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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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5장: 신들의 성소, 타바리 - 6
: 핏값의 일지
수문장을 뒤로하고 계단을 내려갈수록
지상의 부유함이 남긴 흔적들은 처참한 도굴의 실상으로 변모했다.
상인들이 고용했으나 자격이 부족해 숨이 끊어진 인부들의 시체와, 침입자를
막아서다 사지가 무참히 찢겨 나간 고대 파수꾼들의 유해가 벽면을 따라 흉물스럽게 쌓여 있었다.
부패한 이들의 유독한 가스가 차가운 지하 공기와 섞여 코끝을 자극한다.
마침내 지하의 나락에 다다랐을 때
사방의 벽면은 거대한 수정 동굴의 연장선처럼 푸른 광물들로 뒤덮여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찬란함의 사이사이로, 상인들이 강제로 마력을 짜내기 위해 기계를 박아 넣었던 구멍마다
거뭇하고 끈적한 유황 액이 마치 핏자국처럼 줄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부정한 진액의 냄새를 맡고 어둠 속에서 기형적인 괴수들이 스멀스멀 일어섰다.
그것들의 형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무덤의 파수꾼들은 자신들을 마주한 사내들의
영혼의 무게를 가늠하여 자신의 뼈와 가죽을 스스로 더 거대하고 단단하게 부풀려 나갔다.
가장 먼저 어둠을 가른 것은 사야가 당긴 시위.
시위를 떠난 화살이 괴수의 안구를 관통하자,
다인의 육중한 채석 망치가 공기를 가르며 대가리를 부수어 나갔다.
로한은 묵묵히 흉터 입은 팔로 거대한 방패를 지탱하며 괴수들의 날카로운 발톱을 정면으로 막아섰고,
방랑자는 단단한 결속의 틈새를 파고들어 검날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
전투의 끝은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파수꾼이 바닥으로 무너지며 흘려보낸 것은 붉은 혈액이 아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깊은 구덩이 속에서 짓눌려 썩어 가던 흙빛 진액이 고름처럼 쏟아져 나왔다.
전투의 열기가 가라앉은 잔해의 구석에서
바닥을 살피던 사야가 검게 그을린 가죽 뭉치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도굴꾼들의 유해 곁에 떨어져 있던 가죽 일지.
절반은 날카로운 발톱에 찢겨 나갔고 나머지 절반은 유황 불꽃에 검게 타버린 상태였는데,
안에는 전혀 다른 두 필체가 섞여 기록되어 있었다.
하나는 다급함에 쫓겨 거칠고 삐뚤어지게 눌러쓴 상인의 글씨였고
다른 하나는 깃펜의 촉을 예리하게 깎아 정교하게 써 내려간 루어스의 문자였다.
석공 다인이 손등의 돌가루를 털어내며 거칠고 급하게 적힌 첫 번째 페이지를 먼저 읽어 내려갔다.
"…선문명의 기단을 깎아 지상의 가옥을 세운다… 다들 황금 이끼가 광맥에서 솟아나는 줄 알지만 그것은 기만이다…
이 무덤 깊은 곳에 짓눌려 있는 핏줄들의 마지막 숨을 기계로 짜내야만 안료가 지상으로 솟구친다…"
다인은 다음 줄을 읽다가 돌연 손을 멈추었다.
거칠게 이어진 문장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글귀를 보며, 그는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다인, 왜 멈추는 거요? 뒤에 뭐가 더 적혀 있소?"
로한이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다인은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쉬며 일지의 책장을 넘겼다.
"내 손으로 쌓은 벽이 가린 게 뭔지 이제 알겠군. 이 글귀의 끝에는 인부들의 피가
어떻게 안료의 빛을 더 짙게 만드는지 적혀 있소. 소리 내어 읽기조차 끔찍한 짓이지."
다인은 일지를 방랑자의 앞으로 내밀었다.
정교한 루어스 황실의 필체로 적힌 페이지.
방랑자는 부츠 밑으로 전해오는 차가운 냉기를 견디며
늙은 정복왕 루딘이 직접 남긴 참회의 한 구절을 나직하게 읽어 내려갔다.
