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게임실행 및 홈페이지 이용을 위해 로그인 해주세요.

시인의 마을 세오
「秘」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19
855 2026.08.02. 22:59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


[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6장: 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1
















: 중간숲


타바리의 건조한 회반죽 먼지가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북서쪽으로 여섯번의 낮과 밤을 걸어 이름 없는 암반 고갯길을 넘어섰을 무렵이다.

부츠 밑에서 서걱거리던 황금 안료 가루는 비에 씻긴 듯 사라졌고 바닥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검고 축축한 부엽토의 결을 띠기 시작한다. 수풀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궁 주변을 떠돌던 유황 냄새나 돈줄을 *는 유랑민들의 땀 냄새는 온데간데없고,
오직 오래된 목재가 썩어 들며 배출하는 검은 흙의 냉기만이 깊숙이 스며든다.

첫 번째 야영지에 도달했을 때, 숲의 기류는 도시와 다르게 꺾여 있다.

숲의 초입에는 누군가 아주 오랫동안 묵어가며 세월을 얹은 듯한
투박한 린넨 천막 두 채가 바위 틈새에 비스듬히 오롯이 매몰되어 있다.

빗물에 쓸려 내리고 바람에 가풀막진 천막들은
이제 막사를 지탱한다기보다 대지가 핥아 삼키는 과정에 가까워 보인다.

바닥에 놓인 낮은 제단과 나란히 모로 누운 고목의 그루터기 주변으로는
낮에도 희미한 푸른 인광을 내뿜는 포자 버섯들이 기둥처럼 솟아나 공기 중에 푸른 입자를 뿌려대고 있다.

방랑자는 배낭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자, 붉은 혀가 바스락거리는 묵은 잎을 타들어가며 장작의 심지를 *어 삼켰다.

불길이 일어서자 숲 속의 기운이 천천히 물러서며 습기 찬 나무 냄새와
푸른 광석의 서늘한 향이 뒤섞여 오른다. 타바리의 궁에서 케라수의 얼굴에 넘쳐나던 기만의 핏빛과 달리
이곳의 불꽃은 아무런 탐욕도 요구하지 않은 채 오직 야영자의 지친 발목만을 묵묵히 데워줄 뿐이다.

방랑자는 불길 곁에 모로 앉아 주머니 속의 비어진 감각을 다시금 가만히 어루만졌다.
가지고 오지 않았기에 제 가슴 깊은 곳에 온전히 남아 있는 황동 귀걸이의 질량.

손끝에 잡히는 것은 메마른 옷감뿐이었으나 지상에서 치러야 할 모든 거짓된 빚을
훌훌 털어버린 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무게가 온전히 고여 있었다.

그는 밤새 타오르는 장작이 뱉어내는 나직한 파찰음을 들으며,
지하 성소에서 보았던 푸른 마력 결정의 안개와 늙은 정복왕이 내려놓고 간 마지막 참회의 눈빛을 생각했다.

인간은 왜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려 드는가.

지상의 케라수는 지하의 비명을 황금 안료로 바깥에 발라 자신의 혈통을 증명하려 했고,
정복왕 루딘은 대륙을 피로 물들인 뒤에야 제 왕관의 허무함을 깨닫고 이 깊은 무덤으로 도망쳐 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이 숲길을 걷는 자신은 과연 누구인가.

그들이 쫓던 그 거룩한 원천과 유물 역시 대지의 긴 숨에 비하면
한 점 스쳐 지나가는 먼지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존재의 근원은 물질이나 칭호에 있지 않고, 자신이 짊어진 비극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는
참회의 결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찰이 타오르는 불꽃의 잔상 너머로 나직히 깔렸다.

이튿날,
숲은 인간이 만든 잣대를 거부하겠다는 듯 한층 더 정밀하고 깊은 수목의 그늘을 드리웠다.

거대한 고목들은 줄기마다 두꺼운 이끼를 장막처럼 뒤집어쓴 채 하늘을 까맣게 가렸고,
나뭇잎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마저 푸른빛을 띨 정도로 수액의 기운이 짙었다.

발을 디딜 때마다 이끼 밑에 갇혀 있던 모호한 습기가 장화 옆면으로 배어 나왔지만ㅡ
어쩐지 축축함이 아니라 대지의 오래된 맥박에 발을 대고 서 있는 안도감을 주었다.

길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또 다른 그루터기를 지날 무렵.
바닥에서 솟아난 거대한 우산버섯 밑으로 이름 모를 자줏빛 버섯들이 군락을 이루며 돋아나 있다.

우리가 갈아낸 안료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대지의 깊은 자궁에서 오랜 시간 길어 올린 마력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력.

케라수의 인부들이 지하 기단에서 기계로 짜내던 비참한 황금빛 고름은 결코 이처럼 정갈한 빛깔을 띠지 못했다.

방랑자는 그루터기 곁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고목의 나이테를 쓸어보았다.
세월의 결마다 스며든 이끼의 촉감은 부드러웠다. 나무의 죽음 위에 얹혀 살아가는 이끼와 포자들의 생태.

