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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마을 세오
「秘」초를 든 자들 - 3
19 2026.11.04. 19:55

秘, 루어스의 비밀 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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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소시아 전승록]

초를 든 자들

















6. 바일 일당이 지나간 자리는 해마다 넓어졌다.

경비대들이 저마다 지도에 찍은 피해 지점은 피에트 남쪽 갈대밭과 메하디 늪 둘레에서 시작해
타고르 남쪽 고개, 밀레스 숲길, 뤼케시온 해안의 어촌까지 번져 나갔다.

그들은 몇 년 동안 외딴집 한두 채만 골랐으나
그레이가 붙잡힌 무렵부터는 서너 채가 모인 작은 마을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큰 피해는 세오력 91년 겨울, 타고르 남쪽 고개 아래 하르웬에서 났다.

그날 하르웬에 들어간 타고르 경비대 하사관 데릭 오스의 일지를 보면,
그는 현장을 보고 냉정함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눈 그침. 바람 없음. 하르웬에 장작 팔러 갔던 나무꾼이 되돌아와 신고.
굴뚝마다 연기가 없고 개 짖는 소리도 없다 함. 다섯을 뮤레칸에게 데리고 감.
집집이 문이 열려 있고, 사람들은 이불을 덮고 누운 채였음. 누구도 일어나지 않음.
모든 집 피해. 스무 집, 예순여덟. 생존자 없음. 아무도. 사울의 문간에는 그의 개도 엎드려 죽어 있었음."
(타고르 경비대 일지, 세오력 91년 12월)


일지의 이 쪽은 앞뒤 날짜보다 글씨가 크고 획이 거칠다.
펜촉이 걸려 종이가 찢어진 자리도 두 군데 있다.

하르웬은 고개 아래 골짜기 바닥에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겨울이면 바람이 고개 위로만 지나가고 골짜기 안은 공기가 거의 움직이지 않아
굴뚝 연기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지붕 위에 낮게 깔렸다.
9년 뒤 재판소가 왜 하르웬이었느냐고 물었을 때, 바일의 대답은 바람이 없어서였다.

이 사건에는 따로 적어 둘 일이 하나 더 있다.

그해 가을 타고르 영주는 흉작에 시달리는 남쪽 고개 마을들을 돕기 위해
구휼금을 하르웬 촌장에게 맡겨 두었다.

타고르 재무 기록에 따르면 그해 조폐소에서 새로 찍은 주화 이백 닢으로,
구휼금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뒷면에 작은 보리 이삭 각인을 하나씩 더 찍었다.

이듬해 봄 씨앗을 살 돈이었다.
오스의 일지에 따르면 촌장의 집 궤짝은 부서진 채 비어 있었다.

주화는 어디로 갔을까.

타고르 영주는 이듬해 각지의 환전상과 상인 길드에 공문을 돌려
보리 이삭 각인 주화를 보면 즉시 알리라고 했다. 공문은 해마다 다시 돌았고, 영주가 바뀐 뒤에도 끊기지 않았다.

하르웬은 그 봄 왕국 공문서의 마을 목록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지금은 돌담 몇 줄과 판자로 덮은 우물 하나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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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바일 일당이 다녀간 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 가운데 피해자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은 이는 운디네 호숫가에 살던 열한 살 소녀 넬 하딩 하나다.

세오력 93년 여름, 넬의 집에 일당이 침입했다.
그날 밤 넬은 더위를 못 견뎌 부엌 뒤 깨진 창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폭풍에 깨진 뒤로 미처 갈아 끼우지 못한 창이었다.
이튿날 넬을 교회로 데려와 말을 받아 적은 사람은 운디네 교구의 노사제 브라이스다.

그는 아이의 말을 이렇게 남겼다.


"달았어요. 꿀을 오래 놔두면 시큼해지잖아요, 그런 냄새요.
머리가 막 무거워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거기로 호수 바람이 들어왔어요.
누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는데 눈이 안 떠졌어요. 진짜로요! 그 사람이 노래를 불렀어요.
모르는 노래였어요. 아침에 일어났는데 다 자고 있었어요. 엄마도 아빠도 테드도. 계속 흔들었는데..."
(운디네 교구 기록, 세오력 93년 7월)


브라이스는 그 아래에 한 줄을 덧붙였다.
"덧창을 닫으려 하니 아이가 울며 매달렸다. 창을 닫지 않았다."

넬은 그 뒤 피에트의 친척 집으로 보내졌고, 그녀에 관한 기록은 한동안 거기서 끊긴다.

이 진술은 바일의 초가 외풍이 드는 곳에서는 힘을 덜 쓴다는 것을 보여 준 증거였다.
바람 한 점 없던 하르웬에서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운디네 경비대는 호숫가와 늪가 마을에 밤에는 창을 한 뼘쯤 열어 두고 자라는 포고를 냈다.

