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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께 보내는 편지 셔스
모험가의 단편 소설 12탄 - 안식
25568 2025.11.18. 23:23



<안식>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도 인간도, 빛도 어둠도, 시간과 공간의 개념도 없는 공허 속에서 문득 세상이 탄생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비롯되었다.

최초의 상상력에 이름이 생겼다. 그 이름에 이끌린 자들이 모였고,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상상해 냈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세상이 그들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상상의 크기는 점점 커졌다. 그들은 꿈을 꾸었다.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껏 상상했던 것들을 공간 속에 채워 넣었다. 대지가 펼쳐지고 물이 차 올랐다. 넓은 하늘에 구름이 배치됐다. 곳곳에 수 많은 생명체가 자리했다. 그 중심엔 인간이 있었고, 멘탈로니아라 이름 붙인 관리자들을 신으로서 섬기게 했다. 문명이 생겼다.

시간이 흘렀다. 어둠에 잠겨있던 세상의 끝에 노을이 그려졌다. 아침이 밝았다. 아직 거둬지지 않은 어둠이 서서히 사라졌다. 해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고 노을이 질 무렵, 마침내 세상이 열렸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긴커녕 눈길조차 받아본 적 없는 외로운 땅에 산 하나가 하늘을 뚫을 기세로 우뚝 솟아있다. 개척되지 않았기에 변변한 이름조차 붙여지지 못한 이 산은 이래봬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다.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이건만 산의 꼭대기는 온통 눈으로 가득했다.

산비탈을 따라 내려가니 어느덧 눈밭은 사라지고 거칠고 경사진 지형위로 억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부분임에도 정성스럽게 배치된 돌과 풀 무더기들이 산기슭까지 이어졌다. 그 밑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를 뒤로하고 땅속을 파고들어 아래로, 더 아래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둠을 지나 지하 가장 낮은 곳에 도달하자 광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죽음의 기운이 엄습했다.

동굴 안의 발 디딜 곳이라곤 중앙에 드러난 마당 크기의 조그만 땅덩어리가 전부였다. 사방을 가득 메운 용암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처럼 고요했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공간에서 유유히 흘러가는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까 궁금해 그 흐름을 따라가기라도 한다면 영원한 안식에 들것이다. 그래야 할 터인데, 용암 속을 배회하는 수많은 검은 형체들은 무엇인가? 왜 저들은 안식에 들지 못하고 있는가? 어떤 종류의 말로도 표현하지 못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가? 이곳에 안식은 없었다. 절규 속에서 피어난 절망만이 가득했다. 참지 못한 검은 형체 하나가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질러대며 머리로 추정되는 것을 위로 들이밀었다.

“기운이 음산하군.”

지면 위에 세워진 거대한 의자에 앉은 누군가가 발버둥치는 검은 형체를 내려다봤다. 그 크기만큼이나 압도적인 권능과 공포를 동반한 목소리에 겁에 질린 검은 형체는 용암 깊숙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아났다. 죽음의 신 뮤레칸은 귀찮은 듯 다시 고개를 올렸다. 그의 눈앞으로 장대한 용암 바다가 펼쳐졌다. 태양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건만 동굴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신들 중에선 그가 유일했다. 여느 날처럼 모든 시간을 의자에 앉아 보내던 뮤레칸은 지난날을 곱*었다. 세상의 모든 죽음을 관할하는 어둠의 군주이자 거대한 지하도시의 지배자. 그곳으로 흘러 들어오는 죽음의 기운을 흡수하여 힘을 키우고, 가장 마지막에 탄생했음에도 가장 강했던 멘탈로니아. 너무 강한 탓에 다른 멘탈로니아들로부터 배척당하고 세상 가장 깊은 곳으로 쫓겨난 몰락한 신.

뮤레칸은 복수를 다짐했다. 전쟁에서 패하고 대부분의 힘을 잃었지만 죽음의 신으로서의 권능은 남아있었으니까.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죽음을 예고했기에, 불사의 존재인 자신이 본래의 힘을 회복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열리고 닫히기를 수없이 반복한다면 반드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것이 착오일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고,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이 문제였다.

