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격, 그림자의 그림자
아벨의 밤거리는 언제나 현란했다.
거리를 수놓은 불빛들이 얽히며 마치 도시가 불면의 축제를 이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화려함 이면에는 항상 그림자가 깔려있듯,
수많은 타인의 상실과 슬픔을 품은 음울한 어둠 또한 느껴졌다.
나는 거리를 걸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가슴을 옥죄어오는 그날의 기억은 벌써 수년 째 악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엑스쿠라눔의 새빨간 얼룩처럼 지워지지 않는 악몽은 깨어있는 시간조차 놓아주지 않았다.
짙은 향수와 술 냄새, 얽히는 대화들.
바다의 비릿한 냄새와 사람들의 땀이 섞인 공기가 숨을 막히게 했지만, 답답함은 오히려 마음을 달래주었다.
이끌리듯 반짝이는 간판의 주점 앞에 멈추어 섰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와 잔 부딪히는 소리는 잠시라도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념도 잠시, 언제나처럼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따뜻한 공기가 얼굴을 감쌌다.
자욱한 담배 연기와 술 냄새, 그리고 뒤섞인 욕설과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잠시 그 소란에 잠식되었다가 마침내 어둑한 구석 자리를 찾아 천천히 걸어가 앉았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세어에게 기척을 냈다.
"세어, 와인 한 잔만 부탁해요."
며칠 째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일까, 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피로 때문일까.
이번의 악몽은 평소보다 오래가고 있었다.
붉은 액체가 잔에 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맞추어 가슴 한편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잔을 입가에 댔지만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목구멍 어딘가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
"누나... 가지 마... 제발!"
서럽게 우는 목소리,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 옷자락을 붙잡은 작은 손.
나는 힘겹게 그 손을 뿌리쳤다.
"잠깐이면 돼, 금방 돌아올 거야."
거짓말이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짧은 여정이 되진 않을 것을.
그때는 분명 이것이 더 나은 방법일 거라 각오를 다졌었다.
그리고 이 기억을 평생 후회하게 되었다.
"그 부부의 핏줄이군..."
고고학자였던 부모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어느 날,
우리를 찾아온 짙은 녹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그는
‘어둠의 전설’과 ‘뮤레칸’의 재림을 추종하는 단체의 일원이라 소개했다.
그들은 멘탈로니아의 여덟 번째 정신체이자 자신들의 유일한 신인
'뮤레칸'을 추종하는 단체이며 원하는 세상이 찾아왔을 때
뮤레칸의 힘을 빌려 부모님을 되살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믿지 않았지만 동생의 눈은 작게 떨리며 그 속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날 이후 마을은 변하기 시작했다. 같은 로브를 입은 자들이 하나둘 늘어났고
골목마다 스며든 어둠은 점점 짙어져 갔다.
동생은 그들의 말에 빠져들었고, 나와는 다르게 남자를 곧잘 따랐다.
흑마법의 기초를 습득하며 저주의 마법들을 배워나가기 시작했고
부모님의 핏줄이라는 말에 의미가 있었던지 적어도 동생에겐 위해를 끼치지는 않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내가 이 상황을 해결하겠다. 그런 핑계로 자신을 달랬다. 그렇게 도망쳤다.
수년이 흐른 뒤 다시 찾은 산골마을 타고르는 전혀 다른 곳이 되어있었다.
칼과 마법이 부딪히는 소리와 루어스 병사들의 외침이 뒤섞인 전투의 한가운데,
동생은 어떠한 의식의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기운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내가 기억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동생이면서 동생이 아닌,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달려 나가 동생을 저지하려고 했다.
단검과 그의 손이 충돌하자 믿을 수 없게도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불똥이 튀었다.
충격을 견디지 못한 단검이 부러지며 바닥에 내팽개쳐졌고
이어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병사들을 한 번의 손짓으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뒤돌아서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누나."
어느새 다가온 그는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곳을 떠나, 그때처럼."
그 말을 끝으로 내 의식은 희미해져 갔다.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
달콤한 와인은 상처를 소독하듯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만약 그때 떠나지 않았다면...
만약 함께 견뎌냈다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잔을 내려놓자 주변의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다시 귓가로 스며들었다.
