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격, 그림자의 그림자
철창 너머, 그곳에 앉아 있던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피곤했으나, 무너지지 않았다.
"... 당신이 제프로군요."
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히 애꿎은 발치의 돌을 툭툭 건드렸다.
토미의 얼굴이 떠올랐고, 리루의 부탁이 스쳤다.
"토미가 당신을 찾고 있어요."
토미의 이야기에 움찔하는 그를 보았다.
발치의 족쇄는 묶여있지 않았다.
연민의 눈빛을 비치던 왕과 시종의 말이 떠올랐다.
"당신에 관한 소문들... 솔직히 임무에 실패한, 아들을 내팽개친 머저리라 생각했어요."
내 앞의 남자는 그 어떤 변명도, 탄식도 필요치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오히려 모든 것을 이미 받아들인 자의 고요가 그 안에 깃들어 있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물론 방금 당신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말이죠."
여기서 더 물어야 할지, 침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제프의 시선이 똑바로 나를 꿰뚫는 듯했다.
내 고민이 들켰나 하고 이상한 생각을 했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토미... 엘리사와 나의 아들..."
지그시 눈을 감은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놀라웠다.
밀레스에서 벌어진 아내의 희생과 악마의 이야기.
말은 간결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과 결정을 견뎌온 흔적이 묻어 있었다.
숨을 죽인 채 그의 이야기를 따라갔다.
쇠창살 너머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단순한 공포가 아닌 깊은 후회와 책임감이었다.
잠시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일렌의 작은 손, 울음을 참던 얼굴,
그 짧은 순간에도 이미 내 선택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음을...
그리고 토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빠에 대한 자부심과 동시에 남겨진 책임감...
그 기억들이 겹치며, 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그녀가 완전히 지워지는 건... 차마, 견딜 수 없었다.”
과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내 손과 도망쳤던 그날.
그리고 지금, 토미의 의뢰에 대한 책임감까지, 모든 것이 뒤엉켰다.
제프가 말한 실패 끝에 터득한 암살격이라는 필살기의 의미와 남겨진 선택의 무게...
무너진 자신을 다시 세우고, 남겨진 자들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결단...
그런 결단이 없다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의미가 없을 것임을 느꼈다.
“악마의 심장을 반드시 꿰뚫어 내가 못다 한 일을 끝마쳐주었으면 한다.
그런 뒤에 자네에게 나의 기술을 전수해 주도록 하겠다.”
단검을 쥔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가만히 지켜보던 그가 자신의 장비를 던졌다.
이 순간 그가 무엇을 결심한 것인지는 명백했다.
그리고 나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감옥을 빠져나왔다.
-
밀레스의 거리에는 오래 전의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향취가 조금씩 사라진 듯했다.
바람에 섞인 먼지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사건들의 흔적이 공기 속에 배어 있었다.
밀레스의 식당 한 구석에 앉아 빵을 뜯으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의 웅성임 속에 이런저런 정보를 조합하고 있을 때
갑자기 식당 문이 벌컥 열리며 낯익은 차림세의 인물이 걸어 들어왔다.
짙은 남색의 갑옷, 금색의 거대한 도끼.
제프의 이야기 속 여자였다.
"휴... 이곳은 여전한걸?"
식당 안 모든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킨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
별안간 내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테이블에 앉더니 자연스럽게 음식들을 주문했다.
그리곤 한동안 묵묵히 음식을 먹다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며 말했다.
“... 그 녀석의 동생쯤 되나?”
가만히 눈을 마주치곤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고, 그녀는 씩 웃으며 들고 있던 포크로 내 허리춤을 가리켰다.
"그 연막탄 고리. 특이하잖아? 본 적이 있어. 예전에 말이지."
천천히 빵조각을 내려놓았다.
그녀가 누구를 말하는지,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너, 여행객은 아니지? 이런 곳에 지금 찾아올 여행객도 없겠지만..."
"... 당신은?"
내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녀는 음식을 집어먹던 포크를 내려놓고는 이야기했다.
"이미 서로 알고 있는 것을 재확인하는 취미는 없어. 그 녀석, 대리인을 보냈군... 아직 결심이 서질 않았나?"
그 말에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의도를 숨기지 않은 도발이었다.
