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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秘」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18
4440 2026.07.26. 17:05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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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5장: 신들의 성소, 타바리 - 7

















: 지상으로


성소의 마지막 석문이 과중한 음향을 남기며 닫히는 순간
넷은 최심층의 차가운 바닥 위로 튕겨 나오듯 서 있었다.

석문이 마찰하며 뱉어낸 돌가루가 안개처럼 사방으로 자욱하게 흩어졌다.

지상으로 되돌아가는 수직의 계단을 오르는 동안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계단을 한 층씩 북돋아 올라갈 때마다, 지하 나락에서 온몸을 죄어오던 마력의 압박은 거짓말처럼 희미해졌으나
반대로 어딘가에 얹힌 침묵의 질량은 외려 무겁게 부풀어 올랐다.

계단 벽면에 박힌 고대 광석들이 침입자들의 지친 등 뒤로
마지막 희미한 푸른빛을 뿌리다 이내 어둠 속으로 꺼져갔다.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수문 노인은 횃불을 켜둔 채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넷의 빈손과 눈빛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그저 창대를 바닥에 나직하게 찍어 올리며 어두운 길을 비춰주었을 뿐이다.

정적의 길을 지나 마침내 선문명의 거대한 문패를 빠져나왔을 때
광장 사방을 메운 회반죽의 건조한 돌가루와 장터 특유의 누런 황금 안료 냄새가 콧속을 강렬하게 찔렀다.

바닥의 이끼 냄새에 익숙해져 있던 감각이
지상의 비릿하고 타는 듯한 먼지 바람을 마주하자 목구멍이 컥컥 막혀왔다.
머리 위로 비스듬히 들이치는 한낮의 볕은 지나치게 밝아 외려 눈꺼풀을 아프게 자극했다.

수천 명의 유랑민과 거상들이 탐욕을 덧칠하며 기지개를 켜는 타바리의 풍요로운 전경이
방금 빠져나온 나락의 핏빛 잔해와 이질적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관청 벽면에 황금빛 안료를 새로 바르기 위해 거친 붓질을 해대고 있었고,
그 안료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붉은 흙먼지가 달라붙어 흉물스러운 핏빛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붓질 아래서 인부 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땀을 훔쳐냈으나아무도 그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방랑자는 흩어지는 사지통을 추스르며 빈손으로 관청의 거대한 화맥수 문을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겼다.
단단한 석판 바닥을 짓밟는 신창 소리가 주랑의 그늘 속으로 울려 퍼진다.

석조 기둥 아래, 거대한 통나무 의자에 매몰되듯 앉아 있던 케라수는
방랑자 무리가 다가오자 움켜쥐고 있던 황금 잔을 바닥으로 툭 내려놓았다.

잔이 돌바닥을 구르며 안에 남아 있던 독한 술이 붉은 핏자국처럼 번져 나갔다.

사내의 안면은 여전히 제왕의 겉치레로 경직되어 있었으나
손가락은 미세한 지동에 반응하듯 의자 팔걸이를 바짝 문질러 대고 있었다.

가죽 장갑을 낀 사내의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지렁이처럼 불거져 나왔다.

그자의 눈빛은 무덤 속의 보물을 기다리는 탐욕스러운 거상의 그것이었으나
거죽 밑바닥에서는 오랫동안 가둬둔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살아서 돌아왔군."

케라수의 목소리가 높은 석조 천장을 되받아쳤다.
울림에는 지배자로서의 위엄보다는, 바닥 모를 어둠 속에서 자신을 향해 기어 나올
무언가를 기다리던 노인의 조바심이 더 깊게 깔려 있었다.

"무덤의 깊은 나락에서 내 지배를 완성할 인장을 건져 왔느냐.
그 오만한 유물이 마침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냐."

방랑자는 제 주머니나 배낭으로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 어떤 가짜 증거도, 석판의 조각조차 내밀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지배자의 안면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상의 안료빛이 아닌, 지하 성소의 서늘하고 정직한 어둠이 짙게 고여 있었다.