"일리아, 또 악몽을 꾼 거야?"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파란 드레스를 입은 세어는 이곳의 마담이자
처음 도망쳐 나왔을 때부터 나를 돌봐준 사람이다.
"... 늘 그랬는걸요, 이것이 속죄라면 아마 평생을 따라다닐 거예요."
"일리아, 너는 아직 어려.. 물론 미모는 나에게 한참 못 미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우드랜드의 붉은 꽃으로 만들었다는 세어의 향수 냄새가 코 끝을 자극했다.
세어는 내 맞은편의 의자를 꺼내어 앉으며 이야기했다.
"글쎼, 귀엽기만 하던 꼬마가 언제 이렇게 칙칙한 사람이 됐을까...
아직 이런 곳에서 궁상을 떨기엔 시간이 너무 아까운 게 아닐까?"
입안에 털어 넣던 와인의 맛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 나는 일렌을 구하지 못했어요. 그때의ㅡ"
"일리아, 아직 구하지 못한 건 아니란다. 네가 이곳에 온 지도 10년이야.
난 아직도 너를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나는걸, 꼬맹이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눈을 하고 나타났잖니?
타고르에 다녀온 뒤 그동안 어떤 각오로 실력을 키웠는지도 알아.
너는 모르겠지만 네 이름은 이제 이곳에서 꽤 유명해."
"... 세어는 그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아요, 언제나 따뜻하죠..."
세어는 따뜻하게 미소 짓곤 고개 숙인 내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야 나는 아이들을 좋아하는걸, 비록 엄마가 되어보진 못했지만..."
그녀의 사정은 알지 못한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어렴풋이 보이는 그늘의 반작용이라 짐작할 뿐.
"그래서 일리아, 부탁이 있어."
"세어의 부탁이라면..."
조금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세어는 테이블에 몸을 가까이하며 내 와인병을 가져가 한 모금 따라 마셨다.
"마을에 불쌍한 아이가 있어. 아빠랑 둘 뿐인데도 항상 웃는 밝은 아이라 더 마음이 쓰이는 꼬마..."
세어는 눈을 지그시 감고 허공에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토미... 그 아이의 이름이야. 얼마 전부터 마주쳐도 말없이 피하기만 하고
더 이상 웃는 모습도 보여주질 않아...
걱정돼서 찾아가 보았더니 아빠도 없이 혼자 집을 지키고 있더라니까...
무슨 일인지 물어도 대답도 안 해주고... 음식은 내가 챙겨주곤 있지만..."
눈물을 글썽이는 세어는 진심으로 토미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일리아, 네가 토미의 아빠를 찾아주었으면 해."
"알겠어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연신 고마워하는 세어에게 걱정 말라며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여관으로 돌아와 취기를 빌려 악몽을 잊고자 침대에 누웠다.
오랜만에 악몽이 찾아오지 않은 밤이었다.
-
깊게 잠든 뒤 가벼워진 몸을 느끼며 간단히 채비하고 1층으로 내려왔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시선을 옮기자 주황머리의 꼬마가 여관의 일을 돕는지
여관 주인을 따라 장작을 옮기다 넘어지는 광경을 보았다.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의 꼬마는
안쓰럽게도 눈을 꼭 감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여관주인에게 간단히 목례한 후 토미를 불렀다.
"보기보다 듬직한걸? 다치진 않았어?"
토미는 무릎을 만지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세어에게서 이야기를 들었어 토미. 아빠는 어디에 있니?"
아픈 와중에 아빠의 이야기를 듣자 서러워졌는지 토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내 무언가 떨쳐내듯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했다.
"아빠가 모르는 사람 하곤 이야기하지 말랬어,
당신은 아빠와 같은 도적이야?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그저 남일 뿐인 불쌍한 아이의 사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꼬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단순한 어린아이의 고집이라기보단
무너진 세상에서 붙잡고 있는 마지막 희망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잠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검의 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난 네 아빠와 같은 도적인걸, 보면 모르겠어?"
그에게 증명이 될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카쿰 안쪽의 칼집에서
단검을 빼내어 공중으로 한 바퀴 돌리곤 다시 낚아채며 간단한 묘기를 보였다.
토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말했다.