조용히 칼집에 손을 가져다 대며 대꾸했다.
"대리인...? 장난은 그쯤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살기를 비치며 낮게 쏘아붙이자 그녀는 포크 끝으로 접시를 톡톡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흥, 농담이야. 그 표정 보니 더는 못하겠네.”
그녀는 커다란 도끼 자루에 손을 얹고는,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네가 뭘 짊어지고 있는진, 대강 상상이 가... 그 녀석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도 알고 있거든?”
입술이 저절로 굳어졌다.
식탁 위의 빵 부스러기가 뿌옇게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때 받은 상처는 이제 아물었어. 몸은 돌아왔고, 귀찮은 일 따윈 질색이니 잘됬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끝내지 못한 일이 마음에 남더라... 그래서 다시 온 거다.”
고개를 들고는 내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우연히 널 만났지. 그게 다야.”
그녀는 술잔을 빙빙 돌리며 낮게 웃었다.
“악마가 나타날 때는 항상 안개가 짙어졌어. 그건 내가 직접 겪은 일이야.”
그녀는 잔을 들어 올려 목을 축이고는 자리를 뜨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개가 다시 깔리면, 그때 만나자. 그게 신호다.
따로든 함께든... 싸움은 피할 수 없을 거다.”
무의식적으로 긴 숨을 들이켰다.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녀 또한 이미 결심한 자의, 남겨진 무게를 함께 짊어지겠다는 나름의 암시였다.
밤이 깊어가자, 여관 창문 사이로 스며든 바람이 희미한 등불을 흔들었다.
침대에 몸을 누였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쉽사리 잠들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악몽은 시작되었다.
내 손 위로 일렌의 작은 손이 힘없이 떨어지는...
'누나... 가지 마... 제발...'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에 가로막혔다.
스스로 감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제프의 등, 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는 짙은 안개의 물결.
숨이 막혔다. 발끝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안개는 점점 두터워져, 마침내 괴이한 형상을 토해냈다.
불길한 심장의 붉은빛과 허기를 머금은 눈빛. 악마는 낮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일렌!!!’
거칠게 몸을 떨며 눈을 떴다.
가쁜 숨에 가슴이 오르내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
았던 어제의 날씨는 거짓이라 말하듯 밀레스의 하늘은 서서히 빛을 잃어갔다.
먼저 언덕 위의 지붕이 희미하게 가려졌고,
골목길의 간판과 사람들의 발자취가 흐릿해졌다.
안개는 천천히, 거스를 수 없는 속도로 밀려들었다.
회색빛 물결이 골목을 타고 스며들어 마침내 마을 전체를 감싸 안았다.
식당에서 그녀의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 눈을 좁혔다.
'악마가 나타날 때는 항상 안개가 짙어졌어.'
그 경고가, 지금 눈앞의 풍경과 겹쳐졌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말소리는 끊겼고,
모여 있던 행상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아침인데도 등불을 켜는 사람들의 손짓,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이 바람에 실려 흐르는 기척뿐이었다.
손끝은 저절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단검을 잡은 손 끝의 감촉이, 심장을 두드려 깨우듯 전해졌다.
멀리서 짙은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불어오더니,
안갯속에서 날카로운 그림자가 스멀스멀 드러났다.
피비린내와 고기가 썩는 악취가 섞인 냄새가 공기 속을 타고 퍼졌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도착한 그녀는 이미 도끼를 꺼내어 어깨에 걸친 채, 안갯속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속속들이 저마다의 무기를 쥔 사람들이 도착했다.
“... 왔군!”
짙어지는 안갯속에서, 전투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안개는 마을의 숨구멍을 막아버린 듯했다.
숨소리조차 뿌연 기운에 잠식되는 순간, 땅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처음엔 손가락이었다.
피로 굳은 듯 검게 썩은 손가락이 흙을 헤집고, 곳곳에서 더 많은 손들이 올라왔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울음 같은 비명이 마을을 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땅을 박차고 솟아오른 시체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가오기 시작했다.
썩은 살점은 흘러내렸고, 텅 빈 눈구멍은 정확히 이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공기를 찢으며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는 회색 악마가 나타났다.
그 존재가 나타나 포효하자, 시체들의 울음소리마저 순간 멎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크하하하, 네년 살아있었군. 나는 지금이 너무나도 즐겁구나."