여느 날처럼 모든 시간을 의자에 앉아 보내던 뮤레칸은 다시 한번 곱*었다.

“기운이 음산하군.”

언제부턴가 죽은 자의 방문이 뜸해졌다.



죽음의 대가는 가혹하다.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생전에 쌓아온 많은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것이 한낱 데이터 조각이라 해도, 진귀한 보물이라 해도, 세상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라 해도, 개인의 견해가 반영된 가치일 뿐. 신의 관점에선 모두 평등하기에 죽음의 신은 어떤 형평성도 고려하지 않고 본인의 역할을 수행한다. 어디선가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제 3의 세계를 통치하는 자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죽음의 기운이 엄습했다. 마지막 순간, 눈앞에 삶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좋았다면 추억이고, 나빴다면 경험이었다. 짧은 시간 동안 긴 여행을 했다. 설렘이 가득했던 여정이었기에 죽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불이 꺼지고 환해진 눈앞에 죽음의 신이 보였다. 이제 돌아갈 곳을 선택해야 했다. 추억을 남기고 안식에 들것인가, 경험을 발판 삼아 다시 세상으로 나갈 것인가.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곳에 안식은 없었다.



세상의 탄생이래 셀 수 없이 많은 죽음으로 축적된 뮤레칸의 힘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빛과 어둠의 전쟁은 빛의 승리로 끝났지만, 큰 희생을 동반했다. 수많은 생명이 빛을 잃었다. 죽음과 비례한 생명의 소실은 뮤레칸을 다시 세상을 위협하는 마왕으로 재림 시킬 것이다. 캄캄한 미래. 멘탈로니아 정신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아직 전쟁의 열기가 남아있는 지하도시에 집결했다.

최후의 전장이자 얼마 전까진 마왕의 거처였던 도시의 한복판에 여섯 줄기 빛이 반짝였다. 천장에서부터 시작된 빛들은 빠른 속도로 하강해 지면과 부딪쳤고, 사방으로 분산되며 멘탈로니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이 정확히 반원을 그리고 서있었는데, 왼쪽부터 칸, 세토아, 메투스, 로오, 셔스, 이아 순이었다. 곧이어 맞은편 빈 공간에 피어난 불꽃이 거칠게 회전하며 타오르더니 세오가 등장했다. 과한 연출이었다.

“다 모였나.”

세오는 멘탈로니아들 앞으로 걸어가 중앙에서 마주보고 섰다. 전신을 휘감은 불길로 인한 피해를 염려한 건 아니지만, 모두의 중심에 서있는 모습이 꽤 자연스러웠다. 그를 바라보는 멘탈로니아들의 뒤에는 검은 형체들이 유영하듯 주변을 맴돌았다.

“전쟁의 망령들인가?

“네. 죽음의 영역으로 흘러온 영혼들이에요. 지금은 갈 곳을 잃고 방황 중이지만, 이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의 권능에 이끌리는 존재들. 곧 뮤레칸을 찾아가겠죠.

세오의 물음에 답하며 이아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듯한 검은 형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행동에 망령은 주춤거리더니 이내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상과 현실은 달랐고, 손은 망령에 닿지 못했다. 망령은 자신을 통과한 손이 신기한지 이아의 손 주변을 뱅뱅 돌았다.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세오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많군.”

도시의 상공은 온통 망령으로 가득했다. 천장 없이도 하늘을 가릴 만큼, 수많은 망령의 물결이 헤엄치고 있었다.



가장 왼쪽에 서있는 칸이 먼저 말했다.

“죽음은 필연적인 현상. 마왕의 권능이자 힘의 원천이니 죽음이 누적될수록 뮤레칸의 부활은 점점 가까워지겠지.”

“전쟁은 너무 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남은 이들이 살아갈 터전마저도.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우리는 세상에 개입할 수 없습니다. 원래대로 회복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할겁니다.”

“그건 뮤레칸도 마찬가지. 생명과 죽음의 순환. 세상과 마왕. 누가 더 빠를 것인가. 결국 악순환의 반복이군.”

