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카산드라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그녀는 진실된 예언을 했으나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예정된 비극적인 미래를 바꾸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어렸을 적, 아동용 서적에서 본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때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모든 진실을 알고있는 미래의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예언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어린 생각이었다.
또한 그녀의 무력함 역시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그리스 로마신화 속 다른 인물들에 비해 그녀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저런 능력을 가지고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할 수가 있다니..
카산드라의 게임
처음에는 게임중독 증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꿈에서 며칠 후 있을 공성전의 상대 전략이 뻔하게 보였다.
꿈에서조차 어둠이 나오다니, 이게 게임 중독자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게임에 접속해 꿈에대해 말하자 다들 쉬는게 좋겠다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조언을 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그 전략도 대비해봐"
라고 조언해준 사람은 부길마 형이었다. 내 정신나간 소리를 모두가 흘려듣고 있던 중
내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는지 연신 웃으며 나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우리가 준비한 전략이 있잖아"
"의외로 그런 감이 맞을 때도 있으니까"
어쩐지 설득력 있는 말이었으나,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동안 준비한 전략도 있으니 꿈은 신경쓰지 말자고 생각했다.
며칠 후 치뤄진 공성전에서 상대 길드가 우회 루트를 사용하는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꿈에서 봤던 장면이니까, 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애써 침착을 되찾았다.
그 결과 상대의 공격을 어찌어찌 막아낸 후 우리는 승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전략을 대비했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나는 문득, 그대로 이야기하면 안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예감이 들었다.
"제가 상대 입장이라면 우회 루트밖에 없을 것 같더라구요. 그런데 그 전략이 나와 깜짝 놀랐어요."
꿈에서나마 상대의 전략을 미리 봤다는 사실에 대한 알수없는 죄책감과 함께 정체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 사실을 어느정도 숨기는 내용으로 나도 모르게 말이 바뀌어 나왔던 것이다.
내가 원해서 꾼 꿈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유리한 점을 붙들고 공성전을 치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힘들게 게임해도 괜찮으니 그런 꿈은 꾸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볼 때 나에게 잘못은 없다.
신기하기는 하나 오랜기간 게임을 하면서 찾아올 수 있는 드문 행운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그만일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꿈의 정체를 어느정도 직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그 꿈이 들어맞을 것이라고 어느정도 직감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꿈을 계속 꾸게 될 것 역시도...
"예지. 현재 가지고 있는 지식을 근거로 한 추론으로는 '예측불가능하다' 생각되는 미래사를 미리 자각하는 일"
사실 전략을 예측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다음날 패치가 어떻게 이루어질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단순한 어둠 유저가 길드원 중 누가 후득을 할 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날 저녁, NPC에 오류가 생길 것을 예측하는 것 역시 불가능 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전날 꿈에서 봤다. 나는 길드원이 후득하는걸 봤고
NPC에 오류가 생겨 많은 사람들이 불편함을 겪는 장면을 봤다. 어찌보면 일상적인 꿈의 한 장면일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예지몽'이 지니는 느낌은 보통의 꿈과는 달랐다. 일단 꿈에서 깬 후에도 그 내용이 선명히 기억나고,
무엇보다도 예지몽 특유의 불쾌한 확신이 내 머릿속을 점령한다.
인터넷에서 '예지'에 대해 찾아보니 그 정의는 내가 겪고 있는 것과 일치하는 듯 했다.
이해도 잘 가지않는 인터넷 백과사전의 내용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예지몽이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꿀 때마다 느끼는 불쾌한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꿈과 악몽을 나누는 기준도 꿈꾸는 당사자의 기분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니던가.
가장 불쾌한 점은 꿈에서 본 장면이 조금의 변형도 없이, 그대로 현실이 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그럴지는 알 수 없었으나 최근에 꾼 모든 예지몽들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나중에 엄청난 일을 예지몽으로 꾸게 되면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제서야 나는 어렸을 때 읽었던 그리스 로마신화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어떤 여자가 미래에 다가올 비극적인 일에 대해 예언을 하는데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
결국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내용의 에피소드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녀의 이름 '카산드라'와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카산드라는 그녀 스스로가 예지 능력을 요구했고 아폴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벌을 받은 것이라 치더라도,
나는 아무 요구도 하지 않았고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나 역시도 카산드라와 같은 꼴이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카산드라처럼은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래, 내가 그렇게 나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나는 신에게 잘못하지는 않았다.
나는 설득력을 잃어버리는 저주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러지 않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어떤 비극적인 일이 생긴다면 나는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바꿀 수 있었던 미래는 아무것도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