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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무서움을 제대로 보여줬던 이야기
제보자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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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취준생, 강원도>
대학교를 다니며 취직 준비를 해야했던 나는 졸업유예를 신청했다.
물론 취직 준비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금방 백수의 삶에 중독됐다.
하루종일 온갖 게임을 섭렵했지만 역시 생각이 나는 건 어둠의전설 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들어간 법-직 캐릭터, 어릴때는 분명 연주공격 한방에 오렌 외곽 몬스터들이 사라지고,
억쩔을 다니며 남부럽지 않게 게임을 즐겼던 것 같은데 법직이나 직법이 관짝에 들어갔단 사실이 슬펐다.
오래된 캐릭터인지라 문어군, 목도리, 몬스터목걸이(?) 등 온갖 아이템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프린세스 드레스 보닛이 눈에 띄었다.
자유게시판에서는 OO창고라는 사람이 프드뚜를 산다는 게시물을 올린것을 발견한 나는 당장 귓속말을 했다.
OO창고> 프드뚜 아직 구매 하시나요?
OO창고" 제시
OO창고> 제가 복귀유저라 시세를 잘 몰라서요.
OO창고" 제시
어둠의전설에서는 뭔가를 산다고 적어놓은 사람에게 귓을 하면 항상 제시 라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격을 부르면 욕을 하거나 아예 답장이 없는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다들 잡아다가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고 싶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OO창고> 5억
그의 태도에 살짝 화가난 나는 어처구니없는 가격을 불렀고 그는 1초도 채 되지 않고 답장했다.
OO창고" XX임? 머리가 있으면 제발 생각을 하고 제시를 하셈
OO창고> 가격잘 모르는데 자꾸 제시 제시 거리길래 진짜 제시했는데 왜 XX임?
OO창고" ㅉㅉ 모르면 게시판 검색해보고 할 생각을 해야지 모르는게 자랑임?
한참을 그와 싸우던 나는 너무나도 화가났다.
그는 그런 경험이 많았는지 한컴타자 최소 1200타의 속도, 다양한 욕의 카테고리, 물흐르듯 자연스러운 비난 등
아무리 기를 쓰고 타자를 쳐도 그에게 이길 수가 없었다.
OO창고"꼬우면 대전 OO피씨방 찾아오셈 ㅋㅋ
OO창고" 쫄아서 답장늦노 ㅋ 햄 승리ㅋㅋ ㅅㄱ 차단
OO창고> 너 진짜 후회하지 마라.
이 말을 끝으로 차단을 당한 나는 키보드를 내리쳤다.
2X년 인생을 살아오며 이런 분노는 중학생때 김OO에게 뺨을 맞은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는 그 때 부터 머릿속에 온통 OO창고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처절한 복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이디를 새로 만들었다. OO창고엄X 라는 성직자 캐릭을 만들어서 그가 주로 활동하던 마인 마을에 세워뒀고,
그가 나타날 때마다
"OO야, 샤워하고 수건 두 장 쓴다고 잔소리 안할테니까 제발 집으로 돌아와라.."
라는 식으로 그를 조롱했다.
하지만 역시 수년간의 어둠의전설 키보드배틀 숙련자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홍보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벌써부터 무너지면 안되지, 내 복수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거든.
그렇게 몇 일 동안 그의 옆에서 알짱대던 나는 그 캐릭을 세워두고 또 다른 전-도 캐릭으로 나타났다.
"몇 일동안 봤는데 님이 뭐했길래 이럼?"
나는 OO창고에게 다른사람인척 접근했고 OO창고는 상황을 설명하며 욕을 했다.
"아 ㅋㅋㅋ 완전 찌질이네 ㄹㅇㅋㅋ ㄱㄷ 제가 쫓아내드림"
나는 바투와 밀기를 통해 또 다른 나인 성직자 캐릭터를 밀기 시작했다.
알트탭을 반복하며 성직자 캐릭터와 전-도 캐릭터가 서로 다른 사람인 양 싸우는 척을 했다.
그렇게 성직자를 몇 번이나 쫓아낸 뒤 OO창고에게 친한척을 했다.
그리고 미리 옮겨놓은 프드뚜를 OO창고에게 건네며 호감을 샀다.
