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프람을 처분하고 점심까지 굶어가며 악착같이 자본을 끌어모았다.
'레인셋.'
그것만 입을 수 있다면 내 법도는 다시금 찬란하게 빛날 것이고, 꺼져가던 열정의 촛불도 화염처럼 피어오르리라 믿었다.
하지만 자금을 마련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매물을 구하는 일이었다.
조합 성공률이 워낙 낮아 희귀한 데다 전용 직업군만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기에, 어쩌다 만난 판매자들은 하나같이 정가보다 비싼 웃돈을 요구했다.
돈만 넉넉하다면 얼마든지 더 얹어주고 싶었지만,
영혼까지 긁어모아 겨우 시세에 맞춘 나로서는 단 몇 푼의 웃돈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시장을 매일 같이 맴돌고, 밀레스 마을을 쓸고 다니며 외치기 창을 도배하기를 사나흘.
마침내 레인셋을 판매하겠다는 자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즉시 거래 장소인 시장으로 달려가 상대를 만났다.
당시 극성을 부리던 '소모니아 사기'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기에,
안전한 거래를 위해 상대에게 먼저 아이템을 올려 달라고 청했다.
상대는 흔쾌히 응하며 레인셋을 부위별로 차곡차곡 올리기 시작했고,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올렸다.
마침내 그토록 갈망하던 위대한 거래가 성사된 순간이었다.
거래창이 닫히고 감사 인사라도 전하려던 찰나, 상대는 기다렸다는 듯 리콜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가슴 벅찬 마음으로 인벤토리에 들어온 레인셋을 더블클릭했다.
그러나 내 캐릭터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류인가?'
이상하다 싶어 마우스가 부서져라 광클을 해보아도 캐릭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아이템은 여전히 인벤토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은 레인셋 부위별 이름 옆에 조용히 붙어 있는 괄호 속 단어였다.
(봉인)
그것이 아무런 효력도 없는 빈 껍데기 아이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정적을 깨고 내 주먹이 키보드를 강하게 내리쳤다.
무언의 샷건이었다.
멍청했다.
사기꾼의 악의를 탓하기 전에, 나의 무지함이 초래한 지독한 결말이었다.
상대는 이미 접속을 종료한 뒤였고, 텅 빈 시장 한복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법도는 그 어떤 날보다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밀려오는 극심한 허탈감 속에 골잡이나 사냥 따위는 까마득히 잊혀졌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길드마저 미련 없이 탈퇴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아 있던 생명의 목걸이마저 처분해 버린 채, 나는 어둠의전설이라는 세계에서 영영 걸어 나왔다.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합리화라 해야 할까.
모니터 속 가상 세계를 떠난 그날 이후, 나는 현실의 삶에 치열하게 굴러떨어지며 마침내 번듯한 직장에 취업했고,
일상은 점차 무난하고 평온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던 며칠 전.
문득 여전히 삭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내 옛 법도 캐릭터가 궁금해졌다.
홀린 듯 게임에 접속하자, 그 시절 사기를 당했던 그날 모습 그대로, 아슬론 마을 상점에서 파는 어빌리티 옷을 입고 크리샤오르를 든 내 캐릭터가 화면 너머에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내 옛 분신.
비록 그래픽 조각에 불과하지만, 지나온 날들과는 달리 우리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서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