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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께 보내는 편지 세오
암살격 - (2)
296 2025.09.09. 14:28

암살격, 부서진 영웅의 자리

















짙은 안개는 여전히 마을을 뒤덮고 있었다.

흩어진 구름 같은 정보들 사이로 번뜩이는 단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본능은 이런 이야기의 파편들이야말로 진실에 닿는 길목에 도달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밀레스는 그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모험가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금빛 도끼를 멘 여전사
바람처럼 사라진 마법사, 가기에 이름 모를 수많은 자들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약속된 무대라도 되는 듯, 이 마을에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하나. 멘트문명의 유산.
그리고 그것과 관련 있을지 모르는 시체와 악마.

심장이 불길하게 요동쳤다.

만약 그 힘이, 엘리사의 실종에 얽혀 있다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 어쩌면 그녀가 걸어간 길 위에 발을 디딘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던 중 무심히 공터로 시야를 옮기다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었다.
그곳에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지나갔다.
안개 속이라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이 기척은 분명 평범한 주민이 아니었다.

나는 단검을 움켜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안개를 가르며 공터로 빠져나오자,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것들을 보았다.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들. 사람의 옷자락을 걸쳤으되 얼굴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고
텅 빈 눈구멍임에도 앞이 보이기라도 하는듯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순간, 발밑의 돌이 구르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이쪽을 향해 고개를 젖히며 짐승 같은 소리를 토해냈다.

“그으스르...”

‘... 언데드!’

한때는 이 마을의 농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보다 추악한 형상이 되어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다가 올 전투를 대비해 숨을 한차례 고르며 단검을 뽑았다.
시체들이 진흙을 밟는 소리와 함께 달려들던 순간, 허공을 찢는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메가블레이드!”

거대한 도끼날이 안개를 가르며 떨어졌다. 첫 번째 좀비가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두 쪽으로 갈라졌다.
진흙과 썩은 피, 뼛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나는 순간 날아드는 파편에 눈을 가리고, 천천히 그 힘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짙은 남색 갑옷. 거대한 뿔의 투구, 등 뒤로 금빛의 도끼를 짊어진 여전사.
텔리도아가 말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그녀는 시체조각을 흘끗 보고는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거기 당신! 멍하니 서 있지 마! 이것들은 더 이상 인간이기를 그만둔 것들이다.
기여코 유물의 그림자가 여기까지 드리웠군.”

마지막 말에 흠칫하여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보고있지 않았다.
서슬퍼런 눈은 여전히 안개 너머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들려왔다.

“망할 영감...! 이게 무슨 자료수집이야... 유물이 작동했다면 인간의 영혼을 먹고
이 땅에 마수를 뿌리고 있겠지. 공교롭게도 그게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일이고.”

엘리사의 마지막 모습이 번개처럼 뇌리에 스쳤다.

‘토미를 부탁해요 제프.’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고자 단검을 꼭 움켜쥐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그녀는 보았는지 씁쓸하게 웃었다.

“모험가란 자들은 결국, 힘을 쫓아 움직일 뿐이지. 그 힘이 고대의 유산이라면 더더욱.”

그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개가 그녀의 발밑에서 갈라지듯 흩어졌다.

“이 힘은 단순한 것이 아니야. 어떤 자에겐 희망이겠지만, 또 다른 자에겐 저주일 테지.”

불결한 피비린내가 끈적한 안개와 섞여 폐부를 찔렀다.

“당장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써야겠지?“

뒤에서 나타난 시체의 썩은 손아귀가 내 목덜미를 덮치려는 순간, 그녀의 도끼가 공기를 찢었다.
그리고 쓰러진 시체가 땅에 닿기도 전에 그녀의 등 뒤로 또 다른 시체가 기어 나와 거세게 할퀴었다.

“아악...!”

수가 너무 많았다. 나와 그녀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숫자였다.
그때, 발밑의 땅이 갈라졌다. 엄청난 압력의 물줄기가 솟구치더니, 그녀 뒤의 좀비를 쓸어냈다.
이어서 뜨겁게 타오르는 붉은 불길이 다른 시체를 통째로 태워 올렸다.

“마레누스!”
“플라무스!”