"…통일이라는 대업의 허무함과 전란의 피비린내를 짊어진 채,
왕관을 버리고 이 세계의 끝까지 와서야 모든 진실을 알았다.
저 여인이 제 손으로 선문명의 핏줄을 끊고 숨어들기 위해 선택한 자리가 가장 먼 이방의 땅이 아니라,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가장 오래된 고향의 자궁이었음을…
대륙의 빚을 갚기 위한 나의 방랑과 추적은 이 어두운 지하에서 끝이 난다.
더 깊은 성소의 문턱으로 내려가 그녀가 남긴 흔적과 내 전란의 기억을 함께 봉인한다면,
나 역시 결코 살아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글씨는 고백을 끝으로 잉크 자국을 길게 남긴 채 끊겨 있었다.
뒤를 이어 문장을 이어 나간 손길은 없었다.
사야가 부서진 활시위를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기록자 이스카의 서사 이전에
왕관을 버린 정복왕이 직접 이곳에 당도해 여인의 자취를 봉인했던 거군요."
방랑자가 가죽 일지를 덮으며 나직한 어조로 사야의 말을 받았다.
"그는 침략자로 온 게 아니야. 제 손에 묻은 피를 씻기 위해 방랑하다가
이 신들의 정원에서 선문명의 여인을 마주하고 참회의 봉인을 함께 남긴 거지.
그리고 성소 앞 석판에 고대어로 ‘케라수’라는 낙인을 새겨둔 거야."
로한이 다인의 곁으로 다가와 낡은 일지의 표지를 거칠게 젖혔다.
"왕의 참회록 같은 건 내 알 바 아니오. 중요한 건 그 지상의 가짜 케라수가 원하는 인장이 어디 있느냐는 거지.
다인, 그 상인 놈이 남긴 글 끝에 문을 열 방법은 없었소?"
다인이 떨리는 손가락으로 거친 글씨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켰다.
성소의 문을 열기 위한 주술적 규칙이 그곳에 새겨져 있었다.
"여기 적혀 있소. 하나의 영혼으로는 문을 밀어낼 수 없다고.
최소 네 명의 결속된 마력이 동시에 고대 기단에 닿아야만, 비극의 성소로 향하는 마지막 석문이 열린다고 말이오.
우리가 왜 함께 여기까지 밀려왔인지, 이제야 대지가 답을 주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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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소의 문턱
지하의 끝, 막다른 단층에서 넷을 가로막은 것은 암반이 아니다.
균형을 유지한 채 굳어 있는 회색 석문은 위에서 칠해진 황금 안료조차 스며들지 못할 정도로 촘촘하게 맞물려 있었다.
거대한 돌 표면에는 마치 진흙을 손으로 누른 것처럼 깊게 파인 네 개의 손바닥 자국이 새겨져 있다.
"아주 오래된 잠금장치요."
로한이 방패를 고쳐 잡으며 석문의 투박한 질감을 손등으로 쓸어내렸다.
"도굴꾼과 상인들이 기계를 동원하고 쇠지레를 박아 넣어도 끄떡없던 이유가 여기 있었군.
이건 빗장으로 닫힌 게 아니오. 단 한 사람의 영혼이 가진 무게로는 결코 저 저울의 평형을 맞출 수 없게 설계된 거요."
사야가 활을 내려놓고 가장 왼쪽의 홈에 손을 밀어 넣었다.
"므나가 했던 말이 맞았군요. 넷이면 영혼의 무게를 나눠 짊어질 수 있다고 했던 거요.
그 노인은 이 자국이 뭘 뜻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넷은 묵묵히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자국에 손바닥을 밀착시켰다.
방랑자가 먼저 숨을 가라앉히며 제 안의 흐름을 끌어올렸다.
뒤이어 석공 다인의 거친 손바닥이, 사냥꾼 사야의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그리고 로한의 흉터 가득한 팔뚝이 차례로 기단에 닿았다.
네 개의 서로 다른 삶이 흘려보낸 흐름이 동시에 석문의 중심부로 모여들자
발밑의 암반에서부터 길고 둔탁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석문이 좌우로 천천히 갈라지며 틈을 열었다.