심연의 나락에서 보았던, 상인들의 기계 장치에 찢겨 흘러내리던
부정한 진액과는 다른, 대지가 흘려보내는 순수한 생명의 파동.

문득 마이소시아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스스로 왕관을 던져버린 채
이 서방의 끝까지 걸어왔다던 늙은 정복왕 루딘의 서사가 떠올랐다.

철갑을 두르고 지평선을 피로 물들이던 그 사내도, 결국 모든 영광의 허무함을 깨달은 뒤
이 그루터기 곁에 서서 제 손에 묻은 전란의 흔적을 이 연둣빛 이끼에 문질러 씻어내지 않았을까.

저 멀리 도망친 여인의 잔상을 *아 이곳에 당도했을 때
루딘이 마주했던 것은 깃발을 꽂을 영토가 아니라 스스로 갚아야 할 기나긴 참회의 세월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하는가.
대륙의 역사는 마이소시아의 영광이나 선문명의 번영조차 결국 한 포기 이끼 아래 파묻어버린다.

인간이 세운 가장 견고한 성벽도, 가장 오만한 왕조도
세월이라는 거대한 맷돌 아래서는 한 줌의 가루로 부서질 뿐이다.

그렇다면 이 길을 걷는 필멸자들의 삶이란, 한 번 켜졌다 꺼지는 모닥불의 연기처럼 무의미한 것인가.

방랑자는 손끝에 전해지는 나이테의 단단한 질감을 느낀다.
인간의 행적은 무언가를 완성하거나 남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망치고, 지어내고, 짓밟고, 참회하며 끝없이 흐르는
우리의 걸음이 하나의 서사가 되어 대지의 층위로 쌓여갈 뿐이다.

루딘이 버리고 간 귀걸이가 성소에 남아 백 년의 세월 동안 빚의 온도를 품고 있었듯,
한 인간이 진실하게 마주한 절망과 수긍의 무게만이 시공간을 넘어 또 다른 유랑자의 영혼을 일깨운다.

숲이 점차 짙은 안개에 젖어들수록 길의 형태는 소멸해 갔다.

자갈과 흙으로 이어지던 인위적인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 고대의 엘프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낮고 길쭉한 석조 의자들과 정교하게 깎아 만든 잔 모양의 조형물들이 숲의 일부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석조물들은 사람의 손으로 깎아 세운 것이 분명했으나, 모서리가 닳고 표면에 푸른 이끼와
붉은 꽃송이들이 채워져 있어 마치 땅속에서 자연스럽게 돋아난 과실처럼 보였다.

이 사이사이로 자라난 붉은 봉오리들이 어두운 숲길을 은은한 인광으로 밝히고 있다.

방랑자는 석조 의자에 잠시 앉아 배낭의 가죽끈을 고쳐 메었다.
손으로 짚어본 돌의 감각은 가옥을 지을 때 쓰이던 잘려 나간 돌들과 다르다.

정반듯하게 잘린 석재들은 누군가의 소유가 되기 위해 뿌리가 도려내어진 죽은 돌이었으나
이곳의 석재는 땅과 분리되지 않은 채 깊은 기단에 뿌리를 내린 진실로 살아진 돌이었다.
누군가 강제로 잘라내어 유용하려 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대로 내버려 둔 자연의 일부.

이곳이 바로 고대 선문명인들이 '신들의 정원'이라 부르며 지맥의 순수한 원천을 보존하던 숲의 외곽이자,
마력의 원천이 메데니아에 흘려드는 문턱이다. 타바리의 상인들은 이 숲의 뿌리 밑바닥에 기계를 박아 안료를 짜내었지만 정작 이 숲의 진짜 주인들은 땅을 찌르지 않고 그저 돌 위에 이끼가 앉듯 대지와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이 가닿는 최종의 지향점은 높다란 왕좌나 찬란한 금빛 가옥이 아니다.

땅에서 나와 다시 대지의 이끼 아래로 기어 들어가는 정직한 귀환이야말로,
수많은 족적을 남긴 유랑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이다.

정복자 루딘도, 이름 없는 선문명의 여인도, 그리고 이 길을 밟아나가는 방랑자 스스로도
모두 하나의 궤적을 그리다 스러져갈 대지의 파편에 불과하다.

그러나 모든 스러짐의 순간에 거짓된 인장을 내던지고 제 안의 빚을 온전히 직면할 수 있다면,
그 삶은 무의미한 소멸이 아니라 세계라는 거대한 서사의 정직한 한 문장으로 수용되는 것이다.

방랑자는 품속의 일지를 꺼내 손등으로 단단한 가죽 표지를 어루만졌다.

아만 정글의 습기, 타바리 장터의 황금 안료 가루,
그리고 심층의 검은 유황 그을음이 겹겹이 층을 이루어 묵직해진 그의 견문록.

인간의 탐욕과 불멸의 거룩함이 교차하던 수많은 문장들이 이제 그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숲의 안개가 깊어질수록, 등 뒤의 타바리가 남긴 비명은 점차 희미해졌고,
먼발치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가 그의 빈자리를 차분히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렇다. 대지의 숨속에 아늑히 융화되어 가고 있다.




















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