안개를 뚫고 두 명의 마법사와 성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쿠라노!“

성직자의 음성이 덧붙여지자, 상처를 입은 그녀의 주위로 밝은 빛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 틈을 따라, 하나둘씩 모험가들이 안갯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을 사람들의 피난을 완료했다.“

“지금부터는 우리도 가세하도록 하겠어!“

각자의 무기와 주문이 빛을 내뿜으며 안개를 갈랐다.


-


치열한 싸움의 중심에서, 갑자기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기운이 꿈틀대며 일어났고
포효와 함께 안개가 찢겨 나가며 거대한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흉측한 가면 같은 얼굴, 회색 근육질의 동체, 하늘을 가릴듯 한 거대한 날개 악마의 가슴께에서 꿈틀대는 붉은빛.
그것은 유물의 핵이었다.

“크크... 오늘은 어느 놈을 잡아먹어야 할까?”

그 목소리. 그 속에서 엘리사의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엘리사...!”

단검을 쥔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악마는 이쪽을 발견하곤 내 흔들림을 비웃듯 웃음을 터뜨렸다.

“엘리사? 크하하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그 년이 몸을던져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이 마을 전체가 제물이 되어 완전한 나는 피조물로 태어났을 것이다.
미완의 의식과 불완전한 핵... 그래서 나는 인간의 고기를 먹어 힘을 메워야 하는 존재가 되었지.”

모험가들의 얼굴이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졌다. 그러나 내 귀에는 다른 말만이 메아리쳤다.

‘엘리사의 희생...’

악마의 목소리는 나의 정신을 뱀처럼 휘감으며 차갑게 속삭였다.

“이 핵을 부수면 나도 소멸하겠지.. 하지만 이 안에서 아직 고통받는 그 년의 영혼또한 함께 소멸하리라!”

안갯속 전장은 피비린내와 마법이 내뿜는 빛과 성스러운 빛으로 뒤엉켜 있었다.

마법사들의 주문은 갈라진 땅에서 불기둥과 물줄기를 토해냈고,
성직자의 성스러운 빛무리는 상처입은 그들을 감쌌다.
내 공격에 밀려난 악마의 틈을 놓치지않고 그녀의 도끼가 날개를 찢으며 어깨를 파고들었고
도적들이 던진 단검은 연달아 가슴께를 꿰뚫었다.

“지금이야! 밀어붙여!”

모험가들의 외침 속에, 악마의 육체가 비틀거리며 핏빛으로 요동치는 가슴 중앙의 심장이 겉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바로 유물의 핵. 이 악마를 지탱하는 매개체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검을 움켜쥐었다.
주변의 상황이 느리게 보이고 손아귀는 불이 인 듯 뜨거웠다.

마치 나만이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처에 분노한 악마는 그녀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방어를 포기하며 손에 쥔 도끼를 종으로 올려쳤고
말도 안 되는 각도에서 휘둘러진 거대한 도끼의 일격은 악마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그리고 공격을 피하지 않은 그녀 또한 저만큼 날아가 처박혔다.

악마는 고통에 찬 괴성을 토해내며 비틀거렸다.

“크하악... 인간 주제에...!”

한쪽만 남은 거대한 팔과 날개가 마구 휘둘러지며 모험가들은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위해 단검의 날 끝을 곧바로 악마의 심장을 향해 바로 세웠다.

그 순간, 틈을 놓치지 않은 마법사의 불길이 악마의 얼굴을 휩쓸었다.

’... 지금이다!‘

나는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몸을 날렸다. 붉은 핵이 눈앞에서 요동쳤다.
바로, 찌를 수 있다. 단 한 번이면 끝낼 수 있다.

그때였다.

귓가에 낮고 비릿한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핵을 부수면 나도 소멸하겠지.. 하지만 이 안에서 아직 고통받는 그 년의 영혼또한 함께 사라지리라!’

나는 얼어붙었다. 깨문 입술에선 비릿한 피가 스며 나왔다.
망설임을 눈치 챈 악마의 입이 찢어지며 웃음을 토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네 단검이 나를 죽이는 순간, 그 년도 함께 부숴지리라.”

심장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칼끝이, 겨우 한 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손이 떨렸다.