그 열린 틈새 사이로 번져 나온 바람은 차갑다기보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밀폐된 방에 갇혀 있던 기나긴 숨과 같은 눅눅한 냄새를 풍겼다.
지상의 시장에서 맡았던 갓 바른 안료의 비릿함과는 다른,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린 기억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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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딘
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모닥불 곁이나 시장 거리에서 흐르던 시간의 결이 둔중하게 꺾이는 기척이 났다.
사방의 석벽에는 규칙적인 형태의 거대한 유리 모래시계가 걸려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푸른빛을 내는 모래들이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해 거꾸로 솟구치며 시간을 거스르고 있었다.
다인이 제 손목을 무겁게 흔들며 투덜거렸다.
"여기 들어온 순간부터 몸의 시계가 이상하게 움직이는군.
우리에게 지상과 같은 호흡은 허락되지 않을 모양이오. 저 푸른 모래가 다 차오르기 전에 서둘러야겠어."
성소의 중심.
융기된 제단 위에는 아무런 육신도, 조각상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비어 있는 고대의 사슬틀과,
그 중심에서 뿜어 나오는 압도적인 잔류 마력의 파동뿐이었다.
이곳은 과거 선문명인들이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며 지맥의 순수한 생명력을 길어 올리던 신성한 원천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상의 상인들이 박아 넣은 도굴용 기계 장치들에 의해 사정없이 찢겨,
푸른 마력 결정이 고름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사슬이 묶여 있던 텅 빈 제단의 중앙, 그 결정화된 마력의 한복판에 기이한 유물 한 점이 부유하듯 박혀 있었다.
낡고 거무스름한 황동 귀걸이 한 쪽.
조잡한 시장의 은붙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루어스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유물.
반대쪽 귀걸이가 있어야 할 자리의 사슬에
오래전 누군가 힘으로 뜯어내며 남긴 거친 마찰 흔적만이 긁힌 자국으로 남아 있었다.
"시체도, 무덤도 아니었군."
로한이 텅 빈 제단을 허탈하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복왕은 이곳에 묻힌 게 아니오. 그저 잠시 이곳을 지나쳤을 뿐이지.
수문장의 말대로 사흘 동안 이 폐허를 헤매다 가장 깊은 이곳에 도달해ㅡ
자신이 평생을 군마처럼 부리던 전란의 서사를 이 신들의 정원에 매장하고 떠난 거요."
그때 제단을 감싸고 있던 푸른 결정의 안개가 뭉쳐지며 거대한 환영이 일어섰다.
루딘이 백 년 전 이곳에 제 옷자락을 남기며 분리해 두고 간 고통스러운 사념의 파편이자,
무덤의 수호자.
그 거대한 형태가 허공을 가르며 움직일 때, 넷에게 전해진 것은 살의나 분노가 아니었다.
밤마다 주랑을 타고 올라와 케라수의 황금 잔을 뒤흔들던, 지독하고 둔중한 슬픔의 파동.
넷은 무기를 쥔 손귀를 바짝 쥐며 슬픔의 덩어리와 맞섰다.
사야가 당긴 사냥용 활의 시위가 환영의 어깨를 깊숙이 뚫었고,
로한은 한쪽 팔의 흉터가 터져 나가는 것을 개의치 않은 채 거대한 방패로 수호자의 무거운 발을 땅에 묶었으며,
다인의 거친 채석 망치가 마지막 균열을 향해 대지 자체를 때리듯 내리쳤다.
환영이 바스러지며 흩어진 서늘한 빛줄기 속에서
마침내 제단 위에 남겨진 마지막 흔적들이 온전히 드러났다.
백 년의 세월 동안 지상의 케라수 가문이 인부들의 목소리를 도려내가며
어떻게든 이 제단에서 무언가를 더 뜯어가려 시도했던 난폭한 흔적들이 텅 빈 사슬 주변에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방랑자는 홀로 떠 있는 귀걸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 끝이 귀걸이의 낡은 황동 표면에 닿기 직전 짧은 경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기록자 이스카의 서사가 비로소 완성되는군."