"좋아, 그럼 누나를 믿고 이야기해 줄게. “
순간 신뢰를 가져다준 것은 잠깐의 묘기일지 아니면 그에게만 보이는 어떤 다른 부분일지 궁금해졌다.
여관 한구석 테이블로 아픈 무릎을 만지작거리는 토미를 데려와 앉혔다.
“아빠가 떠난 지는 오래됐어, 왜 떠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멋진 도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암살격’ 이라는 필살기도 가지고 있다고 했는걸? “
필살기라는 이야기에 잠시 흥미가 생겼다.
그런 생각을 감추며 토미와 눈을 맞춘 뒤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토미의 아빠를 향한 자부심이 흘러넘치는 목소리는 아직 꺼지지 않은 등불 같았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주변을 살피는 흉내를 내더니 이야기했다.
“아빠는 루어스성에 간다고 했어, 사라진 게 아닐 거야
어딘가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거야!...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야... “
따뜻한 시선으로 토미의 말이 끝날 때 까지 기다렸다.
아빠의 이야기를 마친 토미의 눈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좋아 나도 아버지와 같은 도적이니까... 토미, 너의 의뢰를 수락할게.“
내 말에 눈을 반짝였다가 다시 근심 어린 눈이 되어 말했다.
“그렇지만 난 돈이라곤 없는걸... 누나에게 줄 만한 것도ㅡ“
“토미, 보수는 세어에게 이미 지불받았어 나중에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렴. 내가 반드시 아빠를 찾을게.”
토미는 작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성으로 가 알현 신청을 한 뒤, 루어스의 여관길드를 찾았다.
도적이란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이기 때문에 길드의 이용은 필수불가결했다.
여관은 밤에도 불을 끄지 않는다.
그 빛은 환영이 아니라 수면아래 침묵한 기록들을 드러내는 등불이기도 했다.
“제프를 찾고 있다.”
짧은 한마디를 떨어뜨리자, 여관 안에 싸늘한 공기가 일었다.
시끄럽던 웃음소리가 서서히 죽고, 속삭임과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
어둑한 등불이 위태롭게 깜박였다.
“큭큭 겁쟁이를 말하는 건가? 악마 퇴치라더니 꼬리 말고 튄 놈. 저 아래서 어디에서 썩고 있을걸?”
“아니지, 자기 발로 루어스로 찾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는걸?”
어느 사내가 뱉듯이 웃었고, 옆에 있던 또 다른 자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탁자 위엔 술과 음식 대신 날카로운 무기와, 냄새 밴 낡은 종이쪽지가 어지럽게 놓여있었다.
낄낄거리는 웃음, 짐짓 무심한 퉁명, 그러나 눈빛은 모두 경계로 얼어 있었다.
자리를 뜨려던 그때였다.
여관 안쪽에서 이쪽을 응시하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고,
눈이 마주치자 따라오라는 듯 한 손짓을 보였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를 따라 여관의 2층으로 향했다.
평범하게 앞치마를 두르고 복도를 앞장서 걸어가는 그녀에게서
묘하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 사람은 알고 있다.'
조용히 눈앞의 여자를 관찰하며 이곳의 책임자 이거나 상당한 위치를 가진 인물임을 짐작했다.
낡은 팻말로 응접실이라 적힌 곳에 들어와 앉았고 오히려 내가 압도되는 기분을 뿌리치고자 이야기했다.
"아하, 당신이 여기의 책임자 같은ㅡ"
"도적 일리아라고 부르면 될까요...?"
내 이름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죠?”
그녀는 부드럽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제 이름은 리루에요, 예상하신 대로 이곳의 책임자예요.
당신은 아벨에서 꽤나 유명하시잖아요...? 저희 쪽에서는 타고르의 일로 더 유명하지만요.”
숨이 턱 막히는 이름이었다.
타고르.
본능적으로 단검에 손이 가려고 했다.
“... 본론이나 이야기해요!”
리루를 노려보며 저항하듯 소리쳤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아요."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호흡을 그녀도 본 탓인지 잠시 뜸을 들였다.
"제프... 그는 당신이 들은 대로 어떤 임무에 실패했어요."
"1층에서의 이야기.. 혹시 도망이 아니라 처형이나 살해당한 건ㅡ“
리루는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 말을 끊었다.