그렇게 매일 마인 마을에서 함께 채팅을 하고, 마침 스펙이 비슷했던 우리는 사냥도 같이 다니며 친구가 됐다.
OO창고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 분노, 복수심을 모두 없애고 진심으로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며 신뢰를 쌓아갔다.
약 2달의 시간이 흘렀고 우리는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하며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웃긴 짤 들을 공유할 정도로 친해졌다.
그동안 알게 된 사실은 그는 실제로 강원도에 살고 있으며,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
대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남자이고 잔소리가 싫어서 항상 피시방에서 살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보를 토대로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 먹었다.
"OO아~ 나 이번에 친구들이랑 강원도 놀러가려고. 혹시 추천할만한 곳 있어?"
"강원도? 형, 거기서 여기까지 오려고?"
"친구들이 한 번 가보고 싶다고 해서! 괜찮은 곳 추천좀 해줘. "
나는 괜찮은 곳을 추천해달라고 하며 그에게 얼굴이나 잠깐 보자고 했고
그는 자신의 집이 강원도의 영진항 근처 아파트라며 영진해변이 괜찮다고 이야기를 했다.
강원도, 영진항.
나는 4월 20일에 여행을 간다고 말을 했고 그보다 일주일 앞선 4월 13일에 강원도 영진항을 향해 출발했다.
영진항 인근의 X닉스 모텔로 가 일주일치 숙박료를 지불했다.
그리고 그 주변의 피시방을 매일같이 돌아다니며 잠복을 했다.
그렇게 이틀 째 되던 날 나는 PC방에서 보기 드문 어둠의전설이 켜져있는 PC를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지나가는 척 캐릭터의 이름을 확인했고, OO창고였다.
녀석은 안경을 끼고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손발이 차가워졌고 심장이 뛰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혹시나 싶어 스캔해본 결과 키나 덩치가 커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왜소하다는 표현에 가까운 정도.
나는 그 녀석의 뒷자리로 자리를 옮긴 다음 성직자 캐릭터로 들어가 귓속말을 날렸다.
OO창고> 야. 지금이라도 사과하면 봐준다.
OO창고" ㅋㅋ 한동안 안보이더니 또 기어나왔네. 꺼져 제발 니 인생을 살어
OO창고>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OO창고" 응 니OO~
나는 다시금 느껴지는 그때의 분노를 되새기면서 말을 이었다.
OO창고> 강원도 연곡면 X피씨방, 24번자리.
의자를 돌려 앉아 그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OO창고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마침내 뒤를 돌아봤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나는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헬창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운동을 꽤나 열심히 했고 덩치가 제법 있는 편이었다.
나는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OO창고에게 다가가서 그의 뒷목을 세게 잡았다.
"XX놈아. 마지막 기회라고 했지."
몇 달 동안 상상해왔던, 그 자식을 잡아서 족치는 상황. 그런데 내가 기대했던 것 만큼 통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나에게 목덜미를 붙잡혀 덜덜 떨고있는 햄스터 같은 자식한테 내가 왜.
나는 미리 봐놓은 피씨방 옆 골목으로 그녀석을 끌고갔다.
손바닥으로 몇차례 머리를 후려갈겨준 뒤 한숨을 푹 쉬었다.
"익명이라고 온라인 상에서 깝치고 다니다 진짜 뒤진다. 알겠냐?"
"네..네."
더 이상 물리적인 접촉을 가했다간 일이 더 커질 수도 있기에 한참을 더 욕을 한 뒤 녀석을 돌려보냈다.
그래도 몇 달 동안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할 일은 해야겠지, 마무리로 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녀석에게 오픈카톡을 보냈다.
-OO아
-어 형 왜?
-내가 진짜 후회하지 말랬잖아 ㅋㅋ 이제 마인에서 깝치다가 걸리면 진짜 뒤진다?
녀석은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나는 어쩐지 굉장히 미안한 마음과, 통쾌한 마음, 그리고 조금 후회되는 마음이 섞여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스러움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마디 카톡을 보냈다.
-쫄아서 답장늦노 ㅋ 햄 승리ㅋㅋ ㅅㄱ 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