’제프! 제발...!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지고 말아요..‘

환청처럼,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사...! 나는..."

거친 숨을 삼켰다. 눈앞의 악마는 비틀거리고 있었고, 상처는 재생되려하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러나 내 손은, 악마를 찌르지 못했다.

악마의 심장은 눈앞에서 맥박 치듯 요동쳤다.
그러나 이미 망설임이 자리한 손끝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악마는 나의 머뭇거림을 조롱하듯 웃었다. 그 웃음은 천둥 같았고, 차가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갈랐다.

“크하하하 인간의 나약함이란... 언제나 이토록 달콤하지.”

거대한 팔이 휘둘러졌고, 멀리 날아 진흙바닥에 떨어졌다.
온 몸이 부서지는 듯한 격통을 느끼고 입가로는 검은 피를 울컥 토해냈다.

주변의 모험가들도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마법사와 성직자들은 마력의 고갈로 무릎을 꿇었고 그녀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악마는 피범벅의 몸으로 우뚝 서 있었다.
붉은 핵은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이미 스스로 다시 고동치고 있었다.

악마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머리채를 붙잡고 피투성이 얼굴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너는, 나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네놈이 두려워한것은 내가 아니야...
네 단검은 나보다 그년을 향해 떨고 있었어.”

나는 답할 수 없었다.
악마는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안갯속으로 스며들었다.

“마음이 바뀌었다. 너는 죽이지않는다. 다음엔 네놈이 지키려는 것까지 함께 삼켜주도록 하지.“

찢어지는듯 한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전장은 고요해졌다.
나는 결국 단검을 찔러넣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


쇠창살 너머의 등불이 길게 흔들리며 우리의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손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단검을 쥐고 있는 것처럼,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암살격이란...”

나는 중얼거렸다.

“그 심장을 향한 궤도, 단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결단.
엘리사의 이름 앞에서 멈추고 만 실패를 재물로 터득한 저주받은 필살기이다.”

다시금 손끝으로 허리춤의 빈 칼집을 더듬었다. 차가운 가죽이 손바닥에 닿자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악마의 조롱이 되살아났다.

“그 대가는 치욕이었지. 패배자의 이름, 배신자 그리고 악마숭배자의 낙인.“

잠시 눈을 감았다. 떠오르는 건 고통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던 엘리사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완전히 지워지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었다.”

내 눈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말없이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쇠창살 너머의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네라면...“

내가 이 감옥까지 찾아온 그녀에게 받은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악마의 심장을 반드시 꿰뚫어 내가 못다 한 일을 끝마쳐주었으면 한다.
그런 뒤에 자네에게 나의 기술을 전수해 주도록 하겠다.”

나는 그녀에게 허리춤에 찬 칼집과 연막탄 홀더를 던졌다.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말 없이 한참을 지켜보다 몸을 돌려 감옥을 떠났다.

우리를 불쌍하게 느꼈을까, 내 망설임의 슬픔을 이해해 주었을까.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느낀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녀에게 누군가의 인생과 사랑과 고통이 뒤엉킨 끝에 남겨진 무게를 떠넘겼다.

쇠창살 너머의 공기는 한동안 고요했다. 내 이야기는 끝났고, 더 이상 덧붙일 말도 남아있지 않았다.
벽에 걸려 있던 작은 횃불이 바람도 없는 곳에서 파르르 떨리더니, 마침내 작은 불꽃을 남기고 꺼졌다.

순간 방 안은 짙은 어둠에 잠겼다.

나는 이상하게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 내려놓은 듯
가슴에 얹혀 있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오랜 세월을 태워내다 결국 사라진 횃불처럼, 내 짐도 이제 다 타버린 것일까.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내 몫이 아닌 싸움
그러나 반드시 끝나야 할 싸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 토미를 부탁한다... 그리고... 엘리사도...“

마지막으로 힘겹게 내뱉은 말은 도착할 일 없이 어둠 속에서 흩어졌다.
내 앞에 서 있던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가며, 감옥 안은 다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침묵을 끌어 앉은 나는 끝내 잠들지 못하는 영원의 밤에 천천히 몸을 기대었다.

횃불이 다한 자리에 남은 건 오직 어둠뿐이었지만,
어쩐지 이 어둠은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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