포고는 그대로 풍습이 되었다.
메하디 늪가 몇몇 마을에는 지금도 밤에 창을 한 뼘쯤 열고 자는 버릇이 남아 있다.

세오력 130년대 피에트 교구의 아동 교리 문답에도 그 대목이 나오는데,
왜 창을 열어 두느냐는 물음에 아이들이 외워야 할 대답은 "아침에 일어나려고"였다.

넬이 들은 노래에 관해서는 7년 뒤 재판소에서 짧은 문답이 오갔다.

일하며 노래를 부르느냐는 물음에 바일은 그렇다고 했고, 웩스모어에서 밀랍을 거를 때 부르던 노래라고 했다.
불러 보라고 하자 그는 이제 들을 사람이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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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하르웬 이후 바일에 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

운디네 호수의 어부들은 그가 갈매기로 몸을 바꿔 호수 건너편으로 날아갔다고 했고,
밀레스의 나무꾼들은 추격대가 그를 쫓던 숲길에 쓰러져 있던 고목이 이튿날 아침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했다.

피에트에서는 그를 본 사람은 그날 밤 깊이 잠들어 그의 얼굴을 잊는다는 말이 돌았다.
이 무렵 밀레스 시장에서 불리던 노래 한 대목이 지금까지 전한다.


초를 켜면 바일이 오고
초를 끄면 바일이 간다
개로 왔다 염소로 가고
아침이면 아무도 없다


본래는 아이들의 놀이 노래다.

술래가 눈을 감고 서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둘레를 돌며 부르다가,
마지막 구절에서 모두 땅에 엎드려 잠든 척을 했다. 술래는 그 가운데 누가 숨을 쉬는지 맞혀야 했다.

밀레스 교구는 세오력 94년 이 놀이를 금했지만, 노래는 오히려 어른들 입으로 옮겨 가 시장에 더 널리 퍼졌다.

기록자가 여러 경비대 일지의 목격담을 맞대어 보니
바일이 몸을 바꾸었다는 증언은 모두 해 질 녘이나 안개 짙은 날의 것이었다.

대낮에 그를 놓쳤다는 기록은 한 건도 없다.
변신이라 불린 일들은 대부분 어스름 속에서 차림을 바꾼 사내를 놓친 일로 읽힌다.

목격담 속의 그는 다리를 저는 퇴역 용병이었다가, 순례 길의 수도사였다가,
늪열병으로 기침을 달고 다니는 떠돌이 초장이였다. 마지막 모습이 가장 자주 나온다.

웩스모어에서 나고 자란 그에게 초장이 노릇은 변장이라 하기 어려웠다.
그는 초를 정말로 잘 알았고, 정말로 좋은 초를 팔았다.

사람들은 그가 파는 초를 제 손으로 사서 집 안에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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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바일 일당이 20년 가까이 붙잡히지 않은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겹쳐 있었다.

그들이 남긴 죽음은 살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잠든 채 숨진 사람들의 몸에는 다툰 흔적이 거의 없었다.

피에트 경비대는 크레인가의 죽음을 늪의 가스 탓으로 돌린 뒤,
몇 년 동안 늪가에서 일가족이 잠든 채 숨진 사건 다섯 건을 같은 사유로 처리했다.
해안에서는 겨울의 화로 연기를, 산마을에서는 역병을 의심했다.

설령 누군가 의심을 품었다 해도 그 의심을 이어 붙일 길이 없었다.
피에트, 밀레스, 타고르, 운디네의 경비대는 저마다 제 관할의 일만 적었고 서로의 일지를 볼 일이 없었다.

같은 단내를 맡았다는 증언이 네 곳의 일지에 따로따로 잠들어 있었다.
바일은 한 고장에서 일을 벌이면 이듬해에는 반드시 다른 경비대의 관할로 옮겨 갔다.

이해할 수 없으나, 한 곳에서 초를 두 번 켜면 사람들 코에 냄새가 남는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일당 안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조직원들은 서로를 거의 몰랐고, 하나가 붙잡혀도 댈 수 있는 이름은 둘셋에 그쳤다.

초를 든 자와 문을 여는 자를 나눈 원칙도 같은 뜻으로 읽힌다.
초를 든 자는 집 안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문을 연 자는 초에 손을 대지 않았다.

초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바일과 로크 둘만 알았다.

장물도 좀처럼 바깥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장물 처리는 처**터 로크의 몫이었다.

그는 은붙이와 보석을 녹이거나 깨뜨려 서쪽 대륙의 상인에게 팔았고,
각인이 뚜렷한 주화는 몇 년씩 땅에 묻어 두었다가 다른 주화와 섞어 조금씩 내보냈다.

교회에서 공물과 헌금을 다루던 손이다.
그레이가 붙잡힌 것도 은 술잔을 녹이지 않고 제멋대로 팔려했기 때문이었다.

이 가운데 하나만 어긋났어도 바일은 더 일찍 붙잡혔을지 모른다.

끝내 어긋난 것은 장물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