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격, 부서진 영웅의 자리
누군가의 간헐적인 신음, 벽을 긁는듯한 거슬리는 소리와
미쳐버린 자가 내는 신경질적인 고함은 어쩌면 내 귀에만 들리는 환청일지 모른다.
작은 횃불은 소리 없이 거칠게 흔들리고, 축축한 돌벽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은
마치 나를 비웃듯 똑, 똑 울리며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어둠에 삼켜지길 바라며 눈을 감아도 그 기억은 빛이 어둠을 뚫어내듯
한줄기 달빛처럼 끔찍하리만치 차갑게 나를 관통했다.
"제프! 제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지고 말아요..."
"엘리사...! 나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동시에 나를 무너뜨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벌써 수백, 아니 수천번은
귓가에 맴돌았다. 수도 없이 들어온 그 간절한 목소리를, 나는 여즉 대답하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손을 가져간 허리춤의 텅 빈 칼집과 연막탄 고리는 내 과거를 비웃듯 매달려있다.
사람들은 나를 악마숭배자 혹은 배신자라 부르고, 이 감옥은 이름을 지워냈다.
가슴에 모든 것을 묻고 도망친 나는 더 이상 어떠한 이름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나를 가장 먼저 배신한 것은 나 자신이다.
-
되풀이되는 기억에 표류하던 정신을 끄집어낸 발자국 소리는 젖은 돌바닥 위를 조용히 두드리며 다가왔다.
이곳을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더군다나 배신자인 나에게 관심 갖는 이는 더더욱.
모든 질문과 비난에 침묵으로 답하고 이곳으로 도망친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 당신이 제프로군요."
낯선 목소리, 쇠창살 너머 벽에 기대어 다리를 꼬고 서있는 그녀는 얼핏 보기엔
낮은 서클의 풋내기처럼 보였으나, 그럼에도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기운은
ㅡ단순한 호기심이나 어리석은 용기로 나를 찾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듯ㅡ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퉁명스럽게 발치의 돌멩이를 툭툭 차던 그녀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토미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움찔하며 발밑의 쇠사슬을 건드렸고,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다리에 묶여있지 않은 채 방치된 녹슨 쇠사슬은 달아날 생각이 없는 나를 위한 지그프리트의 배려겠지.
그녀는 쇠사슬을 한번 쳐다보곤 말을 이었다.
"루어스로 간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기에 국왕을 만나 뵙고 오는 길이에요.
스스로 근신을 택한 당신의 침묵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솔직히 말하죠, 임무에 실패하고 아들을 내팽개친 머저리라 생각했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입고 있는 카쿰과 같은 색의 빨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 방금 당신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 까지는 말이죠."
쇠창살 너머의 그녀는 순간 마이소시아의 현자와 같은 혜안을 가지고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착각을 일으켰다.
대답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순간 머저리라는 호칭도 어울린다고 생각하고는 피식 웃음이 났다.
"머저리도 꽤나 어울리는군"
다시 허리춤의 빈 칼집을 만졌다. 오늘 처음 본 그녀이지만
예상밖에도 토미의 이야기를 가져왔기 때문일까.
"토미... 엘리사와 나의 아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
내 이름이 아직 패배자가 아닌 루어스의 그림자라 불리던 때가 있었다.
궁정의 복도를 따라 울리는 발걸음 소리.
이어 화려하진 않지만 세련된 샹들리에와 단순히 기계적으로 묘기를 선보이는 어딘지 쓸쓸한 광대들,
그리고 은빛 갑옷의 남자를 사이에 두고 나는 언제나처럼 슬레이터 왕 앞에 무릎 꿇었다.
"제프."
왕의 옆에 서있는 남자는 나를 향해 목례했다. 그는 자신을 기사대장 지그프리트라 소개했었다.
그의 은색 갑옷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들과, 투구 사이의 모든 이치를 초월한 듯 한 눈동자는
이미 상당한 실력과 경험을 갖춘 남자임을 알아보기에 충분했다.
지그프리트의 인사에 나를 내려다본 국왕은 광대들과 시종들을 물렸다.
"고개를 들라 제프, 잘 와주었다. 토미는 잘 지내는가?"
"예, 저보다는 엘리사를 닮아 어디서든 밝은 아이로 자라고 있습니다."
"그렇군... 엘리사를 보고 싶어 하진 않던가."
반가운 기색도 잠시, 그의 눈에 연민이 스친 것을 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네, 그녀가 밀레스에서 행방불명된 것은...
그대에게도, 토미에게도 힘든 일이었지만, 나 또한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네."
꿇어앉은 차가운 돌바닥이 순간 대평원의 던전 속 질척대는 깊은 늪처럼 느껴졌다.