"아뇨, 제프는 살아있어요. 하지만 그 남자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당신이 직접 확인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결국 똑같이 떠도는 소문만 믿게 될 테니까."
제프의 이야기를 하는 그녀에게서 진심 어린 걱정이 느껴졌다.
"... 목적대로 제프를 찾아요. 그가 어떤 선택을 했든,
진짜 이야기를 남겨줘요. 단순히 패배해 버린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말은 명령도, 강요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와 같은 죄책감을 품고 있는 자의 간절한 바람처럼 들렸다.
지금까지 단순히 무책임하게 아들을 떠난 아빠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깊은 토미의 자부심과, 리루의 진심 어린 걱정.
그리고 암살격이라는 기술과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던 악마라는 존재.
패배자라는 주변 소문들과의 석연치 않은 불일치는 혼란스럽게만 느껴졌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고양감이 고개를 들었다.
-
호흡을 따라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여관을 나서 성문 앞에 서자 공기가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하얀 성벽은 파란 달빛을 따라 예리하게 반사되고 있었고,
바닥의 냉기는 발끝을 따라 천천히 파고들었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들어간 궁정 안은 내 예상보다 훨씬 조용했다.
긴 복도를 따라 도착한 알현실에는 단호한 침묵과, 오래된 샹들리에의 그림자만이 남아있었다.
무릎을 꿇은 나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왕과 옆에 서있는 은빛 갑옷을 두른 기사를 보았다.
호위로써 혼자인 게 당연한 듯한 그의 모습은 아직도 전장의 기운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의 절도 있는 고갯짓에 토미와 리루의 부탁으로 제프를 찾고 있다는 용건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한참 침묵을 지키고 있던 왕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제프 말이로군..."
낮은 음성은 알현실을 깊게 울렸다.
"제프는 이곳에 있다. 얼마 전에 보낸 중요한 임무에 실패했지."
왕은 의자를 조금 당겨 몸을 낮추듯 하며 말했다.
"실패의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 허나 제프는 스스로를 숨기기를 원했다."
"... 스스로 말입니까?"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스스로를 가둔다는 말은 도망이나 체포와 같은 행위와는 다른 종류의 고백이다.
"이유를 캐묻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
그 말에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권한이자,
동시에 그 진실을 다루는 데 요구되는 절제가 깃들어 있었다.
그의 눈빛에 작은 연민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 그는 스스로 근신을 택했다.
그대가 토미의 부탁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직접 그를 만나게 해 주겠다."
왕은 시종에게 손짓했다. 명백한 허락이었다.
"그는 이곳의 지하감옥에 있다. 그대가 직접 제프를 만나 이야기를 듣도록 하라."
시종의 등불이 앞을 밝히자 차가운 공기가 서서히 내려앉았다.
돌로 쌓은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끝에 습기가 스며들었다.
그때 앞장서던 시종이 앞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이야기했다.
"... 제프는 단순한 도적이 아닙니다."
대답하지 않고 그의 뒤를 응시했다.
"루어스의 그림자라고도 불렸습니다, 중요한 임무를 해결하며
기사대장의 반대에서 활동하는 그림자였죠... 단순히 패배자라 불릴 인물이 아닙니다."
시종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도착한 장소는 두터운 쇠문으로 가로막혀있었다.
문틈 사이로 불빛 하나 스며들지 않았고, 축축한 숨결과 같은 냄새가 감돌았다.
"이쪽입니다. 가장 안쪽 방에 제프가 있습니다. 이보게, 잠시 자리를 피해 주시게."
그는 입구를 지키는 간수를 불러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가볍게 목례했다.
나는 곧장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제야 심장이 서서히 빠르게 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토미의 얼굴, 리루의 눈빛, 왕의 이야기... 모든 것이 얽혀 하나의 질문으로 되살아났다.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도대체 왜 스스로를 가둔 거지?’
감옥 안의 작은 횃불이 벽을 타고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벗어난 자의 이야기를 들으러 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단순히 타인의 슬픔을 더듬으려는 건가ㅡ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축축한 바닥의 표면을 밟았다.
그 감촉이, 마치 지금껏 피하려 했던 내 죄책감까지 불러내는 듯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