"인장은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방랑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관청의 정적을 가르고 기둥 사이를 메아리쳤다.
케라수의 얼굴이 순간 무섭게 일그러졌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경련했고, 얇은 입술이 뒤틀리며 이빨이 드러났다.

"그리고 지상에 세운 이 왕조의 뼈대가 된 그 이름에 대해 한 말씀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케라수’라는 이름의 본래 뜻을, 그대는 이제라도 제대로 아셔야 합니다."

케라수의 팔걸이를 움켜쥔 손가락에 바짝 힘이 들어가며 마디마디 핏기가 싹 가셨다.
사내는 마치 뜨거운 불길에 손을 덴 사람처럼 상체를 꺾으며 소리쳤다.

"네놈이 지금 나를 놀리는 게냐! 인장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와 감히 내 이름과
왕권의 칭호를 입에 올리려 드느냐! 저 아래서 도굴꾼들의 시체를 몇 개 보았다고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수문장이 석판의 문맥을 일러주었습니다. 그 문자는 이 대지의 왕을 뜻하는 ‘으뜸가는 자’가 아닙니다.
선문명의 언어로 ‘스스로 갚아야 할 자’, 즉 피비린내 나는 빚을 대대로 짊어진 제물을 가리키는 비극의 낙인입니다."

방랑자는 한 걸음 더 다가가며, 케라수가 바닥에 떨어뜨린 황금잔의 잔해와 기단 아래로 스며드는
독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구두 끝에 닿은 술은 지상의 먼지와 엉켜 검고 축축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그 지하 깊은 곳, 신들의 정원에 박혀 있는 것은 왕권의 인장이 아니라
백 년 전 정복왕 루딘과 선문명의 여인이 파묻고 간 참회의 귀걸이였습니다.

당신이 이 기단 아래 짓눌려 있는 고대 핏줄들의 숨통을 기계로 짜내며
매일 밤 마시는 그 독주가 무엇인지 이제야 밝혀진 셈입니다. 갚아야 할 빚의 이자를 짜내어
지상에 황금빛 안료로 바르면서, 그 핏값 위에 앉아 왕이라 칭하는 것이 과연 '왕'이 원하던 거룩한 법통입니까."

순간, 관청을 지배하던 지배자의 위엄이 산산이 바스러졌다.
절벽처럼 넓던 사내의 어깨가 볼품없이 위축되었고,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 가장자리가 뒤틀리며
아래 감춰져 있던, 두려움과 기만에 짓눌린 한 늙은 사내의 바닥이 무참하게 폭로되었다.

호사스러운 비단 의복조차 사내의 떨리는 상체를 더 이상 품위 있게 감싸지 못했다.

사내는 제 손으로 기단을 파헤치며 수많은 인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지난 세월을 생각하는 듯,
허공을 향해 뻗었던 손을 달덜 떨며 입을 벌렸다.
그러나 목구멍에서는 명확한 언어가 되어 나오지 못하고, 오래된 기침 소리 같은 파찰음만 새어 나왔다.

"네놈이… 인장을 가져오지도 않고 이 자리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혀를 놀리느냐!"

케라수는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켰으나 이내 허공을 움켜쥔 제 손가락을 보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인장이라는 욕망의 실체가 결국 자신이 매일 밤 독주로 외면해 온 죄악의 증거였음을 직면한 사내의 눈동자는,
서산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짐승처럼 흉흉하고 비참하게 흔들렸다.

사내는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지배의 성벽이 단 한 줄의 고대 문자에 의해 허물어지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

관청 주랑을 받치고 있던 기둥들이 마치 비틀거리는 듯했고
그 위로 바른 황금빛 안료가 고름처럼 스멀스멀 흘러내려 사내의 비단 구두를 적시는 듯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케라수는 수치심과 두려움에 짓눌린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목핏대가 보라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인장을 가져오지 못했으니 이 땅의 백성으로 인정받을 권리 따위는 없다!
허락증도, 명부의 기록도 모두 무효다! 당장 이 도시에서 떠나라.
만약 그 지하의 일에 대해, 그 이름의 출처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지상에 발설한다면
네놈의 목을 이 기단 위에 걸어둘 것이다!"

