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우연을 운명이라 착각할 때가 있어. 사실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혼자서 쓸 데 없이 애매한 의미를 부여하곤 해. 데자뷰를 느낄 정도로 여러 번
되풀이 되는 상황에 스스로를 뻔하디 뻔한 신파극의 주인공으로 만들고는
뒤돌아 눈물 흘리는 행동. 뭐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그렇게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한바탕 모놀로그를 펼치고 나면, 남는 것은 지독한 숙취와 덩치 큰 자괴감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이 나선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이 씁쓸해. 아니, 오히려
반복될 때마다 이퀄라이저처럼 요동치는 감정은 더욱 배가되어 나에게 돌아오는 것 같아.
참 웃기지.
추억이란 것이 참 묘해. 어떨 때는 하루를 참아내는 동력이 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죽도록 서글퍼지는 독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내 심장에 새겨진
우리의 기억들이 과연 너에게도 똑같은 의미로 남아있을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모르지.
소식조차 알 길이 없는 너인데. 소중한 기억으로 기록되어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
부디 나라는 존재가 악몽으로 남지 않길.
그래. 난 분명 사랑을 했어. 너를 사랑했고, 너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어.
또 우리가 걷던 그 언덕길을 사랑했어. 때로는 과거를 미화하며, 또 처절한 비극으로
탈바꿈시키면서도 널 사랑했다는 사실만큼은 어떠한 조미료 없이 날 것 그대로 남겨두었어.
부디 망각이 나의 아름다운 날들을 앗아가질 않길 바라고 있지만, 과거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언젠가는 뒤틀리고 변형되어 사실을 왜곡하겠지. 그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나름대로의 훈련이 필요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입 맞추었던 밤.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던 비밀들이 뭉근하게 피어오르던 그 계절. 이 모든 것을 되새김질 하듯 떠올려야만 해.
사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그 순수했던 날들로 날 데려가 줄 때도 있어.
비록 길을 걷다 얼굴을 스치는 얇은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감각일지라도 말이야.
내 손등위에 내려앉은 흉터가 꿈속에서 말을 걸곤 해. 잊어버리라고, 그래봤자 너만 손해라고.
나도 알아. 하지만 ‘잊어버리자’ 해서 될 일 같았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았을걸. 그냥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맞는 명제 같아. 너는 지금 서울 어디서, 어떻게, 어떠한 저녁을 맞이하고 있는 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속에 살아있는 너는 분명 뭘 해도 잘 살고 있을 거야.
누구보다도 현명했던 너였잖아.
지금 내리는 이 빗방울이 너에게도 떨어지고 있을까? 말했지만 알 방법이 없겠지.
아주 가끔이라도, 불현듯 스쳐가는 기억의 잔향이라도 나를 떠올려 주었으면 좋겠어.
잊혀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잖아. 물론 그것도 내 욕심이겠지만 말이야.
아프지 말고 부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길 바라.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