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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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가 케일런의 서쪽 대륙 견문록]
제6장: 붉은 진흙의 강을 건너 - 2
: 파노, 여신상과 음유시인
마침내 숲의 짙은 나무 그늘이 거짓말처럼 걷히며 나지막한 공터가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메데니아의 온갖 비극과 전란의 소문에서 소외된 채 고요히 숨죽인 엘프들의 은신처, 파노 마을이다.
마을 중심부, 맑은 샘물이 층층이 암반을 타고 흘러나오는 광장 한가운데에 한 여신의 석상이 외로이 서 있다.
가슴에 한 손을 얹고 정면을 응시하는 여신의 석상 주변으로는 세월이 빚어낸 수풀과 덩굴이
정교하게 감겨 있었고, 둘레로는 낮고 소박한 목재 울타리가 가느다란 밧줄로 엮여 있다.
석상 발치에는 눈처럼 하얀 꽃들과 붉은 봉오리들이 푸른 광석 빛을 받으며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케라수의 오만한 조각상이나, 황금으로 번쩍이던 상인들의 가옥과는 견줄 수 없는 경건함.
여신의 얼굴은 성소에서 보았던, 백 년 전 자신의 혈통과 전란의 기억을 파묻고 사라진
선문명 여인의 침묵한 눈동자와 기이하게 닮아 있었다.
돌을 잘라내어 권력을 과시하려 한 것이 아니라 대지에서 솟아난 돌의 결을 따라
여신의 형태를 끄집어낸 것 같은 형상.
여신의 손길이 미치는 바닥에는 신들의 시대가 끝났음을 슬퍼하는 이끼들이 가라앉아 있다.
여신상의 아래, 자리를 깔고 앉아 고풍스러운 류트를 조율하고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노란 머리칼을 등 뒤로 길게 늘어뜨린 엘프 음유시인.
사내의 손가락이 악기의 줄을 가볍게 튕기자,
청아한 현의 울림이 여신상 주변의 하얀 꽃잎들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현의 떨림에는 상인들이 주고받는 동전 소리나 병사들의 칼부림 소리와는
완연히 다른, 시간의 테두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단단한 질감이 실려 있었다.
방랑자가 여신상 앞으로 다가서자, 음유시인은 연주를 멈추고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아닌, 기나긴 여정을 마친 자를 향한 어떤 수용만이 고여 있었다.
사내는 방랑자의 먼지 덮인 부츠와 마모된 가죽 배낭,
그리고 눈동자 깊은 곳에 그늘진 심연 성소의 잔상을 가만히 읽어내려갔다.
"바람에서 흙먼지와 오래된 유황 냄새가 나는군요."
음유시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숲속의 샘물이 돌을 짚고 흘러가는 것처럼 맑다.
"지상의 빚을 모두 치르고 오셨습니까, 방랑자여.
저 아래 황금빛 안료 뒤에 숨어 있던 고통을 마주한 자의 걸음걸이로 보입니다."
방랑자는 배낭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손때가 묻어 마모된 가죽 책 한 권을 꺼냈다.
아만 정글의 습기, 타바리 장터의 황금 안료 가루,
그리고 심층의 검은 유황 그을음이 겹겹이 층을 이루어 묵직해진 그의 견문록.
책장의 모서리는 손질을 거듭해 닳아 있었고, 표지의 가죽은 그가 넘긴 시간의 무게만큼이나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제가 걸어온 길의 기록이자, 길 위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들의 비가입니다."
방랑자가 일지를 음유시인에게 내밀었다.
"누군가의 권위를 증명하기 위한 석판도 아니며, 지배자의 왕관을 장식할 유물도 아닙니다.
그저 대지가 삼켜버린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한 한 인간의 고백일 뿐이지요.
마이소시아의 통일왕 루딘이 버리고 간 참회의 무게와, 자신의 혈통을 신들의 정원에 파묻은 여인의 숨결,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을 안료로 발라 지상에 왕조를 세우려 했던 거상의 탐욕까지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음유시인은 두 손으로 가죽 일지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손때 묻은 표지의 결을 쓸어내릴 때,
일지 안쪽에 갇혀 있던 수많은 소리들이 은은한 파동이 되어 숲 속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음유시인은 책장을 넘기지 않고, 그저 가죽 표지 위에 손바닥을 가만히 얹은 채 눈을 감았다.
"이 숲에서는 아무도 빚을 지지 않고, 아무도 여행자의 서사를 빼앗아 왕관을 쓰지 않습니다.
신들은 이미 오래전에 대지를 떠났고, 자신들이 만든 기단 위에 인간들을 홀로 남겨두었지요."
음유시인이 일지를 가슴에 안으며 답했다.
사내의 눈동자가 다시 열렸을 때, 안에는 깊은 수긍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신들이 떠난 뒤에도, 인간들은 흙을 일구고,
피를 흘리고, 제 손으로 지은 죄를 마주하며 스스로 참회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기록은 나의 현에 실려 바람이 되고, 밤마다 여신상의 발치에 피어나는 꽃잎들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짊어졌던 무게는 이제 이 숲의 이끼가 대신 품어줄 것입니다."
음유시인은 류트를 다시 고쳐 잡았다. 사내의 긴 손가락이 악기의 목을 짚고 현을 가볍게 쓸어내리자,
숲 전체의 정적이 단번에 류트의 울림통 속으로 수렴되었다가 솟구쳐 올랐다.
