 번 지나간 후에야 노인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선문명의 마지막 핏줄들이 무더기로 여기 매장되었네.
다만, 정말로 그들이 마지막 후손이었는지는 나 역시 확신할 수 없다네.

아주 오래전, 이 황금 기단이 아직 무너지기 전의 시절에,
그 가문의 순결한 핏줄을 이어받은 한 여인이 돌연 고향을 떠나 동방으로 향했다는 전설이 있었지.

떠난 뒤 그녀가 어디서 무엇이 되었는지는 아무도 몰랐어.
그런데 훨씬 더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이 거친 샐라임의 길목을 통해 다시 돌아왔다네.

육신은 늙고 지쳐 바스러지기 직전이었고, 걸치고 있는 의복은 전사의 갑옷도 평민의 옷도 아닌,
마이소시아의 어떤 양식을 한 낯선 차림이었지.

그녀는 사흘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이 폐허의 돌더미 사이를 유령처럼 헤매다가
마침내 가장 깊은 지하의 문을 열고 내려갔어. 그리고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았지."

"여인의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실지요."

"이름까지는 내 귀에 닿지 않았네. 다만 그녀가 스스로 지하 심연으로 걸어 내려가던 그 밤,
이 타바리의 거대한 기단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한 번 크게 진동했지.

그날 이후로 이 무덤의 가장 깊은 성소는 안쪽에서부터 완벽하게 잠겨 버렸어.
마치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더 이상의 침탈을 막기 위해 스스로 빗장을 걸어 잠근 것처럼 말이네."

노인의 초점이 다시 멀어졌다.

"나는 그날 밤의 진동이 보물을 닫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을 제물로 바쳐 무언가의 폭주를 막아 세운 봉인의 소리였다고 믿네.

그녀는 거대한 파멸을 막기 위해 제 늙은 육신을 그 자리에 문설주로 박아 넣은 게야.

다만 저 위에서 도굴을 일삼는 눈먼 상인 놈들은
그곳이 단지 아직 열리지 않은 황금 창고라고만 믿고 침을 흘리는 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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