이미 지난 일인데도 방금 일어난 일처럼 가슴을 도려내는듯한 기분에 용건부터 물었다.
"오늘의 부름은 무슨 일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바닥에 비친 샹들리에의 그림자가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래... 그 밀레스에서의 일이다..지그프리트?"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그는 지그프리트에게 눈길을 주고는 일어나 뒤돌아섰다.
이어 지그프리트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미소짓곤 말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이 엘리사를 생각나게 해 가슴이 답답했다.
"제프, 최근 불길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밀레스마을에서의 보고가 있었소.
시체가 일어나 사람들을 공격하였으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날개 달린 악마가 사람들을 잡아먹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한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
그래서 수차례 공문을 내어 모험가들을 보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소."
순간 시간이 정지하고 심장이 얼어붙은 듯했다.
지독한 한기를 품은 마음속 불안이 지그프리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타고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와 목을 움켜쥐는 듯했다.
"... 제프, 이 일은 엘리사와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오."
마지막에 나온 지그프리트의 말에 그를 쳐다보았다.
차마 하기 힘든 이야기를 꺼낸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전한
엘리사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온몸이 산산이 깨져 비산하는 느낌을 주었다.
"하여 이 사건의 조사에는 제프 그대가 적임이라 판단하여 명한다.
원인을 밝혀 해결하고 소문의 괴물들을 토벌하여 주민들의 안전을 확보하라."
명령은 내리는 왕의 말은 한 치의 의심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으나
뒤돌아 선 모습에서 저편의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이미 중간부터 소문의 진위도, 시체와 악마라는 몬스터들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표정일지 나조차도 모를 얼굴을 숨기고자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명하신 대로."
-
헐벗은 나무가 메마른 가지를 부딪히며 겨울을 노래하는 것과는 반대로
밀레스마을을 덮은 안개는 평소보다 유난히도 짙고 끈적였다.
대낮임에도 집집마다 걸어 잠근 문과 여기저기 상처 난 건물들,
무언가에 쫓기듯 겁에 질린 채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재촉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일주일 전의 기억을 더듬었다.
루어스의 여관 2층 응접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아래층의 웅성임은 이유 없이 초조하게 만들었다.
얼마 뒤 조용히 들어온 그녀는 간단한 다과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초조함이 더해져 재촉하듯 말문을 열었다.
"리루, 부탁한 것은 알아보았나?"
"지그프리트가 말한 대로예요, 걸어 다니는 시체와 악마에게 공격당한 사람들을 목격했다는 것 외에는ㅡ“
"... 꼭 시체와 악마 이야기가 아니어도 돼,
조금이라도 특이한 정보는 없었나? 혹시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면...“
나는 신경질적으로 말을 끊으며 책상을 내리쳤다.
리루가 내어온 애꿎은 커피잔이 박살 나며 쿠키들과 함께 나뒹굴었다.
그녀는 내손에 흐르는 피를 보곤 파란색 손수건을 건네며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제프, 여관길드의 정보는 마이소시아 제일이에요. 지금 당신의 행동은 평소와 많이 달라요.
우리를 시험해 보는 발언은 이번만 넘어가겠어요."
"... 미안하게 되었군"
"괜찮아요, 지그프리트는 이 일이 엘리사 씨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죠?
침착함을 잃은 제프의 모습을 처음 구경 한 걸로 충분해요.
시체와 악마에 관한 얘기라면 그것뿐이지만 조금 특이한 내용이 있어요."
"어떤 내용이지?"
리루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품속의 편지를 꺼냈다.
편지는 일반인은 열 수 없는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는 여관길드 만의 연락수단이었다.
"밀레스의 텔리도아라는 상인이 있어요. 피에트의 테이마라는 노인과
가끔 지하묘지의 독거미알을 거래하곤 하죠. 테이마는 건강에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응시했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느 때처럼 독거미알을 구한 텔리도아가, 테이마의 집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을때ㅡ“
천천히 편지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리루는 나의 손에 난 상처를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곤 어느새 해가 져 어두워진 응접실의 램프에 불을 밝히곤 자리에 앉았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허탕 쳤다고 불평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네요 “
“마지막 기억?”
“네, 문을 열어준 직후 갑자기 엄청난 졸음이 몰려왔다고...“
“나르콜리... 마법사군.”
"그들의 기억대로라면 별다른 주문도 없이 말이죠."
주문을 외우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내가 알기로 최소 마스터 등급의 마법사다.
지금 밀레스에서 벌어지는 일은 너무도 이상했다.
시체와 악마를 포함해 마스터인 마법사가 평범한 상인과 노인을 추적해 허탕을 치며 찾는 것이 있다라...
