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이 내려앉은 허름한 민가. 생의 끄트머리에 선 노인의 거친 숨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무겁게 채워나갔다.
"헉... 허억... 이제 말... 하는 것도... 힘들... 구만."
그런 노인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눈물을 훔쳐내는 쉴소러스 부인.
그녀의 거대한 풍채만큼이나 대범하고 묵직한 성정은,
마지막 순간까지 노인의 곁을 지키는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듯했다.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끝까지 임종을 지키겠어요."
소싯적, 호기심이 일면 그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던 쉴소러스 부인.
그녀의 수많은 물음표 앞에 언제나 박학다식한 지식으로 탄탄한 느낌표를 안겨주던 이가 바로 지금,
생명의 불씨가 사그러들어 가는 노인, 캘러스였다.
하지만 캘러스의 임종을 지키는 쉴소러스의 모습에는 묘한 이질감이 감돌았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그녀의 진짜 관심은 죽음을 맞이한 노인의 안타까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캘러스만이 알고 있는 미지의 비밀과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마저 캐내겠다는 집념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어르신... 이제 더 들려주실 이야기는 없으신가요? 가령, 루어스의 전설이라던지..."
"헉... 헉... 끝까지 자네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구만."
"어르신만 알고 계시다가 사라지는 비밀은 너무 슬프잖아요. 제가 널리널리 어르신의 비밀을 전설처럼 이어갈게요."
"그렇...다면... 루어스... 대평원... 몬스터들을... 잡다 보면... LOD... 페이지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내어 겨우겨우 이야기를 전하는 캘러스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었으나,
쉴소러스의 눈빛은 아랑곳하지 않고 예전의 호기심으로 다시금 반짝였다.
그녀는 바짝 다가앉아 노인의 손을 꽉 잡아쥐었다.
"네네! 그래서요?"
"그... 페이지에... 비밀이... 적혀... 있을걸세. 허나... 안 보는 걸..."
툭.
노인의 몸에 깃들어 있던 긴장이 풀렸다.
찌푸려졌던 미간은 마침내 편안하게 펴졌고,
부들부들 떨리던 손과 굳어 있던 육신은 영원한 안식을 맞이한 이처럼 고요하고 잠잠해졌다.
"흑... 흑... 안녕히 가세요..."
분명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과 대비되는 그녀의 입가에는 서늘하고도 소름 끼치는 미소가 깊게 서려 있었다.
그 언밸런스한 기괴함을 마주했다면, 변칙과 유희의 신 뮤레칸조차 등골이 오싹해졌을 터였다.
정복되지 않은 지식의 정답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쉴소러스의 집요한 발걸음은,
캘러스가 명을 다한 지 정확히 10시간 만에 시작되고 있었다.
루어스 성 앞 한모퉁이에 자리를 잡은 쉴소러스는 막연하고도 끈질긴 기다림에 돌입했다.
시스템의 테두리에 갇히지 않고,
그 허술한 틈을 온전히 벗어난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은밀하고도 소름 끼치는 음모의 서막이었다.
그녀는 케인즈를 비롯한 몇몇 인물을 포섭하여,
자신이 갈망하는 지식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한 거대한 판을 짜기 시작했다.
그녀의 계획은 치밀했다.
더 강해질 수 있는 달콤한 경험치와 성장에 보탬이 될 소소한 재화,
그리고 지식인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미끼로 걸고 마이소시아 대륙 전체의 용사들을 조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루어스 대평원의 몬스터들 말이야... 'LOD 페이지'라는 희귀한 아이템을 품고 있다고 하더군.
그것을 절대 펼쳐** 않고 쉴소러스 부인에게 가져다주면, 그에 상응하는 두둑한 보상을 준다고 하네."
소문을 접한 미상의 용사들이 의구심을 품고 물었다.
"어째서 읽어보면 안 되는 건데요?"
그 질문에 케인즈는 미간을 찌푸리며, 쉴소러스가 일러준 대로 엄중하고도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쉴소러스 부인처럼 비범한 지혜와 힘을 지닌 자가 아니라면,
그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저주를 받아 그 자리 즉사하고 만다더군!"
"히이익...!"
케인즈가 이토록 연기력에 공을 들인 데는 쉴소러스의 간곡한 부탁,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무언의 협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쉴소러스가 이토록 철저한 공모를 꾸민 이유는 단 하나였다.