중세의 고서에 새겨진 오랜 찬가이자, 신이 버린 땅 위에서 마침내 제 발로 서서
고통을 견뎌낸 인간들을 향한 거룩한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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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별들이 별자리의 궤적을 거두고
신들이 제 만들어낸 정원의 빗장을 닫았을 때,
거친 돌 위에 남겨진 것은 단단한 왕관이 아니라
흙먼지를 뒤집어쓴 필멸자들의 굳은살 박인 발바닥이었네.
저 위 천상에서는 불멸의 노래가 멈추었으나
지상에서는 비로소 인간의 곡소리가 시가 되어 흐르니,
피로 바른 안료가 세월의 빗물에 씻겨 나갈 때
자신이 진 빚을 손가락으로 짚어내는 자 누구인가.
영예를 도둑맞은 자는 기단 아래서 비명을 지르고
왕관을 던져버린 자는 밤마다 독주로 참회를 삼키나니,
아, 신들이 버리고 간 이 어두운 대지 위에서
스스로 갚아야 할 이름을 가슴에 품고 걸어가는 자여.
그대의 눈물은 가짜 왕조의 안료보다 진하고
그대의 정직한 한숨은 돌에 새겨진 문장보다 길어라.
신들은 영원 속으로 멀어져 돌아오지 않으나
땅 위에 남은 사내들은 오늘 밤도 불을 지피고,
제 손으로 짊어진 빚의 무게를 은은한 노래로 다스리나니.
흘러간 정복자의 깃발은 먼지가 되어 흩어지고
성소에 남겨진 황동 귀걸이는 조용히 미열을 품는데,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빈손으로 돌아선 유랑자여,
그대의 정갈한 발자국이야말로 대지가 기억할 유일한 율법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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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유시인의 노랫말이 숲의 거대한 수목 사이로 낮고 단단하게 번져 나갔다.
류트 현이 튕겨질 때마다 붉은 꽃봉오리들이 인광의 빛을 바꿨고,
여신상 발치의 하얀 꽃잎들이 바람도 없이 가누어지며 노래의 결을 받쳐주었다.
그것은 제 손으로 죄를 짓고 또 제 손으로 그 빚을 갚아나가는
지상의 불쌍하고도 고귀한 인간들을 향해 바치는 온전한 헌사이리라.
방랑자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제 가슴팍을 짓누르던 기나긴 대장정의 마지막 앙금이,
마침내 이 맑고 거룩한 엘프의 노래 속에 서서히 풀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만 정글의 습함도, 타바리의 비릿함도, 심층 검은 유황 가스도
이 노랫말의 파동 속에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 정리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 온 것이 비극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대지 위에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정직한 궤적이었음을 깨달았다.
방랑자는 천천히 돌아서서 여신상의 그늘을 빠져나왔다.
배낭은 비어 있었으나, 그의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단정했다.
품속 주머니의 비어낸 감각은 대지의 넓은 품과 연결된 자유의 증거.
푸른 빛이 새어 나오는 숲의 더 깊은 오솔길을 향해,
방랑자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가 떠나간 자리, 여신상 아래서 음유시인의 류트 소리와 노랫말이
다시금 청아하게 솟구쳐 오르며 숲 전체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숲의 안개가 그의 등 뒤를 조용히 덮어갔고,
방랑자의 부츠는 이끼 낀 대지 위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서서히 미지의 길 속으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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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관리인의 기록]
케일런의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루어스 사서의 마지막 부록과 파노 마을 엘프 음유시인들이 전하는 노랫말에 따르면,
이 신비한 메데니아 견문록을 내려놓은 방랑자 케일런의 발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노래에서는 그가 파노의 숲을 지나 전설 속의 철질산맥인 나겔링의 깎아지른 절벽을 홀로 넘어섰다고도 하며,
또 다른 옛이야기에서는 대륙의 극서쪽ㅡ
불길과 붉은 마력의 안개로 뒤덮인 고대 마신들의 터전 아스타로트의 지하 나락으로 걸어 들어갔다고도 전해진다.
지혜로운 엘프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풍문에는, 백 년 전 전란의 고리를 끊어내고 사라졌던 정복왕 루딘의
마지막 자취를 *아 구름 너머 히네스의 천상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는 말도 전해지나 그 진위는 확실치 않다.
혹자는 그가 모든 빚과 방랑을 마친 뒤 마침내 자신이 처음 출발했던 동방의 고향 마이소시아의
푸른 흙으로 살그머니 돌아와 삶을 다했다고도 증언한다.
훗날 타바리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케라시가 핏값의 빚을 갚기 위해 이스카의 사서를 들고
파노 마을의 여신상을 찾아왔을 때, 엘프 음유시인은 그에게 일지 대신 한 가닥의 청아한 노래만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그 노래를 들은 케라시는 눈물을 흘리며 지상으로 돌아가,
궁의 벽면에 바쳐졌던 모든 황금빛 안료를 긁어내고 지하의 핏줄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었다고 한다.
케일런이 파노의 여신상 앞에 남겨두고 떠난 이 원본 일지는 백 년의 세월 동안 엘프들의 노래로 전해 내려오다,
마침내 메데니아의 연대기를 수집하던 본 학술회 도서관의 극비 서고에 최종 안치되었다.
그가 나겔링의 암벽 위에서 숨을 거두었는지,
아스타로트의 지하 깊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는지,
루딘의 흔적을 따라 히네스로 향했는지,
혹은 마이소시아의 고향 흙으로 소리소문 없이 돌아왔는지는 그 누구도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그가 남긴 이 문장들만이 말라버린 안료의 표면 밑에서, 참회하지 않는 자들의 영혼을 향하고 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