방랑자는 더 이상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돌아서서 석문을 나섰다.

백성의 권리 따위는 처**터 이 기만적인 도시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발걸음에는 한 점의 미련도, 망설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상의 법통이란 결국 저 늙은 지배자가 매일 밤 마시는 독주처럼 덧없는 환영에 불과했다.

주랑의 그늘진 기둥 뒤편, 안료가 얼룩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케라시가 기다렸다는 듯 걸어나왔다.

사내의 표정은 아침보다 한층 더 핏기가 빠져 완연한 잿빛을 띠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불길한 연기를 걷어낸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사내의 가슴팍은 억눌린 숨으로 가늘게 경련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 기둥 뒤에 서서 아버지의 비명과 방랑자의 나직한 일갈을 모두 듣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안에서 부친의 고함 소리를 들었소.
인장을 두고 왔단 말도, 이 도시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것도."

케라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도, 방랑자를 향한 비난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오랫동안 도망쳐 온 진실과 마침내 정면으로 부딪힌 자의 침통함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사내는 제 화려한 소매 끝단을 가만히 쥐어뜯었다.
소매 밑단에도 지상에서 발라둔 누런 안료 가루가 묻어 있다.

방랑자는 배낭 안쪽에 차분히 넣어두었던 가죽 일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상인의 거친 필체와 루어스의 정교한 기호가 엉켜 있는, 타바리의 도굴 기록이었다.

표지의 검은 유황 그을음이 케라시의 화려한 의복 소매를 더럽혔으나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케라시는 떨리는 손으로 일지를 받아 들고, 붉게 물든 노을빛 아래서 한 장씩 책장을 넘겼다.

자신의 가문이 짓밟고 선 뼈대의 실체가
지상에 바른 황금 안료의 비참한 구원자가 사내의 눈동자 속에서 처참하게 해체되고 있었다.

첫 페이지를 넘길 때 사내의 손가락은 사시나무 떨듯 떨렸으나
절반을 넘어 루딘의 필체가 시작되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는 외려 서서히 떨림을 멈추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정체 모를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자 비로소 가슴속의 불길한 연기가 걷히는 듯했다.

"‘갚아야 할 자’라……"

케라시는 오랜 침묵 끝에 손가락으로 거친 필체의 끝동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바람이 주랑을 타고 들어와 그의 일지 책장을 가볍게 넘겼다.

"그렇다면 나는, 평생 그 추악한 빚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가해자의 자식으로 살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제라도 그 핏값을 대신 갚아나가야 하는 제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가 정해둔 이 이름의 굴레 속에서 나는 도대체 어떤 얼굴로 서 있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은 후계자인 당신이 직접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방랑자가 지상의 자갈길을 밟으며 답했다.
돌가루가 서걱거리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얇게 갈랐다.

"이름은 부친에게서 물려받는 것이지만, 그 이름의 껍데기를 쓰고 어떤 걸음을 걸을지는
누구도 대신 결정해 주지 않으니까요. 저 지하에 봉인된 자들도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제 짐을 지고 걸었을 뿐입니다."

케라시는 일지를 가슴팍 깊숙이 품어 넣었다.
의복의 호사스러운 천 사이로 가죽의 둔탁하고 차가운 질감이 사내의 갈비뼈를 죄어왔다.

그것은 권력의 증표가 아닌, 평생 내릴 수 없는 형벌의 무게였다. 사내는 가슴을 움켜쥐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몸속으로 들어오는 지상의 먼지 바람이 이전보다 한층 더 씁쓸하고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 비극의 기록으로 지상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지는 나 역시 알지 못하오.
내가 당장 관청의 안료를 긁어내거나 아버지의 의자를 부수지는 못하겠지. 하지만 적어도……
매일 밤 지하의 비명을 독주로 가리며 살아가던 부친처럼, 눈을 감은 채 그 불길한 의자를 향해 걸어가지는 않을 거요."