“이것이 저희가 원했던 평화는 아니겠죠?”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라고 하지만, 전쟁의 결과는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로오의 말은 적적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셔스는 발언을 삼켰다. 그의 존재적 특성 덕에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삭막한 정적이 그의 말을 대신했다. 마치 무너져버린 세상의 이면처럼.

불에 타버린 숲, 해일에 휩쓸린 도시, 바다에 잠긴 섬, 그리고 갈라진 대지. 그 위를 하염없이 걸어 마침내 도착한 폐허가 되어버린 신전에서,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스러지는 생명을 붙잡고 마지막 남은 희망과 신앙을 양손에 가득 담아 기도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신에게 닿기를, 간절히 바랬다.

“신전을 만들어요.”

이아가 긴 침묵 속에서 그들을 구원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곁을 맴돌던 망령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법 많은 교감이 형성됐는지 망령은 손바닥 위에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순간 이아의 손에서 밝은 빛이 뿜어지며 망령을 덮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랄 법도 했지만, 망령은 얌전히 빛에 몸을 맡겼다. 검은 형체는 물에 씻기듯 허물어지고 빛나는 구체가 되어 연기처럼 흩어졌다.

“제가 이곳에서 모두를 구원할게요.”

허물어진 신전에 새로운 균열이 생겼다. 훼손이 심해 형태를 알아보기 힘든 석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평화라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석상이 무너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놀랄 법도 했지만, 남자는 얌전히 석상에 몸을 맡겼다.

“언제까지라도.”

죽음의 기운이 엄습했다.

“기운이 음산하군.”
“기운이 음산하군.”
“기운이 음산하군.”
“기운이 음산하군.”
“기운이 음산하군.”
“기운이 음산하군.”
“기운이 음산하군.”



이아는 자신을 희생하여 수많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구원했다. 긴 시간이 필요했지만, 죽음의 기운이 가득했던 세상은 점점 과거의 모습을 찾아갔다. 지하도시는 빛의 신전이 되었고, 죽은 자의 영혼은 이곳으로 흘러왔다. 간혹 뮤레칸의 영역으로 흘러간 영혼은 세상에 스며든 빛에 영향을 받아, 죽음의 대가로부터 크게 벗어났다. 개중에 구원의 힘을 강하게 받은 영혼은 어떤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부활은 점점 멀어져 갔다.

여느 날처럼 모든 시간을 의자에 앉아 보내던 뮤레칸은 앞날을 곱*었다. 세상이 열리고 닫히기를 수없이 반복한다면 반드시 재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시간이 되었다.

뮤레칸이 어둠의 권능을 발현했다. 그의 내면에서 흘러나온 어둠의 기운이 세상을 잠식했다. 어둠이 드리우자 모든 생명과 죽음이 활동을 멈췄고, 시간조차 얼어붙었다. 어둠은 순식간에 세상을 물들였고, 카운트다운이 끝나자 마침내 세상이 닫혔다. 신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시간이 찾아왔다.



똑- 똑-

시작됐다.

[ 저기요? ]

세상이 탄생하고.

[ 언제 끝남? ]

인간이 문명을 이룩한 이래.

[ 아직임? ]

세상이 닫힐 때마다 들려오는 소리.

똑-
똑- 똑-
쾅! 쾅! 쾅!

제 3의 세계를 통치하는 자에겐 익숙한 일이었지만,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방해받기 싫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똑- 똑- 쾅! [ 야 뭐하냐? ] [ 도랏듬? ]

[ 언제 열리나요? ] [ 아놔 ㅋ ]

[ 사냥중인데 갑자기 먼짓임? ] 쾅! 쾅!

[ 아아아아아아아 ] [ 일 똑바로 안함? ]

[ 뭐하냐고!! ] 똑- 똑- [ ㅅㅂ ]

[ 잠수함 패치? ] [ 5초준다 열어라 ]

[ 공지쓰면 다임? 마패여? ] 쾅!

[ 난리구만 ㅋ ]

[ 보상은 뭔가요? ] 똑- 똑-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크아아아아아악!“



『 뮤레칸이 분노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이곳에 안식은 없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고마워요.