"다시 보니 반갑기까지 한걸? 오늘은 꼭 두쪽으로 갈라주지!"
그녀의 눈빛에는 이전과 다른 무게감이 서려있었다. 첫 번째 전투의 기억이 선명한 듯했다.
그녀가 휘둘렀던 치명적인 공격.
완벽한 틈을 만들어냈지만, 제프의 망설임으로 결정적 순간을 놓쳤던 쓰라린 패배.
악마 역시 달라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무모해 보이는 공격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는지를 알고 있기에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그녀에 대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다가가 섰다.
“너, 발목 잡지 마라?”
그녀의 말을 신호로 전장은 삽시간에 과열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우리는 신중하게 거리를 재며 서로를 관찰했다.
악마가 날개를 펼치며 공중으로 떠올랐고, 그녀는 도끼를 단단히 쥐며 움직임을 주시했다.
곧장 급강하하며 시커먼 발톱은 머리를 노렸고,
몸을 틀어 투구의 면으로 공격을 비껴낸 그녀는 반바퀴를 돌며 회전력을 실어 도끼의 옆면으로 후려쳤다.
충격으로 밀려난 틈을 노린 단검의 칼날은 공기를 가르며 악마의 날개 끝을 스쳤고, 검붉은 피가 튀었다.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착지한 악마는 히죽이며 얘기했다.
“크핫, 불완전한 의식에 감사해야겠군... 즐거운 싸움이 되겠어”
이번에는 지상에서 그녀를 노리고 달려들며 양손의 발톱을 휘둘렀다.
격렬한 공방이 이어지며 발톱과 도끼가 수차례 충돌했고, 금속성 소리가 전장을 가득 채웠다.
공방의 사이에서 악마의 사각지대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하지만 예상을 훨씬 웃도는 빠른 반응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젠장, 만만치 않네...!'
*어 뱉듯 생각한 감상이었다.
그 순간 그는 도끼를 막아낸 후 땅을 구르며 무서운 속도로 내게 날아들었다.
급히 몸을 굴려 피했지만, 완전히 피하지 못해 날카로운 발톱은 어깨를 스쳤고 뜨거운 고통이 퍼졌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기회를 노리며 계속 움직였다.
이후 악마가 그녀에게 집중할 때마다 뒤로 돌아가 공격을 시도했지만,
매번 날개나 꼬리에 막혀 큰 상처를 입히진 못했다.
이전 전투의 경험인지 힘에만 기대지 않고 격렬한 공격 사이사이
교묘하고 방심할 수 없는 공격이 쏟아지며 우리 둘을 상대로 우위를 점해갔다.
명백히 한 수 위였다.
전세는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깊은 상처가 늘어났고, 움직임도 둔해지고 있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발해지는 주문들 사이사이로 시체는 끝도 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이미 탈진한 모험가와 동료들 너머로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들이 다시금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론 안된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이 마주쳤다.
불리한 상황 속에도 그녀는 익숙한 듯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단 한순간을 위해 버텨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공격에 시선이 끌린 틈을 타 양손으로 도끼를 고쳐쥐곤 다시 달려들어 크게 휘둘렀다.
곧장 손톱을 교차하여 그녀의 공격을 막았고 충격으로 인해 서로 밀려났다.
그는 반동을 손쉽게 버티고는 발톱을 바로 세워 곧장 달려들었다.
반대로 그녀는 밀려나며 힘이 빠진 척 한 손으로 도끼를 바닥에 늘어뜨렸다.
달려드는 악마를 확인한 그 순간 반대로 회전하며 벼락처럼 도끼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제프에게서 들은 자신의 급소를 완전히 노출시키는 공멸을 각오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악마는 확신에 찬 조소를 날렸다.
"그 수법은 알고있다!"
달려든 것은 함정이었고 공격을 예상한 듯 이미 거둔 손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동시에 내지른 반대쪽 손의 발톱이 그녀의 등을 뚫고 나왔다.
"크악!“
그녀는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치명적인 상처였다.
등을 뚫고 나온 회색 손은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어떠한 예감에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악마가 승리를 확신하며 발톱을 뽑아내려는 순간, 움직이는 나를 발견하자 꺼져가던 그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표정에서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너도...그럴 줄 알았다!"