"... 마지막 정보예요, 당신이 찾는 사건이 일어난 무렵부터 높은 서클의 모험가들이
마을에서 무언가를 수소문하고 다닌다는 이야기 까지에요."
그녀는 여태까지의 정보가 담긴 여관길드의 편지를 건넸다.
"시체와 악마, 마을을 찾는 모험가들. 두 가지 사건은 서로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아요. 제프, 당신의 실력은 알고 있지만... 무운을 빌어요."
리루가 건넨 편지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내가 텔리도아를 만나보도록 하지."
어떠한 확답도 내리지 못했지만 내 본능은 그 끝에 반드시 엘리사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작은 시골 마을, 신들의 이드라 불리는 신성한 땅에 나타나는 시체와 악마.
그리고 평생 칼 한번 뽑아본 적 없을 듯한 이들이 사는 곳,
그저 축축한 흙냄새와 신앙이 전부인 그곳에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자들과
높은 경지의 모험가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하나 둘 발을 들이고 있었다.
-
짙은 안개는 마치 오래전부터 이 땅을 지배해 온 주인처럼 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루어스의 건물과는 대조되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밀레스의 식당 구석진 자리에서 그를 만났다.
낡은 경첩은 삐걱이며 소리를 내었고,
두리번거리던 텔리도아는 나를 발견하곤 자리를 가리키며 헛기침을 했다.
"제프.. 루어스의 그림자를 내가 직접 보는 날이 있을 줄은 몰랐소."
나는 괜한 서두름 없이 자리에 앉아 와인을 주문했다.
"리루에게 들었네, 그날 테이마와 함께 있었던 일을."
와인을 마시는 그의 목 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래, 졸음이 몰려온 탓에 기억은 흐릿하지만... 그게 마법이라고 하지?
지하묘지에서 독거미의 알이나 겨우 구하던 게 고작인 내가
살아생전 직접 그런 마법에 당해볼 것이라곤 상상이라도 해보았겠나?"
이미 어느 정도 취기가 올라있었던지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네, 아무튼 그는 분명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소, 문을 열자마자 허탕 쳤다며 중얼거렸지.
그리고 내가 테이마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소."
텔리도아는 다시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생각에 잠긴듯한 얼굴로 말했다.
"...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물으러 온 것은 아니겠지? 마침 바로 어제 또 다른 이가 나를 찾아왔소."
"또 다른 이?"
"그래. 그녀 또한 모험가였소, 짙은 남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목소리로 알 수 있었지.
등에 매고 있는 금빛의 큰 사람만 한 도끼도 보았는데...
그런 걸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한 거요? 모험가란 자들은 하나같이 상식적이지가 않아.“
식당의 문 틈 사이로 들어온 겨울바람이 우리 사이를 스쳐갔다. 그는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한차례 떨곤 말했다.
"그녀는 돌려 말하지도 않았소, 내게 멘트문명의 유물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아냐고 묻더군."
순간 내 요란한 심장소리가 이곳의 웅성거림을 뚫고 귓가를 울렸다.
멘트문명, 오래전 멸망한 선문명의 유산. 그들의 그림자인 유물들이 이곳에 잠들어있다니.
나의 변화를 눈치챈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재차 흥분하며 말했다.
"그녀는 큰돈을 내겠다고 했소. 내가 아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이야기해 달라고!
하지만 날 때부터 이곳에서 자란 나조차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말했어.
멘트문명은 또 무엇이고...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고 이야기했지.
혹시나 갑자기 그 도끼를 들이밀고 협박이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고 무서웠지뭔가.
아무튼 그렇게 답하니 고맙다고 하고는 바로 돌아가버리더군."
나는 한동안 그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 두려움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이야기는 오히려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불러왔다.
텔리도아와의 대화를 마치고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식당 한편의 유리창은 차가운 겨울 바람에 울부짖듯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무심코 허리춤의 칼집을 쓸어내렸다. 수족과 다름없을 터인 단검이 마치 내 안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엘리사...”
엘리사가 사라진 곳, 밀레스. 더군다나 지금 이 시점에 강자들이 몰려드는 이유.
멘트문명의 유물, 선문명의 유산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지금의 리콜이나 단발성 스크롤 같은 마법물품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들뿐이다
그런 유물의 힘이 작용했다면 엘리사의 행방불명은 설명이 가능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모험가들의 방문은 단순히 루어스의 공문 때문임이 아님을 알아냈다.
단검을 쥔 손이 떨렸다. 지크프리트의 말이 점점 실체를 띄고 가슴팍을 따끔따끔하게 찔렀다.
엘리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텔리도아가 말한 그녀를 찾아야 한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