방랑자가 귀걸이의 정교한 문양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마이소시아 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한 직후,
그 찬란한 왕관을 스스로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났던 정복왕 루딘.
왕이 전란의 피비린내에 환염을 느끼고 홀로 대륙의 끝을 방랑하다 마주친 이가
바로 이 신들의 정원을 지키던 선문명의 마지막 여인이었소.
루딘은 그녀의 핏줄과 이 기단 아래 새겨진 참회의 석판을 읽고 고대의 언어로 ‘케라수’,
즉 스스로 빚을 갚아야 할 자라는 칭호를 헌정했지.
자신이 대륙에 저지른 죄를 이 땅과 여인에게 대신 갚겠다는 침통한 낙인이었던 거요.
저 위 지상의 케라수가 그토록 원하던 법통의 인장이라는 게,
결국 루딘이 여인의 흔적을 따라와 그녀가 버리고자 했던 황동 귀걸이 한 쪽과
자신의 전란의 기억을 이 신들의 정원에 영원히 파묻어두고 간 저주받은 참회의 증거였던 거요.”"
"아만에서 전해지던 전설이 맞았군.
그 여인이 차마 버리지 못하고 제 태생의 자리에 도로 묻으려 했던 마지막 한 조각을,
왕관을 버린 정복자가 여기까지 찾아와 기어이 무덤 깊은 곳에 함께 봉인해 버린 것이오."
사야가 활대를 짚은 채 답했다.
방랑자는 마침내 손가락을 귀걸이 표면에 대었다.
차가우나 차갑지 않은 마력 결정.
기이할 정도로 미적지근한 온도를 품고 있다.
막 전장에서 돌아온 군마의 등허리처럼,
혹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인간의 목덜미처럼 희미한 미열이 손마디를 타고 전해졌다.
이 온도를 따라,
짧은 순간 방랑자의 머릿속으로 시공간을 알 수 없는 풍경들이 폭포처럼 밀려들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운 군대들의 처절한 함성, 흙먼지 속에서 무릎을 꿇으며 검을 바치던 적장들의 무수한 그림자,
그리고 영광의 정점에서 정복자가 마주해야 했던 지독한 적막과 회의.
뮤레칸의 마흔여덟 시간을 견디면 영혼이 극도로 벼려진다던 동방의 오래된 전설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벼려짐의 대가가 무엇인지, 방랑자는 단 한 번의 접촉만으로도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유물은 착용자에게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백 년 동안 이 어둠 속에 축적된 전쟁의 저주와 살육의 기억을 그대로 빌려주는 장치에 불과했다.
지상의 케라수가 이 힘을 빌려 왕의 법통을 세운다면
그 왕조는 이 무덤의 비명 위에 세워진 위태로운 탑이 될 것이 자명했다.
방랑자는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그걸 그냥 두고 갈 생각인가, 케일런."
다인이 제 손등에 묻은 돌가루를 털어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탐욕이 아닌
이 거대한 비극을 이 자리에 그대로 방치해도 좋은가에 대한 석공으로서의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이건 지상의 왕관을 장식할 유물이 아니오."
방랑자가 배낭을 다시 고쳐 메며 답했다.
"이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잔상일 뿐이오.
저 위에서 독주를 마시는 사내에게 건넬 명분이 아니란 뜻이지."
벽면의 모래시계 속 푸른 모래가 거의 다 차올라 성소의 천장이 다시금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다 됐소. 문이 닫히기 전에 이 구덩이를 빠져나가야 하오."
로한이 방패로 석문 쪽을 가리키며 넷의 걸음을 재촉했다.
네 사람은 제단에서 천천히 물러섰다.
마지막 빗장이 닫히기 직전,
방랑자는 어두워지는 석문 틈새로 텅 빈 제단과 홀로 남겨진 황동 귀걸이를 돌아보았다.
가장 먼 곳에 버렸다고 믿었던 자신의 가장 추악한 전쟁이,
실은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가장 오래된 기단의 자궁으로 돌아와 버린 그 비극의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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