캘러스가 남긴 비밀의 실체를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가장 먼저 가로채고,
그 해박한 지식의 권위로 한껏 포장된 자신의 우월감을 세상에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입소문을 탄 새로운 퀘스트는 들불처럼 번져 마이소시아 모든 용사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어스 대평원에는 사냥하려는 몬스터보다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용사들의 발길이 더 많아지는 기이한 현상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허탈한 헛소문이었을까.
쓸모없는 잡동사니나 굴러다니는 평범한 퀘스트용 '오래된 페이지'만이 드문드문 떨어질 뿐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는 'LOD 페이지'는 그 누구의 손에도 걸리지 않았다.
조급해진 이들 중에는 일반 종이조가리를 'LOD 페이지'라 속여 쌈지돈을 가로채는 사기꾼까지 횡행했다.
수일이 지나고, 또 수십일이 흘러도 기적 같은 아이템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칠 대로 지친 용사들은 하나둘 피로감을 이기지 못하고 대평원을 쓸쓸히 떠나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 속에서도 'LOD 페이지'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답답함을 참다못한 케인즈가 쉴소러스를 찾아와 매섭게 따져 물었다.
"혹시 귀가 잘못된 거 아니야? 여태껏 대평원 구석구석을 **봐도 그런 아이템은 나온 적이 없다고!"
케인즈의 추궁에 쉴소러스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미세한 불안의 균열이 가고 있었다.
정말 거짓이었을까.
생명의 불씨가 꺼져가는 노인들은 종종 헛소리를 하거나 해괴망측한 망상에 빠지곤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캘러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또렷한 눈빛과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단어로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소싯적부터 그가 들려준 지식 중에 틀린 것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쉴소러스는 그 믿음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아니에요... 캘러스 어르신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씀하셨어요."
답답하다는 듯 케인즈는 거칠게 볼멘소리를 뱉고는 등을 돌려아 섰다.
"일단 협조는 해주겠지만, 설령 끝내 LOD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 시간과 수고는 톡톡히 재화로 쳐주길 바라겠어."
케인즈가 떠난 뒤로도 한참의 시간이 더 흘렀다.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캘러스의 유언에 거의 기대를 접은 채,
평소처럼 고상한 자태를 뽐내며 거처를 지키고 있던 그날.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한 청년이 그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헥... 헥...! 부인...! 부인이 찾으시던 게... 이 LOD 페이지 맞죠?"
쉴소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찢어질 대로 찢긴 갑주와 사방에 혈흔이 낭자한 우든 클럽.
처참할 정도로 초라한 차림의 청년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그녀가 온갖 집념으로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이었다.
'LOD 페이지'
"맞아요...! 용사님이 정녕 그것을 손에 넣으신 건가요?"
"여기 있습니다. 틀림없는 'LOD 페이지'라는 아이템이에요. 소문 듣자마자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일러주신 대로 읽지도 않고 고이 보관했어요. 약속된 보상과 칭호를 얻고 싶어서요."
"그럼요, 암요...! 이리 주세요. 당신의 부귀영화는 내가 확실히 책임지겠어요."
주체할 수 없이 손끝이 떨려왔다.
캘러스가 숨겨둔 미지의 비밀, 그리고 마이소시아 대륙 그 누구보다 먼저 그 진실에 다가서는 영광.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라앉히며 청년에게 페이지를 건네받은 쉴소러스는
아낌없이 막대한 부와 명예로운 칭호를 그에게 안겨주었다.
"헤헤, 감사합니다 부인! 이제 토파즈 슈트를 사 입고 사랑하는 그녀와 결혼할 수 있겠군요!"
"당신의 앞날에 이아 여신님의 가호가 늘 함께하기를..."
싱글벙글 멀어져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뒤로한 채, 쉴소러스는 곧장 자신의 은밀한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아서는 안 되며, 이 비밀을 자신보다 먼저 알게 되는 이는 단 한 명도 용납할 수 없었다.
비밀이란 오직 혼자만의 영역에 갇혀 있을 때 비로소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적막하고 어두운 방 안, 유독 밝게 타오르는 호롱불 앞에 앉은 쉴소러스.
그녀는 운디네의 맑은 정수로 육신을 정갈하게 씻어내린 뒤,
그 어느 때보다 단장된 모습으로 마침내 'LOD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엔...
진실이 적혀있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생각하는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