그녀가 마지막 힘을 끌어모았다. 죽어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자신의 몸을 관통한 악마의 팔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받아라... 크래셔!"
그녀는 절규하며 모든 생명력을 쏟아부었다.
금빛 도끼에서 눈부신 푸른빛이 소용돌이치며 폭발했고,
마지막 혼신의 힘으로 악마의 몸통을 향해 내리쳤다.
악마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치명상을 입어 죽어가는 상대가 이토록 강력한 공격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탓이다.
"크하아악!"
거대한 도끼날이 악마의 왼쪽 어깨에서 가슴까지 깊숙이 파고들었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고, 악마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왼팔은 절단되어 바닥에 구르고 있었고, 드러난 가슴께의 상처에서는 붉은빛이 요동쳤다.
마지막 공격을 마친 그녀는 도끼에 기댄 채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공기가 뒤섞인 목소리로 피를 토하며 내게 말했다.
"... 네 차례다..."
이미 사각으로 움직인 나는 옆에 있는 나무를 발판 삼아 남은 힘을 다해 도약했다.
놀랍게도 그는 그만한 상처에도 기습을 눈치채 반응해 보였다.
그러나 큰 상처와 당혹감으로 인해 예리하지 못했고, 그 차이는 미세했지만 결과를 뒤집기엔 충분했다.
반응이 늦어 단검을 노리는 꼬리를 위로 튕겨냈다.
그대로 몸을 미끄러트리며 남은 단검으로 허벅지를 찔렀다.
비명을 토하며 주저앉은 악마의 남은 팔을 밟고 떨어지는 단검을 낚아채 심장 앞에 칼을 겨누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는 완벽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무기를 든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악마의 일그러진 얼굴이 왜인지 일렌과 겹쳐 보였다.
"큭... 그놈 대신이라고 데려온 모양이다만 이 년도 별반 다르지 않군."
비릿한 악마의 웃음이 목을 움켜쥐는 듯했다.
그때 다시 한번 쥐어짜 낸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그녀를... 구해..."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그것은 제프와 같은 망설임은 아니었다.
지금 찌르지 못한다면 나는 또다시 누군가를 포기하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피가 나도록 이를 악물고 망설임을 떨쳐냈다.
과거의 실패가 현재의 행동을 막게 둘 수는 없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단검을 단단히 쥐었다.
손에 전해지는 단검의 감촉이 나를 현실로 되돌렸다.
과거의 실패, 제프의 망설임, 그리고 일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소음과 공포가 모두 뒤로 물러나는 듯,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깨어났다.
그리고 몸을 굽혀, 남은 모든 힘과 결의를 담아 붉게 요동치는 심장을 향해 단검을 내리꽂았다.
요동치던 붉은빛이 사방으로 터지며 주변을 휩쓸었다.
퍼져나가는 빛에 닿자 움직이던 시체도, 악마도 재가되어 스러졌다.
끈적이는 안개도 사라지고 전장은 고요를 되찾았다.
나는 단검을 떨어뜨리고 흐릿해진 의식의 끈을 놓았다.
쓰러지는 찰나 발견한 것은 공터가 보이는 언덕 어귀에서 짙은 녹색의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의 뒷모습이었다.
'일렌...'
꺼져가는 의식 한편에서 한 여인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토미와 제프를 부탁해요.’
-
작은 횃불이 거칠게 흔들렸다.
돌바닥을 걷는 익숙한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한참을 말없이 응시하다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낚아챈 그것은 본 적이 있는 붉은 빛깔의 조각이었다.
건낸 조각을 집어 들었다.
말은 필요 없었다. 그것은 후회의 증거이자, 동시에 해방의 표시였다.
내가 멋대로 맡겨버린 짐이었다.
순간, 그녀와 시선이 맞닿았다.
“이번엔 내가 널 가르쳐야겠군.”
붉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작게 미소 지었다.
미소 속에는 전과는 다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힘과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암살격이란..."
미약했으나, 단언했다.
“심장을 향한 궤도. 그리고 잃은 것들을 기억하며
스스로 무너졌던 순간들을 재료로 만들어낸,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결단이다."
사라진 퀘스트를 추억하며
암살격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