사내가 고개를 들어 방랑자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동자 속에서 마침내 왕자의 껍데기가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성소의 나락에서…… 그녀의 흔적을 보았소?"

"보았습니다."

"아직 그 어둠 속에서 살아있소?"

"제단 중앙에는 그 어떤 육신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백 년 전 늙은 정복왕 루딘이 여인의 자취를 따라와 전란의 기억과 함께 봉인해 둔
황동 귀걸이 한 쪽이 홀로 떠 있더군요. 숨을 쉬고 있던 것은 유물이 아니라,
그들이 그 자리에 파묻고 간 참회의 무게였습니다."

케라시는 방랑자의 말을 가만히 음미하듯 오랫동안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그의 손끝이 가슴팍에 품은 일지의 가장자리를 자조적으로 문질렀다.

"장터 그늘에 이스카라는 기록자가 머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그를 찾아가 대륙의 서사와 이 도시가 진 진짜 빚의 전말을 온전히 들어야겠소.

다음 번에 이 잔혹한 이름을 짊어질 자라면,
적어도 자신이 딛고 선 땅 밑에 얼마나 많은 원혼이 짓눌려 있는지 알아야 할 테니 말이오.
고맙소, 나를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게 해주어서."

케라시는 깊게 고개를 숙인 뒤, 관청의 어두운 후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저녁 노을이 기나긴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림자는 지상의 황금빛 안료보다 훨씬 더 길고 어두웠으나
사내의 걸음걸이는 아침처럼 비틀거리지 않고 곧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새벽, 푸르스름한 여명이 타바리의 지평선을 천천히 밝혀올 때.
성소 원정대들은 마을 외곽의 무너진 화덕 곁에 다시 모였다.

새벽안개가 지상의 누런 먼지를 눌러앉히고 있었다.
변두리의 늙은 여인 므나가 짚으로 엮은 보따리 하나를 방랑자의 등짐 옆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마른 빵 몇 덩이와 아만 정글의 그늘에서 말린 쌉싸름한 찻잎이었다.

"북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사흘 동안 자갈길을 걸으면 지상의 먼지가 씻겨 나가는 푸른 밀림이 시작될 게야."

므나가 녹슬어 가는 가죽 장갑을 어루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노인의 손가락 마디는 오랜 노역으로 굵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깊은 숲 안쪽에 고대 엘프들이 뿌리를 내리고 사는 파노 마을이 있다고 들었지.
장사꾼들의 말로는 거기 사는 자들은 지상의 빚이나 핏값 같은 건 전혀 모르고 살아간다더군.
적어도 돌더미 위에 안료를 바르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네."

"세상 어느 곳이든 태어난 이상 빚이 없는 땅은 없을 겁니다."

방랑자가 배낭의 가죽 끈을 단단히 죔질하며 답했다.
배낭 속의 마른 빵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와 섞여 퍼졌다.

"다만 그 빚을 욕망의 안료로 바를 것인지,
참회의 기도로 짊어질 것인지 그 눈이 다르기를 바랄 뿐이지요."

석공 다인은 끝내 타바리를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제 손등에 박힌 정 자국과 돌가루를 털어내며, 다인이 거친 채석 망치를 어깨에 무겁게 얹었다.

"누군가는 이 부정한 도시에 남아 저 누렇게 칠해진 벽들을 계속 감시해야 하오.
내 손으로 이미 쌓아 올린 가옥들을 당장 허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음에 돌을 얹으려는 젊은 석공들에게는 저 안료 밑에 무엇이 매장되어 있는지 똑똑히 일러줄 수 있을 테니까.
내 망치는 이제 건물을 짓는 게 아니라, 저 거짓된 벽을 두드리는 데 쓰일 거요."

사냥꾼 사야와 방패를 든 로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야는 활시위를 새로 가다듬고 있었고, 로한은 흉터 입은 팔로 방패의 가죽 끈을 단단히 조였다.

타바리의 기단 아래서 시작된 그들의 싸움은 아직 지상에서 완결되지 않았고,
케라시라는 젊은 후계자가 도시의 빚을 마주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그들의 새로운 궤적이 되었다.

그들은 이 비극의 도시에 남아 각자의 방식으로 성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기로 한 것이다.

로한은 무뚝뚝하게 제 방패를 한번 두드렸고, 사야는 가만히 눈인사를 내밀었다.
말을 아끼는 전사들의 작별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직 방랑자만이 추방자의 신분으로 홀로 짐을 다시 꾸려 길을 나섰다.

짧은 작별의 눈빛을 나누고 광장을 가로질러 마을 어귀로 향했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각, 가옥들의 창틀에 발려진 황금 안료는 햇빛을 받지 못해
짙고 불쾌한 부패의 살빛을 띄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무덤의 비석처럼 오싹하게 고요했다.

이 불길한 빛을 등지고 걸으며, 방랑자는 품속의 빈 주머니를 손끝으로 살그머니 눌러보았다.

성소의 제단 위에 그대로 두고 온 황동 귀걸이. 제 손에 쥐어지지 않은 유물의 부재가,
오히려 품속의 그 어떤 소지품보다 더 뚜렷하고 둔중한 질량으로 방랑자의 가슴팍을 눌러오고 있었다.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비로소 완벽하게 짊어질 수 있게 된 빚의 무게.

마을의 경계를 벗어나는 지점, 흙먼지에 반쯤 파묻힌 선문명의 비스듬한 돌기둥 하나가 길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도굴꾼 상인들이 좌판에서 팔아치우던 잘려 나간 문양들과 달리
그 돌기둥의 측면에는 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손상되지 않은 고대의 문장 하나가 예리하게 새겨져 있었다.

방랑자는 이방의 문자를 읽어낼 수는 없었으나, 장갑을 벗고 더러워진 손가락 끝으로 그 깊은 굴곡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거친 돌의 질감이 손끝을 오싹하게 자극했다. 어쩌면 이 문장은, 백 년 전 한 여인이
제 가문의 혈통과 전란의 기억을 이 신들의 정원에 파묻으며 마지막으로 남긴 고독한 수긍이었을지도 몰랐다.
혹은 정복왕 루딘이 왕관을 버리고 이 대지의 자궁에 당도해 읊조렸던,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참회의 인사였을지도.

등 뒤에서 타바리의 아침이 깨어나는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솟구쳤다.

망치로 돌을 깨는 소리, 거상들이 좌판을 넓히는 소리, 외지인들의 목숨값을 두고 흥정하는 소리,
그리고 관청 뒤편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희미한 비명 소리.

모든 욕망의 소란함이 점점 멀어지는 동안에도 방랑자의 보폭은 단 한 번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덧칠해진 안료 너머, 지하 성소의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나던 황동의 잔상이 영혼의 이정표로서
그의 발걸음을 묵묵히 인도하고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의 여명, 메마른 사막과 자갈길이 끝나고 목재들의 축축한 이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기 시작했다.
대기의 결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울창한 수목의 초입에 다다랐을 때,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아침 햇살이 가느다란 원형의 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타바리의 거리에 바쳐지던 조잡한 황금빛이 아니다. 한층 더 맑고,
지맥의 생명력을 온전히 머금은 푸른빛의 결이다.

세상의 빚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빛이 존재한다면 필시 이러할 것이라 생각하며,
방랑자의 부츠가 다시 한 번 숲의 깊은 흙 위로 내딛었다. 축축한 이끼가 그의 발걸음을 부드럽게 받쳐주었다.

엘프들의 숨결이 숨어 있는 파노 마을의 짙은 나무 그늘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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